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문학과지성 시인선 321
남진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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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섯을 넘긴 다음부터
거을 앞에 서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내가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내가 거울에 비친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

서른여섯 거울 속의 나는 죽고
텅 빈 거울 속에 더 이상 나는 비치지 않고
거울 속 어두운 물 저편으로 흘러가
나는 흑사병이 도는 폐허의 도시에 도착한다
                                                              - ‘베니스에서 죽다’ 중에서

인간에게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다. 소중한 이유는 선악, 오호의 감정을 넘어서 한 사람에게 인생은 단 한 번 밖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직접 경험이든 간접 경험이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마디 마디가 모여 우리의 전 생애를 이루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그것이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고 쌓여온 세월이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든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뒤로 한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아야 바뀌는 것은 크지 않다. 모든 경험은 자신의 세계에서 비롯되지만 ‘용기’만으로 인생이 뒤바뀌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윤동주의 ‘파란 녹이 낀 청동거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은 너무 많다. 눈을 뜨는 순간 만나는 모든 것들이 바로 거울이고 내 얼굴의 다른 모습들이다. 갇힌 공간과 좁은 현실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자화상이다. 모든 사람들은 사물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꺼린다. 선택적 기억과 자신에 대한 안일한 태도, 미래에 대한 쓸데 없는 희망으로 치장한다. 계산된 위장과 가식이 아니라 눈감고 싶은 현실과 특별할 것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남진우의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는 이런 현실에서 일탈한다. 쉽게 일탈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는 꿈꾼다. 영원히 우리의 일부이면서 ‘타자’로 인식하는 죽음까지도.

그 대상들이 사자와 악어 같은 짐승이다가 낯선 장소이다가 비가 내리는 기후이기도 하다. 낯선 세계를 꿈꾸는 자는 현실에 부유하는 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길들여진 습관은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 지금-여기에 단단히 뿌리박지 못한 꿈은 유토피아를 꿈꾼다. 없는 곳을 꿈꾸는 자의 절망은 쉽게 드러나지 않고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간다. 남진우의 시는 그렇게 마술 같은 현실을 반영하는 만화경이다. 프리즘처럼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방 연속 무늬를 반복하는 만화경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보여준다. 내게는 그렇다.


얼마나 먼 길을 걸어 빗소리는
내 곁에 찾아온 것인지
깊은 밤 잠 깨어 내 머리맡 적시는 빗소리를 듣는다
비를 맞지 않아도 이미 빗소리만으로 나는 축축히 젖어
잠자리 위를 아득히 떠내려가고
연못가 흰옷 입은 여인들 버드나무 아래 울고 있다
그 울음 다 그치기 전 이 비는 또 누구를 깨우기 위해
먼 길 떠나는 것인지
가고 또 가버려도 빗소리는 남아서 내 머리맡을 적시고 있다
                                                                                   - ‘오래된 정원’ 중에서

누구에게나 비에 대한 기억은 있다. 오래된 정원에서 들리는 빗소리가 특별하진 않다. 세상 자체가 오래된 정원이다. 이 세상에 내리는 모든 비는 누군가를 찾아간다.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는 주관적 판단과 인식이 독자와 공감할 때 시는 의미가 있다. 세상과 소통하는 모든 방식은 이기적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객관과 이성과 합리를 가장한 모든 주과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혼란을 가져온다. 때때로 차갑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시인의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막 꿈에서 깨어난 듯한 나른함이 묻어난다.

여기가 어디인가, 새벽 세시에 목마른 사자 한 마리가 방 문 앞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방문을 열자 사자의 꼬리만 슬쩍 비친다. 그가 기다린 것은 과연 사자일까. 동화적 상상력을 넘어선 자리에 대입할 수 있는 주관적 대상은 모두 독자의 몫으로 파악해야만 하는 막막함!

독서

독이 묻은 페이지를 넘긴다
나를 암살하기 위해 누군가 발라놓은 독을
침과 함께 나는 삼킨다
독 묻은 책을 읽는 것은 독에 잠겨 서서히 익사해가는 일
피 속에 움트는 날카로운 외침에 귀 기울이며
다시 페이지를 넘긴다
그 어느 시인도 독으로 일생을 살진 못했다
그가 남긴 독이 책에서 책으로 돌고 돌다
어느 한가로운 일요일 아침
책을 펼쳐든 나를 깨문다
서서히 독에 마비되어가는 몸을 젖히고
나는 책 속을 빠져나가는 독사 한 마리를 본다

무릇 모든 독서란
독사 한 마리씩 길들이는 일이니


이 시집의 마지막을 ‘독서’가 차置構?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이후 특별할 것 없는 그의 시들은 여전히 낯선 감각 속에 살아 있다. 독서는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을 읽고 나를 읽는 것이다. 물론 ‘너’를 읽기 위한 모든 독서는 ‘너’를 길들이기 위한 행위이다. 독사와 독서의 유사성은 치명적인 ‘독’에 대한 해석이다. 읽는 행위가 독이 된다는 전제는 그 대상이 책이든 세상이든 사람이든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인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반복되는 일상 속의 치명적 ‘독’은 아닐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중독성은 뿌리칠 수 없는 강렬한 유혹만큼 치명적이다.


0610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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