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우리가 입고 싶지 않은 옷 여러 벌이 주렁주렁 걸린 옷걸이로 만들어놓고는 그 모든 것이 그라고 믿으며, 우리가 그에게 입힌 옷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또 우리는 투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이미지를 왜곡하기도 한다. 자신의 감정 탓에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특성은 불교 교리에서 말하는 삼독, 즉 탐, 진, 치와 일치한다. 탐욕을 품고 상대에게 무언가를 원하면 그 상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탐욕이 원하는 대로, 화가 강요하는 대로, 어리석음이 상상하는 대로 상대를 왜곡한다.
한 사람이나 하나의 대상 전체를, 그것의 온전한 현실을 본다는 것은 현실에 꼭 맞게 응답하기 위한 조건이다. 대부분의 응답은 인지와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이며 순전히 지성적이다. 신문에서 인도의 기아를 다룬 기사를 읽으면 나는 거의 반응하지 않거나 생각으로만 반응한다. 그냥 참혹하다는 생각으로, 가엾다는 생각으로, 기껏해야 동정으로 반응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 눈앞에서 고통받는 광경을 본다면 사정이 다르다. 나는 가슴으로, 온몸으로 반응한다. 그와 함께 아파하고 돕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그 충동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구체적 고통이나 행복을 대면할 때조차 나는 겉핥기식으로만 반응한다. 그런 상황에 적당한 감정을 ‘생각’해서 적당한 행동을 하지만 그럼에도 거리를 유지한다. 현실적 의미에서 반응하고 응답한다는 말은 나를 아플 수 있게, 기쁠 수 있게,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모든 인간적 힘을 동원해 응답한다는 의미다. 그럴 때 나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에게 응답한다. 타인에 대한 내 경험이 있는 그대로의 그를 향하고 내 응답을 결정한다. 나는 머리로 혹은 눈과 귀로 반응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내 온 인격으로 응답한다. 온몸으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본다. 내 안에 존재하는 실제 힘으로, 응답의 능력을 갖춘 온 힘으로 응답한다면 그 대상은 대상이기를 멈춘다.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되며, 더 이상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다. 나는 그것의 재판관이기를 멈춘다. 이런 식의 응답은 보는 자와 보는 대상,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되는 완벽한 관계 맺음의 상황에서 가능하다.
그는 스스로 생각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내 안에서 생각한다’라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 사람의 착각은 레코드플레이어에 빗댈 수 있다. 레코드플레이어가 생각할 줄 안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지금 모차르트의 심포니를 연주하는 중이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레코드판을 플레이어에 얹었고 그것이 자기 안에 녹음된 음악을 그저 재생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