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572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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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낮달이 선명하다. 흰 손톱처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달의 모습이 기이하다. 별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나 밤과 낮,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시선에 닿을 때도 있고 잊혀질 때도 있다. 수많은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그러하다.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하던 20대 여성의 죽음은 처참하다. 전날 먹은 파리바케트 빵조각이 목에 걸린 것처럼 목이 멨다.


현실은 한 번도 인간의 욕망을 이긴 적이 없다. 자본의 논리와 탐욕을 앞선 어떤 ‘-ism’이 있었을까. 그 간극을 좁히려는 부단한 이상주의가 시詩의 본령이 아닐까. 오랜만에 읽는 진은영의 시집에도 예외 없이 슬픔과 고통이 주인공이다. 삶을 사랑하는 시인의 눈에 타인의 고통과 모순된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떨까. 자연의 아름다움, 사랑의 위대함, 철학적 진실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진은영의 좋은 시들은 대체로 라임rhyme과 리즌reason의 절묘한 교직물이다.”(신형철 해설, 「사랑과 하나인 것들 : 저항, 치유, 예술」, 113쪽) 


언어로 표명된 눈부신 아름다움 너머엔 반드시 리즌이 자리한다. 라임에 천착한 시의 본질에 닿아 있는 시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맡겨질 수는 없다. 치열한 일상과 생의 비극을 노래한 시들 사이사이에 놓인 진은영의 고백이 아프게 새겨진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에 오랜만에 나온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는 사랑 노래가 아니다.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시집 한 권을 읽고 몇 편을 필사할 때가 있다. 서시에 첫 구절이 시집 제목이 되었다. 사랑은 잘 팔리기 때문이지만 진은영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종류와 방법을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자기만의 사랑과 타인의 사랑이 다를 때 우리는 늘 ‘태도’를 본다.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청혼이 남아 있을까.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어도 사랑할 수 있을까. 숱한 의문이 떠오를 때쯤 「사랑의 전문가」가 나타난다. 


사랑의 전문가


나는 엉망이야 그렇지만 너는 사랑의 마법을 사랑했지. 나는 돌멩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 너는 마법을 부리길 좋아해. 나는 식물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부러뜨리자 새빨간 피가 땅 위로 하염없이 흘러갔어. 너의 마법을 확신한다. 나는 바다의 일종. 네가 흰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올랐어. 너는 사랑의 마법사, 그 방면의 전문가. 나는 기름의 일종이었는데, 오 나의 불타오를 준비. 너는 나를 사랑했었다. 폐유로 가득 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할 때, 나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한다. 푸른 물과 기름처럼. 물 위를 떠돌며 영원히


연쇄적 반응과 충돌의 메타포가 뒤섞인 사랑은 결국 슬픔과 망각이다. 영원히 섞이지 못하는 너와 나의 거리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상대를 향한 비난으로 자기 사랑이 마무리된다면 사랑의 아마추어다. 사랑의 전문가는 마법을 부리는 대신 타자를 변화시킨다. 스스로 열망하는 세계로 잠입하는 데도 불구하고 상대를 전문가라 칭하는 아이러니다. 그렇게 한 사람을 사랑하고 한 계절을 사랑하고 한 생을 사랑할 시간도 많지 않다는 조언과 충고들을 흘려듣다가 거울을 본다.


도둑맞은 가을을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침이 고이는 귤을 기다리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기다리면 된다. 금세 여름비가 시원할 테고 또다시 낙엽이 질 때 우리도 무지개처럼 각자 다른 빛깔과 모습으로 사라질 것이다. 때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건 운명을 수용하는 겸손 때문이 아닐까. 보이지 않고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을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낭만적 사랑과 감정적 사치를 허용한다. 


봄여름가을겨울

작은 엽서처럼 네게로 갔다. 봉투도 비밀도 없이. 전적으로 열린 채. 오후의 장미처럼 벌어져 여름비가 내렸다. 나는 네 밑에 있다. 네가 쏟은 커피에 젖은 냅킨처럼. 만 개의 파란 전구가 마음에 켜진 듯. 가을이 왔다. 내 영혼은 잠옷 차림을 하고서 돌아다닌다. 맨홀 뚜껑 위에 쌓인 눈을 맨발로 밟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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