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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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왼손을 다친 산티아고 노인이 물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길이 5.5미터 무게 70킬로그램은 족히 넘을 듯 싶은 인생 물고기를 포기할 어부가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상황에 적응하고 현실을 타계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장기적인 목적을 세우고 삶의 가치를 고민하는 일은 등따시고 배부를 때 할 수 있는 법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선 산티아고 노인은 84일이나 허탕을 쳤다. 85일째 손맛을 봤으니 어찌 포기할 수 있을까.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 인간 삶의 숭고함, 위기를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 먹고사니즘을 너머 자기 극복을 통한 해방감 따위는 어찌보면 허울좋은 평론이 아닐까. 노인은 그저 배가 고팠고 거대한 청새치와 밀당의 짜릿함을 포기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위험한 순간이나 포기하고 싶은 고통이 없지 않으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 누구나 견뎌야 하는 시간과 과정이 아닌가. 


소년 시절과 중년에 읽는 『노인과 바다』는 같을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었던 노인의 말과 행동, 신념이라기 보다 고집스러움, 물고기 한 마리에 매달리는 집착이 무엇을 말하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바닷가에 사는 소년의 일상과 미래가 따분해 보였고 지루한 스토리에 별 감흥이 없었다. 사춘기를 넘기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읽으며 헤밍웨이라는 작가에 관심을 갖게 됐으나 아주 오랫동안 『노인과 바다』를 재독하지는 않았다. 이제 소년보다 노인의 나이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다시 읽는 소설에서 보이는 건 노인의 지난했을 삶과 현재의 일상, 대책 없는 미래다. 일상을 돌보는 소년과의 우정 혹은 애정이 그를 견디게 하지만 그저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노인의 삶이 보편적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질병은 나에게 태만을 허용하는 동시에 명령한다. 질병은 나에게 늘어진 자세, 여가, 기다림과 인내에 대한 의무를 선사한다. 그러나 사유로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질병의 가장 큰 선물이다.”라고 말했다. 상처를 입고 육체적 고통을 견디는 상황에서 노인은 혼잣말이 는다. 청새치에 대한 연민, 수많은 ‘죄’에 대한 명상, 바다에 대한 생각들이 이어진다. 혼자 견디는 시간이어서가 아니라 사유로 인도하는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질병을 통해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고 고통과 아픔을 거쳐 성숙하며 위기와 불안을 견디며 자기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불운과 역경과 고난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자 삶의 통과의례다.


이를 통해 ‘겸손’을 배운다. 타인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인정하는 태도, 열린 생각이 자신을 자유롭게 할 뿐이다. 85일째, 평생 물고기를 잡아 온 노인의 불운에도 끝이 보일 때가 됐다. “노인의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아 있었”지만 “그는 희망과 자신감을 잃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잃는다는 건 삶을 포기하는 일일 테니까 말이다. 그는 쿠바 아바나가 보이는 멕시코 만 인근으로 출항한다. 무역풍이 부는 9월의 바다를 헤밍웨이는 직접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마이애미로 향하는 하늘의 비행기의 경로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 예전에 일했던 니콰라과 동부 모스키티아 해안의 카리브 해와 사자를 보았던 북대서양 카나리아 군도는 멕시코 만에서 멀지 않은 곳들이다. 바다는 노인에게 삶의 터전일 뿐 아니라 생애 무대이자 추억의 전부다. 


자연을 바라보는 두 가지 태도


이런 바다가 남성성의 상징인 ‘엘 마르el mar’라 명명돼야 마땅해 보이지만, 노인은 여성성의 바다 ‘라 마르la mar’였다고 고백한다. 원형적 상징으로서 바다의 이미지가 독자에게 어떻게 각인되어 있든 상관없다. 자연에 대한 공감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삶을 영위해온 노인에게 바다는 애증을 느낀다. 물고기를 죽여 자기를 살려야 하는 생태계의 순환 논리 앞에 겸손하다. 역대급 태풍 소식에 한반도가 긴장하고 있다. 자연은 때를 알고 찾아왔다가 물러가는 게 아니라 인간이 적응하며 생존을 거듭했을 뿐이다. 


도시인의 삶은 부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삶이 들과 산과 바다에만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장 원초적인 삶의 형태를 통해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하기 위해서 자연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열심히 일하고 편안한 노후를 준비하는 대부분의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꽃을 찍는 나이, 푸른 바다와 하늘에 감탄하는 나이가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이를 대체로 나이들어감의 증거로 삼기도 한다. 자연스런 삶은 어디에나 있으나 부자연스러움을 우리는 문명, 발전, 성장이라고 말한다. 


불멍을 위해 캠핑을 하고 하늘멍을 위해 잔디밭에 눕는 사람들이 느끼는 여유와 만족감은 설명하기 힘들다. 누군가는 써핑을 하고 누군가는 등산을 가며 또 누군가는 낚시를 즐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모터보트로 강 위를 누빈다. 바다로 상징되는 자연이 노인에게 어떤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지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어부의 노력이 아니라 라 마르la mar의 품에 안겨 평생을 보낸 한 인간의 감동적 서사가 아닐까. 


문학의 보편성과 작가의 문체


문학은 대개 작가의 사상을 반영하고 사회를 투영하는 척도로 기능한다. 소년과 노인의 관계를 파악하고 머리와 꼬리만 남은 청새치의 결핍과 노인의 귀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궁금하지 않다. 오독의 즐거움 또한 독자 각자의 몫이다. 짧고 간결한 단문 위주의 스타일리쉬한 문체를 가진 헤밍웨이는 나름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드보일드 문체가 주는 효과는 담백함이다. 감정의 과잉이 없고 군더더기 수식어가 따라붙지 않는다. 압축과 절제는 글쓰기의 교본이 되기도 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여백을 두되 허전하지 않다. 헤밍웨이는 당대 사회, 삶의 현장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개성적인 인물과 특별한 사건을 통해 서사가 이어지는 소설의 재미는 텍스트 세대에겐 여전히 매력적이다. 현재적 유용성의 남아 있는 한 문학은 보편적 정서를 통해 인간 삶을 위로하고 개인이 겪는 혼란에 돌파구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너만 그런게 아니라고, 모양과 빛깔은 다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한 생을 살아간다고. 지식으로서의 문학, 흥미진진한 스토리의 재미가 무용하지 않으나 우리는 대개 보편적 인간의 삶에 대한 감동과 위로를 위해 책장을 넘긴다. 


모임에서 다룬 이야기는 각자의 메모와 각자의 기억 속에 또 다르게 적힐 것이다. 삶과 죽음, 소년과 노인, 바다와 노인, 열림과 닫힘, 낮과 밤이 주는 시간과 공간 사이 사이에 산티아고 노인과 마놀린 소년과 각자의 닉네임과 토론장의 열기와 귀갓길의 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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