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94
박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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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붉은 빛을 토해내며 서산마루에 걸린 태양은 죽음과 좌절, 소멸과 허무를 떠올리는 법이다. 그것을 푸른 시간을 예비한 빛의 굴절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밤의 시작을 알리는 황혼처럼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이 다시 시작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아이러니한 공통점은 망각이다. 언젠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것은 항상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을 가진 것이 인간이다.

시골, 원형적 삶의 공간에서 퍼올리는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공동체에 대한 기억. 박형준의 시의 토대는 그의 유년 시절과 농촌에서의 삶이다. 이제 얼마나 더 우리에게 농촌 공동체의 따스한 기억이 ‘추억’으로 혹은 ‘낭만’과 ‘아쉬움’으로 여겨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기억의 원형은 안타깝지만 지속적으로 전수되리라 믿는다.


황혼



아버지 삼우제 끝나고

식구들, 산소에 앉아 밥을 먹는다



저쪽에서 불빛이 보인다

창호지 안쪽에 배어든

호롱불



아버지가 삐걱 문을 열고 나올 것 같다


박형준의 새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그간에 시인이 보여준 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황혼’이 서시가 되었지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떠나는 것들과 남은 것들의 아쉬운 결별보다 보이지 않는 간격에 관심을 가져보자. 창호지 안쪽에서 흔들리는 그것은 누구인가.

독특한 감수성은 시인에게 필수아이템이다.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을 개성이라고 하지만 시인 나름의 빛깔과 무늬가 독자에게 수놓아질 수도 있고 불편하고 어색한 남의 옷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박형준의 그것은 어떠한가.



당신의 팔



당신의 팔 속에서

강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사람이 사랑을

사랑이 사람을

못 믿고

사랑을 사람이 두고

못 믿고



강물 속에 고기가

고기 속에 고기가

흐린 불빛 떠다니는

정육점 같은 팔 속에

나는 있고

고기 같은 강물 속에

당신은 있다



물살이 저녁 강 연안 지대에 부서진다

저녁 강물의 테이블엔

식빵 가루 점점이 흩어져 있다

어디선가 날려온 은빛 깃털이

물살에 떠밀려간다

울음 한번 짧게 울곤,

다른 데로 날아가는 두루미 부리같이



나는 당신의 팔 속

강물에 떠다니는

부스러기를 찍어 먹고

살 속의 창에

가슴속에 두고 아껴온

입맞춤을 하고 나는 언제나

당신의 팔에서 타인을 사랑한다

언제나 당신의 팔 속에서 죽는다


보통 보이지 않는 대상을 표현하려는 자들의 몸부림만큼 처연해 보이는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낯섦과 새로움에 반하고 기꺼이 당신의 팔 속에서 안기고 싶은 것이다.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로부터의 탈주 혹은 외면.

동물의 왕국에서나 눈여겨 볼법한 황제 펭귄의 생태가 갑작스레 따뜻하게 전해지는 것은 옆으로 누운 활자처럼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쓸려가지 못하는 운명 때문은 아닐는지. 삶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고단하게 북풍을 견디고 눈보라를 맞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일은 아닌지. 그래서 시인은 봄은 ‘의지’로 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


황제펭귄



얼음이 단단해지는 남극의 겨울이 오면 황제펭귄은 바다에서 내륙으로 이동한다. 포식자를 피해 짧은 다리로 빙산을 타고 얼음길을 걸어 바람막이의 안전한 평지를 찾아 100km를 이동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제의처럼 짝짓기를 끝내고 암컷은 알 낳기에만 몰두하여 몇 주 후에 주먹 크기만 한 알을 낳는다. 암컷은 힘을 모두 소진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알을 품을 수 없어 수컷에게 넘긴다. 암컷은 수컷에게 알을 넘기기 위해 수컷에게 최대한 몸을 밀착시키고 신속하게 알을 건네준다. 수컷의 짧은 두 다리 사이에는 주머니가 있어서 이 속에서 알은 안전하게 부화의 과정을 거친다. 암컷들은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바다로 되돌아간다. 그때부터 수컷들의 순례의 행진이 시작된다. 눈보라와 영하 60°C의 강추위 속에서 수백만 마리의 수컷 펭귄들이 다리 사이에 알을 끼우고 암컷들이 떠난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알을 지키기 위해 둥그렇게 뭉쳐 서로를 보호한다. 온몸이 눈보라에 뒤덮인 채로 어둠 속에서 백야의 무덤이 되어간다. 바깥에 있는 펭귄들은 안으로 들어가고 안에 있는 펭귄들은 다시 바깥으로 나오면서 그들은 그렇게 2개월 이상을 보낸다. 드디어 순례의 정점에서 새기들이 부화하고 수컷들은 되새김질한 먹이를 새끼에게 먹여주지만 그들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이내 한계에 도달한다. 바로 이때 저 멀리 바다에 가 있던 암컷들이 입안에 가득 먹이를 지닌 채 아침 해를 등에 지고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는 암컷들의 실루엣에 커다랗게 원을 이루면서 움쳐 있던 수컷들의 대오가 무너지고,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자신만의 목소리로 짝을 부른다. 2개월 이상의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암컷들은 자신의 짝의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한다. 입에 가득 문 먹이를 품은 채 뒤뚱거리는 다리로 수컷고 제 새끼에게 안겨든다.


이 도보승들에겐 흔히 Emperor라는 칭호가 붙는다.

이 피안의 황제들은 자신을 침묵 속에 열어놓고

자신의 고독으로 세계를 창조한다.

봄은 의지로 온다.


희망은 미래를 위한 일종의 환각이다. 그것은 이루어지짐과 무관에게 모든 것들의 존재이유가 되기도 한다. 펭귄은 무엇을 바라 2개월 이상의 긴 시간동안 바다를 바라고 있었을까. 시인은 우리가 사는 일도 황제펭귄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겠느냐고 묻는 듯하다. 그러다 문득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기도 하겠지만. 과거로 단단하게 뭉쳐진 빗방울처럼 그렇게.


빗소리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럼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그리하여 어느 날 투명한 울음을 울기도 할 것이다. 낯설게 다가오는 자신의 모습과 차창에 비친 또 다른 누군가와의 대면. 어색하기보다 차라리 객관화된 외로움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투명한 울음으로 가득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부대끼며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오늘도 어디론가 사라진다.


투명한 울음



그런 날이 있다

지하철 첫차를 타고 가는 여자가

차창에 떠 있는 자기 모습을 보고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 날이 있다

그녀의 눈에 떠 있는

내 얼굴을 보고 운 적이 있다

그런 날에는 깨진 사금파리에 빛나는

시려운 빛이라도 그리워진다


사라진 사람들은 저녁 빛을 받으며 돌아온다. 빛의 세상을 살아내고 어둠의 세계를 견디기 위하여 불빛을 찾아 하나둘씩 모여드는 사람들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서로를 위로한다. 그 위로는 인간의 몫이 아니다. 시인은 사물들이 보여주는 형상들, 소리들에 주목한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 차갑고 단단한 것 그리고 빛과 그림자.


저녁 빛



사물 속에 빛나는 고통처럼

또 저녁이 온다

버드나무 꽃가루 자꾸 날아와

다래끼를 나게 하는 바다



선창가 외진 술집

금 간 담벼락 밑에 핀 질결이꽃처럼

먼지투성이의 삶을

눈빛으로나마 바다에 빠뜨리며 걷는다



시간을 들여다보느라

한 개의 초점만 남은 눈먼 시계공

수평선에 잔해를 이루며 노을은

시간의 땔감들을 한 단씩 태우며 저문다



새살이 돋아나는 통증인가

부서진 초침과 분침 들

부드러운 상처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별들로

또 하나의 성좌를 이룬다

수평선이 빛이 나에게 고통을 준다


모든 고통이 사라진 후 잠에서 깨어난 듯 어두워지는 사위를 둘러본다. 부박하고 처량한 삶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젊은이에게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힐 무렵 찾아온 사랑처럼 누군가에겐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나마 시인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나지 않아서 울고 생각나도 울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사람들은 박형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그 젊은이는 맨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111103-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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