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에의 예속'은 안락 상실에 대한 불안에 몰린 일종의 '능동적 니힐리즘'이었다. 억제심을 상실한 '안락' 추구에 대한 그러한 불안은 가까운 곳에서 안락을 보호해줄 자, 즉 이익보호자를 찾게 만든다. 회사에 대한 의존과 과잉충성, 모든 크고 작은 유력조직에 대한 이기적인 귀속심, 이것과 같은 계열선상에서의 국가에 대한 의존감각, 이러한 것들이 사회 전반에 걸쳐 강화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상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는, 예를 들에 회사에 대한 헌신적인 '충성'도 불안에 가득 찬 자기 안락 추구가 모습을 바꾼 형태에 불과하므로 거기에는 타인과의 격심한 경쟁이나 아무런 억제심도 없이 타인을 걷어차 내버리는 것이 당연한 일로서 포함되어 있다.-43쪽
어느쪽이나 그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주의자' 집단 내부에는 통속적이고 사회적인 편견을 비교적 많이 내포하고 있는 부분과 적은 부분이 있었다. 집단적 형태의 것들은 그런 부분이 불가피하게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질이 높은 이데올로기라 해도 신봉자집단이 있는 한 이른바 쓰레기 같은 부분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무릇 종교에도 '완전히 순수한 크리스트교'나 '완전히 순수한 불교'가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적 대표자나 창시자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완전히 순수한 이데올로기'는 사회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었다.-61쪽
'시장경제 사회' 속에서는 '생산'이라는 개념이 마구 사용되면서도 의심받는 일조차 없는 듯이 보이는데, 예컨대 '철강생산'이라고 할 때 누가 정말로 철강을 창조해낸단 말인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철분을 함유하고 있는 암석을 캐내어 거기서 쇠 부분을 녹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과정은 불가역적이어서 철제품이 무용지물 또는 무효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암석 속으로 되돌려보내어 다시 철광석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 이와같이 원상으로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적인 추출과정을 일반적으로 '생산'이라 부른다. 그것은 용어로서도 적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말을 일상적으로 쓰고 있으면 인간이 하는 일을 신이 하는 일인 양 숭배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와같은 불손함은 현대의 독특한 최신 최강의 '야만'이다. / 이점을 생각하면 '생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경제이론 속에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오늘날 모든 문화영역에서 그와같은 기초 '범주'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불가사의이다. 현재의 학문적 정체현상의 원인의 하나가 이 언저리에 있는지도 모른다.-73쪽
'부분'은 어느 것이나 '부분'이며 있을 수 있는 차이는 '더 중요한 부분'이라든가 '좀더 먼저 있었던 부분'과 같은 상대적인 차이뿐이다. 따라서 '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전체 그 자체다'라고 할 수 있는 특권적인 부분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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