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부대
미국 내 아시안 혐오
일베
신천지
윤석열
진중권

사랑할 때는 보통 동맹을 구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우리는 같은 대상을 사랑하는 자를 흔히 경쟁자나 불법침입자로 여긴다. 그러나증오할 때는 예외 없이 동맹을 찾는다.
우리가 자기를 부당하게 취급한 자에게 불만을 품고 복수를 꿈꿀때 우리 편을 들어줄 사람을 찾는 것은 정당하며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의아한 것은, 우리의 증오가 눈에 보이는 불만에서 온 것이 아니어서정당성이 떨어질 때 동맹을 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욱더 강해진다는점이다. 우리가 자신과 같은 증오를 품은 사람들과 힘을 합치게 만드는것은 주로 비이성적 증오이며, 매우 효과적인 단결의 매개체가 되는 것도 이 증오다.
이러한 비이성적 증오는 언제 생겨나며, 어떻게 사람들을 뭉치게하는가? 증오는 우리의 부적합함, 쓸모없음, 죄의식, 그밖의 결함을자각하지 못하게 억누르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표현이다. 여기서 자기경멸이 타인에 대한 증오로 변질되며, 이 변질을 숨기기 위해 매우 단호하고 집요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물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우리와 같은 증오를 느끼는 타인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찾는 것이 되겠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보다자기가 우월하다고 느끼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얕보고 심지어는 동정도하지만, 증오하지는 않는다. 불만과 증오의 관계가 단순하고 직접적이지 않다는 것은 증오가 늘 자신을 부당하게 대한 사람을 향하는 것은아니라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데, 정작 증오는 엉뚱한 사람이나 집단에게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기경멸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부정하고 터무니없는 죄악적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 탓이며 자기가 저지른 과오임을 입증하는 진실에 대항하여 도덕적 증오심을 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국제 사회에서 다른 국가나 민족을 잘 증오하지 못하는데, 어떤 외국인을 보아도 자신이 우월하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에게는외국인에 대한 반감보다 (후버나 루스벨트 같은) 동포 미국인에 대한 증오가 더 신랄하다. 외국인 혐오증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 뒤처진 남부에서 심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미국인들이 사력을 다해 외국인을 혐오하기 시작한다면, 미국적 삶의 방식에 자신감을 잃었다는 신호가 될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어떤 꽉 짜인 전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개인이 누릴 이익을 포기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책임에서도 벗어나는 일이다. 개인의 판단력에 동반되는 두려움과 망설임, 의심과 막연한 체면의식에서 해방된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잔인하고 무자비해질 수 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개인이 대중운동의 조직성 속에서독자성을 잃게 되면 새로운 자유가 생긴다. 수치심과 회한 없이 증오하고 겁박하고 거짓말하고 고문하고 살해하고 배신할 자유가 그것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는 대중운동의 매력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욕될 권리"를 발견하는데, 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이는거부할 수 없이 매혹적이다.

전도 충동은 오히려 심각한 불안의 표출인 듯하다. 중심에 있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은 절박한 느낌이 표출되는 것이다. 전도 충동은 자신이 이미 가진 무언가를 세계에 주고자 하는 충동이라기보다는 아직 찾지 못한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열정에 가깝다.
그것은 자신이 숭배하는 절대 진리가 과연 오직 하나뿐인 진리임을 궁극적으로 논박할 수 없도록 표명하는 행위이다. 전도에 나선 광신자는타인을 개종 혹은 전향시킬 때 스스로의 믿음도 강해진다. 정당성이 쉽사리 문제시되는 신조일수록 강한 전도 욕구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터무니없고 명백히 비논리적인 독단을 언명하지 않는 운동이 "사람을 얻지 못하면 세계를 파괴하려 드는" 광적인 충동에 사로잡힐 것 같지는않다. 또한 신앙고백 내용과 실상이 크게 어긋나는, 말하자면 죄의식이 강한 운동일수록 자신들의 믿음을 타인에게 더 열렬히 강요한다.

신념은 사람이 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영혼을 조직하고 단련시킨다. 자신이 오직 하나뿐인 진리를 간직했다고 믿는 것. 자신의 공평무사한 정당함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 것. 신이 되었건 운명이 되었건역사의 법칙이 되었건 아무튼 어떤 미지의 힘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는 것. 자신의 적수가 악의 화신이어서 박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 것. 자기를 버리고 임무에 헌신하는 삶에 환희를 느끼는 것. 이 모든 것이 어떤 분야에서든 무정하고 단호한 행동을 취하게 만들 귀한 자질이다.

광신자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대부분은 창조적이지 못한 지식층에서 나온다. 지식인 계층을 나누는 가장 중대한 기준은 창조적인 작업에서 성취감을 얻는 지식인과 그렇지 못한 지식인이다. 창조적인 지식인은 현 체제를 아무리 통렬하게 비판하고 비웃건 간에 실상은 현재에 애착을 갖고 있다. 그의 열정은 개혁이지 파괴가 아니다. 대중운동이 자신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할 때면, 그것을 온건한 일로 바꾸어놓는다.
그가 주도하는 개혁은 표면적이며, 상황은 급정거 없이 흘러간다. 그러나 그런 발전 단계가 가능한 것은 대중의 무정부적 활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때뿐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구질서가 저항 없이항하거나 아니면 혼돈이 격발하는 순간 지식인이 힘 있는 행동가와 결탁해야 한다. 구질서와의 투쟁이 가혹하고 혼란스럽고 오로지 극도의단결과 자기희생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때, 창조적인 지식인은 대개 옆으로 밀려나고 창조적이지 못한 지식인-영원한 부적응자와 현재를 광적으로 증오하는 사람들이 상황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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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비하하는 기질, 몽상에빠지는 습성, 습관적인 증오심, 남 하는 대로 따라하려는 경향, 현혹되기 쉬운 경향,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려는 경향을 비롯하여 극심한 좌절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다양한 현상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단결의 동인이자 무모함을 부추기는 배우다.

죽음과 죽임이라는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빠질 수 없는 연극적 요소는 특히 군대의 경우에 명백하다. 군대의 제복, 깃발, 기장, 행진, 음악, 복잡한 예법, 제식 등은 군인들이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생과 사를 넘나드는 불가항력적 현실을 가리기 위해서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논할 때 전장(theatre of war), 전투 무대(battle scenes)라고들 말한다. 전투가 벌어지면 군 지휘자들은 한결같이 병사들에게 전 세계의 이목이 귀군들에게 집중돼 있다. 조국 선열들이 제군을 지켜보고 있다. 우리의 후손이 제군의 이야기를 듣게 될것이다. 같은 말로 사기를 북돋운다. 위대한 장군이라면 연설로 경천동지할 줄 안다.
영광은 하나의 연극적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청중을 뚜렷이 의식하지 않는다면 영광을 위해 싸울 일도 없다.

쾌적한 생활은 근본적 변화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상식, 실용적 관점이라고 부르는 것에 매달린다. 아닌 게 아니라, 이는 현재 상태에 이골이 날 만큼 익숙한 태도를 일컫는 이름일뿐이다. 쾌적하고 안전한 생활이 얼마나 확고한지, 현재의 상태와 다른현실이 설사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해도 막연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듯 혼란이 일어났을 때 정작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 매달리며 몽상가처럼 구는 것은 이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반면에 현재를 거부하고 오로지 앞으로 일어날 일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사람들에게는 다가오는 위험의 싹이나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자신에게 유리한 점 따위를 간파할 능력이 있다. 따라서 좌절한 개인과맹신자가 현상유지를 바랄 이유가 있는 사람들보다 뛰어난 예언자가된다. "미래가 요구하는 해결의 실마리는 영혼이 섬세한 사람들보다는광신자가 쥐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대중운동의 현재를 비하하는 태도가 좌절한 사람들의 성향을 강화하는 것은 분명하다. 좌절한 사람들은 현재에 관해서라면 좋은 것까지도 깡그리 헐뜯곤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서 엄청나게 즐거워한다는 사실이다. 불만을 표출하는 것만으로는 그런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아니, 있다. 이 시대가 얼마나 저열하고 천박한지 장황하게 떠듦으로써 패배감과 소외감을 달래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우리 인생만 엉망이 아니다. 이 시대에는 아무리 행복하고 성공해봤자다 하찮고 허튼 인생이다. 좌절한 사람들은 이렇듯 현재를 비하함으로써 막연하게 평등 의식을 얻는다.

대중운동이 벅찬 것, 불가능한 것을 옹호하는 것도 좌절한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다. 평범한 일상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은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위장하는 장치다. 가능한 것을 시도하다 실패한다면 순전히 자기 잘못이지만,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다 실패하면 그 임무가 막대한 탓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는 편이 가능한 것을 시도할 때보다 신뢰를 잃을 위험이 적다. 그렇기에 평범한 일상에서의 실패가 종종 과도한 담대함을 낳기도 한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머리로 이해한 강령은 그 위력이 삭감되게 마련이다. 무언가를 이해하면, 그것은 마치 우리 안에서 시작된 것처럼느껴지기 마련이다.

너무 쉽게 믿는 경향의 특이한 점은 사기 치는 경향과 결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잘 믿는 사람이 거짓말도 잘한다는 속성은 어린이한테서만 나타나는 성질이 아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혹은 보지 않으려는 태도는 남의 말에 잘 속는 순진한 기질과 야바위 기질을 동시에 조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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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적 부적응자 가운데 가장 돌이킬 수 없이 좌절한ㅡ따라서 가장독을 품은ㅡ자는 창조 활동을 향한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글쓰기, 그림, 작곡 따위를 시도했으나 가차없이 실패한 사람들, 신나는 창조성을 맛본 뒤 자기 안의 창조성이 메말랐음을 느끼고앞으로 절대 다시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생산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깨달은 사람들, 두 부류 모두 절망적인 열정에 사로잡힌다. 부와 명예도, 권력도, 나아가서는 다른 분야에서 쌓은 기념비적인 업적조차도그들의 갈망을 채워주지 못한다. 온 열정을 다해 어떤 숭고한 대의에헌신한다고 해서 반드시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채워지지 못한갈망은 없어지지 않으며, 바로 이 사람들이 숭고한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가장 강경한 과격파가 될 수 있다.‘

애국심이 건달들의 마지막 피신처라는 냉소적인 주장은 비난만은아니다. 광적인 애국심은 종교적 열광이나 광신적 혁명운동과 마찬가지로 죄의식의 피신처 구실을 종종 한다. 이상하게도 피해자와 가해자, 범죄자와 범죄의 희생자가 똑같이 얼룩진 인생의 돌파구를 대중운동에서 찾는다. 후회와 불만은 사람들을 같은 방향으로 달리게 만드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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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어떤 대중운동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강령이나 사업에 준비된 것이 아니라 어떤 효과적인 운동이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히틀러 이전 독일의 불안한 젊은이들은 흔히 동전 던지기로 공산당에 가입할 것이냐 나치에 가입할 것이냐를정했다. 제정 러시아의 인구 과밀 지구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유대집단은 혁명과 시온주의, 어느 쪽으로든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회의 쓰레기 같은 존재와 불평분자가 없는 나라는 질서정연하고 점잖고평화롭고 쾌적하지만, 새로운 변화의 씨앗이 없는 셈이다.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달갑지 않은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 대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신세계를 건설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다. 오로지 그들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다.

불만은 비참함이 견딜만할 때, 상황이 개선되어 어떤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시점에 최고조에 이르는 것으로보인다. 불평불만은 문제가 시정될 수 있을 것 같을 때 가장 신랄하다.

인생을 허비하고 망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유보다 평등과 우애를 더 갈망한다. 그런 사람이 자유를 부르짖는다면, 그것은 평등과획일성을 세우기 위한 자유일 뿐이다. 평등에 열광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익명성에 열광하는 것이다. 즉, 옷 한 벌을 구성하는 많은 실 가운데 한 가닥이 되는 것, 다른 것들과 구분되지 않는 한 가닥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지 않아 자신의 열등함도 드러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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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무튼, 피아노 - 모든 것은 건반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무튼 시리즈 48
김겨울 지음 / 제철소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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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는 활의 각도나 무게를 이용하여 색채를 비교적 쉽게 바꿀 수 있지만, 피아노는 (적어도 보기에는) 건반을 누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감탄하며 묻는다. 도대체 저걸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피아니스트는 답한다. 그 소리를 내기 전에 먼저 머릿속에서 들어야 해.


이것이 어쿠스틱 피아노의 매력이자 나의 두려움이다. 내가 상상하는 소리를 내기 위한 힘과 속도와 터치의 온갖 조합이 가능하다는 것.

향유하는 사람보다 참여하는 사람이 그것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온몸으로 참여할 수가 없다. 혹은 온몸으로 참여하면 더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속속들이 싫어하고 낱낱이 사랑하게 된다.

짝사랑에 빠진 이의 어설픈 연주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근사하다. 조용한 연습실에서 귀로만 듣던 곡을 더듬더듬 연주할 때, 내가 알던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자꾸 틀려서 답답하고 나 자신이 한심해도 그것을 상쇄할 만큼의 기쁨이 있다. 피아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 피아노를 사랑해서 피아노를 치는 모든 사람은 이 기쁨 속에서 소리를 듣는 삶의 특권을 가진다.

리스트는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을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함으로써 교향곡을 피아노곡의 형태로 일반 가정에 보급하는 데에 일조했다. 다른 악기로는 이 정도 크기—집 안에 들어가는 — 에 이만큼의 오케스트라 재현도를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음을 안다’는 건 좀 이상한 감각이다. 음이 말소리로 들린다. 정확히는 다장조8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계이름(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이 들린다. 어떤 조표에서든 D음이 연주되면 ‘레’라는 말소리로 들리는 식이다. 멜로디를 들으면 그 위에 덮어쓴 듯 멜로디의 계이름이 함께 들린다. 짐작건대 거의 즉각적으로 뇌에서 변환이 일어나는 것 같다.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다 보면 와글와글하는 글자들이 영역을 다투어가며 머릿속에 꽉 찰 뿐이다.

피아노의 세부 부품은 대략 1만 2,000개가 넘는다. 소리를 내는 현만 해도 200개가 훌쩍 넘고 그 현은 각각 핀으로 고정되어 있다. 댐퍼 부분에도 수백 개의 부품이 들어간다. 해머, 브리지, 공명판, 건반, 페달 등 각 파트의 부품을 따지면 1만 개 정도는 쉽게 넘는다. 이렇게 많은 부품이 피아노의 소리를 만들어 보내는데 모든 피아노가 같을 것이라고, 또 변함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숙련공도, 조율사도, 연주자도 피아노를 매만지고 어르고 설득한다. 피아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소리를 마음껏 들려준다. 연주자가 자신의 음색과 홀에 맞춰 정음을 해달라고 청한다. 조율사는 피아노의 목소리를 끌어낸다. 연주자는 다시금 피아노에 맞춰 연주한다. 피아노 연주는 피아노의 몸과 연주자의 몸과 공간의 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만나는 사건이다. 그 모든 과정에서 피아노는 자신만의 독특한 영혼을 가지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1년에 한 번은 조성진의 공연을 직접 가서 보는 게 삶의 낙 중 하나인데,

같은 곡을 어떻게 다르게 쳤는지, 나는 어떤 버전이 좋은지 탐험하는 것은 클래식 피아노 듣기의 재미 중 하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곡이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이 그걸 각자 다 리메이크해! 근데 곡이 길어서 조금씩 변화를 주는 부분이 다 달라! 곡이 길고 다채로우니까 쉽게 질리지도 않아! 심지어 막 데뷔하는 가수도 전부 같은 곡을 리메이크해! 근데 또 다 좋아! 세상에, 그러니까 하나를 깊게 파고들어 가는 걸 즐기는 성향의 사람에게 클래식 피아노는 그야말로 끝없는 노다지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모르는 레퍼토리도 한참 더 들어봐야 하고 모르는 연주자들도 찾아봐야 하는데 이걸 어쩌나. 모든 게 지극한 축복 같고, 때로는 끝없는 바닷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 같다. 책을 읽는 일과 비슷하다.

나중에 시간과 돈의 여유가 생긴다면, 그리고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약간의 여유를 허락한다면 스위스에서 열리는 베르비에페스티벌과 베를린필하모닉의 상주 공연장인 독일의 베를린필하모니에도 가보고 싶다. 오스트리아에서 열리는 잘츠부르크페스티벌과 영국 BBC프롬스에도 갈 수 있다면 끝내주는 여행이 되겠지.

단순히 피아노에서 소리가 나는 것까지가 아니라 그 소리가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까지가 연주이기 때문에 연주자는 이 모든 요소를 고려하면서 소리를 만들어나간다. 이를테면 비교적 작은 규모의 홀(관객이 적어 소리 흡수가 덜 되고 공간이 좁아 벽에 소리가 많이 반사되는)에서 피아노 리사이틀을 하는 연주자들은 소리의 울림을 조절하기 위해 터치와 페달링을 조절하는 경향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 새 작품이 발견되기도 하고 연대가 다시 정리되기도 하다 보니 작품번호가 없는 곡(WoO)이라는 표기나 정리한 사람의 이름(베토벤의 경우 Hess, 드뷔시의 경우 L.)이 Op. 대신 붙기도 하고, 작품번호 뒤에 a, b 같은 알파벳이 붙기도 한다.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인간 인지 및 뇌과학 연구소에서는 클래식 피아니스트와 재즈 피아니스트의 뇌를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했는데, 이에 따르면 두 장르의 피아니스트들은 같은 곡을 피아노로 연주할 때에도 서로 다른 정보 처리 방식을 사용한다. 실험에서 재즈 피아니스트들은 운지법이 틀리더라도 화성을 더 빨리 파악했고, 클래식 피아니스트들은 화성보다는 특이한 음을 연주하기 위한 운지법을 더 빠르게 찾아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재즈 피아니스트들은 구조를 생성하는 관점으로, 클래식 피아니스트들은 구조를 해석하는 관점으로 곡에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피아노를 배울 때도 춤을 출 때도 클래식 피아노와 클래식 발레에 어떤 고향과도 같은 느낌, 본능적인 노스탤지어를 느끼는데, 단지 규칙 안에서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다. 둘 모두 불가능한 완벽을 향해 불완전한 시도를 계속해나간다는 점이 나를 매료시키기 때문이다.

볼륨을 크게 한다고 해서 잘 들리는 소리가 되는 게 아니며, 볼륨이 작다고 들리지 않는 소리가 되는 게 아니다. 작으면서 잘 들리는 소리, 크지만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있다. 앞선 소리의 희미한 흔적이, 규칙적인 정적이, 예기치 못한 변칙이 모두 음악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듣고 나면, 그것을 듣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피아노를 연주하려면 들어야 한다. 내가 만드는 소리를 내가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소리가 정확히 어떤 소리인지 알아야 한다. 흘러나오는 소리가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듣는 동시에, 완전히 내 것이라는 생각으로 들어야 한다. 전자는 흘러가고 있는 음악을 듣는 것이고 후자는 내가 만들고 있는 연주를 듣는 것이다. 음악이 연결되게 하기 위해 음악 전체의 흐름을 한 발짝 떨어져서 듣는다. 그 흐름이 덜컹이지 않도록 연주에 반영한다. 두 가지 듣기는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연주하면 음악이 되고, 음악으로 들어야 연주할 수 있다. 연주자는 자신을 두 사람으로 나누어 듣는 동시에 친다. 완전히 숙달된 피아니스트는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이 과정에 자신을 맡길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피아노는 연주되고 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공기 속에서 연주되고 있는 음악이 피아노를 통과하는 중이라고 믿게 된다. 음악은 예측하거나 의도한 대로가 아닌, 그저 음악인 채 스스로 흘러간다.

내가 듣지 않는 음은 청자에게 들리지 않는다. 머릿속으로 먼저 듣지 않고 관성적으로 연주하거나 이미 연주된 음을 끝까지 듣지 않고 넘겨버리면 그 음은 전달되지 않은 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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