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아무튼, 피아노 - 모든 것은 건반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무튼 시리즈 48
김겨울 지음 / 제철소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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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는 활의 각도나 무게를 이용하여 색채를 비교적 쉽게 바꿀 수 있지만, 피아노는 (적어도 보기에는) 건반을 누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감탄하며 묻는다. 도대체 저걸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피아니스트는 답한다. 그 소리를 내기 전에 먼저 머릿속에서 들어야 해.


이것이 어쿠스틱 피아노의 매력이자 나의 두려움이다. 내가 상상하는 소리를 내기 위한 힘과 속도와 터치의 온갖 조합이 가능하다는 것.

향유하는 사람보다 참여하는 사람이 그것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온몸으로 참여할 수가 없다. 혹은 온몸으로 참여하면 더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속속들이 싫어하고 낱낱이 사랑하게 된다.

짝사랑에 빠진 이의 어설픈 연주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근사하다. 조용한 연습실에서 귀로만 듣던 곡을 더듬더듬 연주할 때, 내가 알던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자꾸 틀려서 답답하고 나 자신이 한심해도 그것을 상쇄할 만큼의 기쁨이 있다. 피아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 피아노를 사랑해서 피아노를 치는 모든 사람은 이 기쁨 속에서 소리를 듣는 삶의 특권을 가진다.

리스트는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을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함으로써 교향곡을 피아노곡의 형태로 일반 가정에 보급하는 데에 일조했다. 다른 악기로는 이 정도 크기—집 안에 들어가는 — 에 이만큼의 오케스트라 재현도를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음을 안다’는 건 좀 이상한 감각이다. 음이 말소리로 들린다. 정확히는 다장조8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계이름(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이 들린다. 어떤 조표에서든 D음이 연주되면 ‘레’라는 말소리로 들리는 식이다. 멜로디를 들으면 그 위에 덮어쓴 듯 멜로디의 계이름이 함께 들린다. 짐작건대 거의 즉각적으로 뇌에서 변환이 일어나는 것 같다.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다 보면 와글와글하는 글자들이 영역을 다투어가며 머릿속에 꽉 찰 뿐이다.

피아노의 세부 부품은 대략 1만 2,000개가 넘는다. 소리를 내는 현만 해도 200개가 훌쩍 넘고 그 현은 각각 핀으로 고정되어 있다. 댐퍼 부분에도 수백 개의 부품이 들어간다. 해머, 브리지, 공명판, 건반, 페달 등 각 파트의 부품을 따지면 1만 개 정도는 쉽게 넘는다. 이렇게 많은 부품이 피아노의 소리를 만들어 보내는데 모든 피아노가 같을 것이라고, 또 변함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숙련공도, 조율사도, 연주자도 피아노를 매만지고 어르고 설득한다. 피아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소리를 마음껏 들려준다. 연주자가 자신의 음색과 홀에 맞춰 정음을 해달라고 청한다. 조율사는 피아노의 목소리를 끌어낸다. 연주자는 다시금 피아노에 맞춰 연주한다. 피아노 연주는 피아노의 몸과 연주자의 몸과 공간의 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만나는 사건이다. 그 모든 과정에서 피아노는 자신만의 독특한 영혼을 가지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1년에 한 번은 조성진의 공연을 직접 가서 보는 게 삶의 낙 중 하나인데,

같은 곡을 어떻게 다르게 쳤는지, 나는 어떤 버전이 좋은지 탐험하는 것은 클래식 피아노 듣기의 재미 중 하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곡이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이 그걸 각자 다 리메이크해! 근데 곡이 길어서 조금씩 변화를 주는 부분이 다 달라! 곡이 길고 다채로우니까 쉽게 질리지도 않아! 심지어 막 데뷔하는 가수도 전부 같은 곡을 리메이크해! 근데 또 다 좋아! 세상에, 그러니까 하나를 깊게 파고들어 가는 걸 즐기는 성향의 사람에게 클래식 피아노는 그야말로 끝없는 노다지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모르는 레퍼토리도 한참 더 들어봐야 하고 모르는 연주자들도 찾아봐야 하는데 이걸 어쩌나. 모든 게 지극한 축복 같고, 때로는 끝없는 바닷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 같다. 책을 읽는 일과 비슷하다.

나중에 시간과 돈의 여유가 생긴다면, 그리고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약간의 여유를 허락한다면 스위스에서 열리는 베르비에페스티벌과 베를린필하모닉의 상주 공연장인 독일의 베를린필하모니에도 가보고 싶다. 오스트리아에서 열리는 잘츠부르크페스티벌과 영국 BBC프롬스에도 갈 수 있다면 끝내주는 여행이 되겠지.

단순히 피아노에서 소리가 나는 것까지가 아니라 그 소리가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까지가 연주이기 때문에 연주자는 이 모든 요소를 고려하면서 소리를 만들어나간다. 이를테면 비교적 작은 규모의 홀(관객이 적어 소리 흡수가 덜 되고 공간이 좁아 벽에 소리가 많이 반사되는)에서 피아노 리사이틀을 하는 연주자들은 소리의 울림을 조절하기 위해 터치와 페달링을 조절하는 경향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 새 작품이 발견되기도 하고 연대가 다시 정리되기도 하다 보니 작품번호가 없는 곡(WoO)이라는 표기나 정리한 사람의 이름(베토벤의 경우 Hess, 드뷔시의 경우 L.)이 Op. 대신 붙기도 하고, 작품번호 뒤에 a, b 같은 알파벳이 붙기도 한다.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인간 인지 및 뇌과학 연구소에서는 클래식 피아니스트와 재즈 피아니스트의 뇌를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했는데, 이에 따르면 두 장르의 피아니스트들은 같은 곡을 피아노로 연주할 때에도 서로 다른 정보 처리 방식을 사용한다. 실험에서 재즈 피아니스트들은 운지법이 틀리더라도 화성을 더 빨리 파악했고, 클래식 피아니스트들은 화성보다는 특이한 음을 연주하기 위한 운지법을 더 빠르게 찾아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재즈 피아니스트들은 구조를 생성하는 관점으로, 클래식 피아니스트들은 구조를 해석하는 관점으로 곡에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피아노를 배울 때도 춤을 출 때도 클래식 피아노와 클래식 발레에 어떤 고향과도 같은 느낌, 본능적인 노스탤지어를 느끼는데, 단지 규칙 안에서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다. 둘 모두 불가능한 완벽을 향해 불완전한 시도를 계속해나간다는 점이 나를 매료시키기 때문이다.

볼륨을 크게 한다고 해서 잘 들리는 소리가 되는 게 아니며, 볼륨이 작다고 들리지 않는 소리가 되는 게 아니다. 작으면서 잘 들리는 소리, 크지만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있다. 앞선 소리의 희미한 흔적이, 규칙적인 정적이, 예기치 못한 변칙이 모두 음악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듣고 나면, 그것을 듣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피아노를 연주하려면 들어야 한다. 내가 만드는 소리를 내가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소리가 정확히 어떤 소리인지 알아야 한다. 흘러나오는 소리가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듣는 동시에, 완전히 내 것이라는 생각으로 들어야 한다. 전자는 흘러가고 있는 음악을 듣는 것이고 후자는 내가 만들고 있는 연주를 듣는 것이다. 음악이 연결되게 하기 위해 음악 전체의 흐름을 한 발짝 떨어져서 듣는다. 그 흐름이 덜컹이지 않도록 연주에 반영한다. 두 가지 듣기는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연주하면 음악이 되고, 음악으로 들어야 연주할 수 있다. 연주자는 자신을 두 사람으로 나누어 듣는 동시에 친다. 완전히 숙달된 피아니스트는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이 과정에 자신을 맡길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피아노는 연주되고 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공기 속에서 연주되고 있는 음악이 피아노를 통과하는 중이라고 믿게 된다. 음악은 예측하거나 의도한 대로가 아닌, 그저 음악인 채 스스로 흘러간다.

내가 듣지 않는 음은 청자에게 들리지 않는다. 머릿속으로 먼저 듣지 않고 관성적으로 연주하거나 이미 연주된 음을 끝까지 듣지 않고 넘겨버리면 그 음은 전달되지 않은 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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