문화의 기원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단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이라는 저자의 서문은 르네 지라르의 가장 중요한 이해의 척도다. 내용보다 서문의 제목이 눈에 선명하다. 각 장에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인용한 것은 저자의 다윈에 대한 존경심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학에서 비롯된 지라르의 지루한 여정은 인류학을 넘어 문화의 기원으로까지 확산된다. 그가 말하는 <문화의 기원>은 물론 그가 지금까지 주장해온 희생양과 모방적 욕망에 대한 정리 작업에 해당된다.

그러나, 머나먼 옛 이야기를 경청하듯 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문화의 기원’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대담집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을 읽다보면 무수한 의문들과 부딪치게 된다. 케임브리지 대학 이탈리아어과 교수인 피에라올로 안토넬로와 리우데자네이루 대학 비교문학 교수인 조앙 세자르 데 카스트로 로크는 르네 지라르와의 대담을 통해 그가 지금까지 이룩한 학문적 성과를 정리하기 위한 질문들을 던진다. 물론 논쟁적 질문과 그에게 반기를 들었던 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하기도 한다. 지라르는 첫 저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비롯해서 <폭력과 성스러움>등을 통해 보여주었던 일관된 주장을 하나의 흐름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희생양과 모방적 욕망에 대한 끈질기고도 집요한 탐구의 결과물들이다.

기독교를 통해 본 예수의 모습은 지라르에게 집단의 폭력과 무책임한 모방에 대한 희생양으로 인식된다. 그가 말하는 예수의 모습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다양한 문화적 풍토와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들을 확인하는 작업은 어쩌면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류가 쌓아온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인간의 행동들을 토대로 그가 읽어내고 싶었던 것은 당연히 인간과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본 ‘폭력’이다. 그것을 읽어내는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특히 에피큐러스 학파를 제외한 무신론에 대한 언급과 이슬람 문화권에 내재한 폭력적 성향을 최근의 9.11테러와의 관련성 측면에서 해석하는 이야기들은 논란이 많을 수 있다. 종교와 폭력을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논의의 주변부에서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나같은 얼치기에게도 많은 문제점이 보인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스스로 확인할 일이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모방한 제목 <문화의 기원>은 폭력과 희생양에 대한 모방이론을 토대로 지속되고 있는 르네 지라르의 작업에 대한 총결산에 해당된다. 인문학적 관심의 정점에는 항상 현실이 자리잡아야 한다고 믿는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불멸의 40인’에 선정됐다는 옮긴이의 친절한 해설은 그의 주장과 이야기에 권위를 부여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주장에 대한 논쟁점들을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특히 한국어판을 위해 뒤에 덧붙혔다는 레지 드브레에 대한 반론은 ‘레지 드브레’의 글을 읽지 않은 상태의 나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지라르가 반박하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레지 드브레의 글에 흥미가 생겼다. 지나친 반골 기질 때문일까?

흔히 우리들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실의 문제들을 ‘세상의 기원’을 탐구하기 위한 지라르의 견해와 연구를 통해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기원은 인간의 기원으로 바꾸어 이해해도 상관없다. 아니,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대한 기원을 탐구해온 저자의 목소리로 이해해야 좋을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속성과 지나온 시간들과의 싸움은 언제나 지루하고 공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 권의 책과 한 명의 천재적인 인간이 통찰해낸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학문의 의무와 역할에 대한 새삼스런 의문이 쏟아진다.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모든 개인들에게 ‘객관’과 ‘주관’의 기준이 있기는 한 것인가. 숭산 스님의 말대로 오직 모를뿐!인가.

세상의 기원이든 문화의 기원이든 지금도 여전히 우리들 주변에 널려 있는 희생양들과 모방적 욕망에 대한 그의 견해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을 논증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는 그들의 몫이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욕망의 부피와 크기를 확인하는 일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그 고통이 타인의 고통을 통해서라면 더욱 암담하다. 발딛고 서 있는 현실의 모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특별한 처방이 아니라 그 모순들을 확인하는 1차적 과정 자체에 목적과 의미를 둔다는 측면에서만 이 책은 나에게 의미가 있다.


06080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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