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야구장에 가다. 2004/09/18 18:46

저 멀리 무등경기장(야구장)에서 응원소리가 들려올 때,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지리선생님 그 소리를 듣더니 말씀하시기를,

 

(특유의 시니컬한 목소리)

"남 돈 버는데 뭐 좋다고 저렇게 박수치고 소리지르는지 몰라"

 

어, 생각해 보니 그렇기도 하네.

 

어렸을 때는 야구글러브가 우리 동네에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비료나 사료 속포장지를 접어 글러브로 사용했다.  

그 종이는 습기를 막기 위해 기름이 먹여졌으니 질겼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기름이 없는 속포장지도 괜찮았다.

그것마저 없을 때는 비닐포장지를 쓰기도 했다.

 

그러다가 큰 자형 글러브를 우리집으로 가져오게 되었다.

포수 미트 하나와 야수용 미트 하나.

그 글러브는 곧 우리 동네 공용 글러브가 되었다.

그 글러브를 사용하는 사람은 포수와 1루수였다.

 

야구 방망이도 나무를 잘라 깍아 만들었고,

추수 후 논바닥이나 묘가 여기 저기 있는 뒷동산이 야구장이었다.

 

그렇긴 했어도 야구는 언제나 즐거운 놀이였다.

 

하지만, 난 돈을 내고 야구장에 가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야구장에서보다 집에서 티비로 보는 것이 더 좋았다.

다시 보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렇다고 한번도 야구장에 가보지 않을 것은 아니다.

매년 요때 두 대학이 벌이는 야구 시합을 몇번 보러 간 적은 있었다.

학교 다닐 때는 "일상 속에서 정치의 場"을 만들어야한다는 명분으로,

졸업한 후로는 그냥 야구 보러 한두번 갔던 것 같다.

 

(학교 다닐 때는 운동장 주위에 그리고 그 안에 정치적인 구호를 담은

펼침막이 많이 걸려있었고, 다음 날 체육행사 뒤에 거리행진을 했었다.

어제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희망하는 걸개그림 하나만이 있었다)

 

어제는 난 사무실에 나가지 않기로 마음 먹고,

학교 다닐 때 사귀었지만 한번도 야구장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각시와 함께 야구장으로 향했다.

 

빨간 벌레와 파란 벌레(울 각시의 표현이다)가 가득한 경기장에서

각시는 사진 찍다가 졸려, 배고파, 왜 저렇게 됐어 그 말만 반복하였고,

다음 스케줄인 영화 보기를 위해 경기가 끝나자 마자 경기장을 떠났다.

 

모처럼 직접 야구장에 가 보게 되어 즐겁기도 했지만, 

기껏 체육행사 들러리나 된 것인지 경기장 밖에 있는 풍물패와

외야석 저 멀리 달랑 하나 있는 걸개그림을 보면서,

저 젊은이들에게 사회에 대한 열정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저 씁쓸한 생각을 동시에 갖게 한 하루...

 

내 하루는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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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09-22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주 금요일에 야구장 간 이야기. 내가 무지 지루했던 양 써놨는데, 그렇게 재미없지는 않았음. 응원하는 소리가 하도 극성이라 도무지 경기에 집중을 못 해(그렇잖아도 규칙을 잘 모르는데) 공이 돌아다니는 양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왜 저렇게 됐어" 하고 자꾸 물었던 것.

2004-09-22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4-09-24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야구장 안 가봤어요. 대신에 경마장에는 가봤는데 아마 분위기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경마장은 아마 사람들의 들고나는 시간이 짧아서 그렇지 그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떨 때 야구장에 막 가고 싶냐면, 혼자 퍼질러 앉아 있고 싶을 때 혼자 울고 싶을 때 오히려 방구석보다는 야구장 생각이 나더라구요. 이럴 때 야구장 관중석에 앉아 있으면 딱 좋을 텐데... 장소 봐감서 슬퍼하고 싶은 거 참 우습죠... ^^
그런데 빨간벌레 파란벌레는 정말 재밌네요. 숨은아이님 동화 쓰시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

숨은아이 2004-09-24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야구장의 소음에 몸을 맡기고 싶으신 걸까요... 멀리서 보니 빨간벌레 파란벌레처럼 보이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