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바닥 위에 천막이 서고, 비닐 한장이 칼바람을 막아 주었다.
스티로폴 한장 깔고 침낭 속에서 살았다.
생수와 소금이 먹을 거리의 전부였다.
어떤 때는 5시에 일어나고, 어떤 때는 6시, 늦어도 7시에 일어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아스팔트 위에서 서너시간을 서서 보냈다.
또 스티로폴 한장 깔고 그 위에 앉아 밤늦게까지 몇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난, 겨우 9일을 보냈다.
나랑 함께 지낸 사람은 26일, 마로 아빠는 60일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쳤다.
두려울 것 없는 의지는 있으나 몸이 지쳐 자그마한 충격에도 곧 쓰러졌다.
짝지 부모님께 새해에 첫인사 드리러 간다는 한 여성 동지는,
방패에 맞아 이마가 찢어져 병원에 가서 상처를 꿰매야 했다.
오랜 기간 몸을 혹사시키는 바람에 모두 지치고 힘들었지만,
국가보안법 폐지를 향한 의지 하나로 버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 모두 모두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너무나 고맙다.
나 같은 사람도 낄 자리를 만들어 주어서..
상한 몸 잘 챙겨서 건강하게 다시 활동하시기를...
열린우리당에게 기대도 해보고,
국회의장의 직권상정도 외쳤지만,
그렇게 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우리는 우리대로 가야 한다는 것.
역사는 그렇게 그렇게 한발한발 나아간다는 것.
자, 그렇게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다시 계속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