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이스트 - The Solois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눈물이 흘렀다.  둘러보니 나 말고도 눈물을 흘리는 여성 몇이 보인다. 눈물을 훔치면서 '내가 왜 울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풀어 생각하면, 이성적으로는 울 만한 장면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눈은 울고 있었다는 뜻.  

그것은 음악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음악에 미친 사람을 보기 때문이었다. 음악은 두고 두고 내게 그런 존재다. 윈도우미디어에서 봄직한 울렁울렁 야릇한 천연색 화면들처럼(실제 이런 화면을 극장용 영화에서 쓰는 건 처음 봤다) 무언지 알 수는 없는데 계속 시선을 붙잡고 있는 어떤 것처럼, 그것을 느끼고 만지고 보듬고 내치는 사이, 그 중 어떤 하나에 꽂히면 문자 그대로 '미.치.게.만.드.는.것.'  

잔인하거나 무식한 말이 될 지도 모르지만 한 마디 한다면, 대체 음악 혹은 예술이 미치지 않고 제대로 만들어 질 수 있겠는가. 적어도 우리가 오래 전부터 명장으로 기억하고 있는 많은 예술가들은 일찍 죽어버리거나 결국 미쳐서 죽었다.

나다니엘은 미쳐 있었다. 정신분열증이라는 병명을 가진 그 자신에 비해 또 다른 의미로 미쳐 돌아가는 LA라는 도시에서 순수하게 오로지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만을 붙들고, 베토벤 동상을 도시의 천사 삼아서, 혼자 응집되어 외부의 그 어떤 것과도 연관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 

그런 그도 외롭다. 그에게는 친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세상에서의 친구란, 기브 앤 테이크. 서로 줄 것이 있어야 하고 받을 것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서로가 원하지 않는 선물을 주어서 속으로 불만스럽더라도 그것을 용인해 내어야, 헤이 마이 프렌드! 하며 어깨를 투닥거릴 수 있다. 

스티브는 미치지 않았다. 그에게 음악은 나처럼 미치게 만드는 것인 줄 알면서 멀찌기 떨어져 오롯이 감상하면 되는 것이고, 그 감상법에 따라 미쳐 있는 사람이 만든 음악에 대한 경외심을 간직하고는 있다. 그는, 배운 놈이다. 나다니엘이 쥴리아드에 잠깐 다니기는 했지만 음악 외에 소위 교양이라고는 배울 새가 없었던 것과는 달리 백인 주류 사회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상도 타고 유명세도 떨치는 잘 나가는 사람이다. 

여기서 백인 미국인의 선민의식이 등장한다. 자기보다 겉으로는 하위인데 속으로는 무언가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의식.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도 좋고 나도 좋은데 무엇이 잘못이냐는 의식. 그렇게 함으로써 실은 자신이 또 다른 목표를 상정하고 그 목표에 이르러 결과물을 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다구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그런 의식.  

나다니엘에게 스티브는 유일한 친구. 유일한 친구이기에 그는 아무 때나 스티브의 회사에 찾아와 곤란하게 하기도 하고 아무 때나 전화를 걸어 업무를 방해하기도 하고 'I love you'라고 애절하게 외치기도 한다. 정신병자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친구라고는 스티브 뿐이기 때문에. 

스티브에게 나다니엘은 친구들 중의 하나. 하지만 돌봐주어야 하는 친구. 걱정되는 친구. 항상 같이 있을 수는 없는 친구. 친구라고 했으니 반드시 자신이 기대하는 것만큼 그 재능을 이끌어 내야 하는 대상. 그리고 자신이 친구를 가지고 상업적인 이용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체 검열을 하느라 피곤하게 만드는 친구. 

이전의 헐리우드 영화에서라면 나다니엘은 제대로 한번 공연을 멋드러지게 하고, 스티브에게 감사했겠지만, 그리고 둘은 해피하게 좋은 친구들로 남았겠지만, 영화 솔로이스트가 적어도 그런 압박에서 벗어나 친구의 함수 관계에 대해서 물음표를 날려준 것은 고맙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니 더욱 그렇기도 하겠고.  

아무튼 나는 눈물을 흘렸고, 음악은 베토벤의 그것이 가진 본래의 위용 때문에 무조건 좋았으나, 음악 자체가 지닌 광기에 별무관심인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지루할 것이 틀림 없으니, <러쉬>류의 감동을 기대하고 표를 끊지는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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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11-25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왜 추천은 그렇게 짜????
난 러쉬류의 감동은 별류야,,,넘 흔하잖아????ㅎㅎㅎ
암튼 나도 이 영화보면서 나도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흘리고 싶어~.ㅎㅎㅎ
참 미스터 다우니 쥬니어의 연기는????연기 잘하는 사람인데 상복은 왜 없을까,,,

치니 2009-11-25 12:04   좋아요 0 | URL
별점은, 그냥 지 맘이에요. ㅋㅋ 제 나름의 감동은 받았지만 왠지 영화 자체에 대해선 투썸즈업이 안되더라구요.
언니도 보면 재미나게 보실 거 같아요.
다우니주니어, 역시 연기를 참 잘했지만 왠지 이번에도 상복 없이 제이미에게 양보할 거 같은 느낌이 팍팍 드는데요. 헤.

토니 2009-12-01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이 있는 영화를 좋아해서 얼근 가서 봤어요. 깊고 깊은 감동은 아니지만 분명 뭉클한 부분이 있었죠. 하지만 왠지 아카데미를 겨냥한 계산된 영화같아 조금은 씁쓸하더라고요.. 저도 보는 동안 '왜 늘 히어로는 백인인가?' 라는 생각을 했어요. 혹시 "다우트" 라는 영화 봤어요? 정말 명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인 작품이예요. 이것 역시 남동생 추천작. 아직 전이라면 꼭 한번 보세요. 정말 뚜썸즈업이예요!

치니 2009-12-01 12:39   좋아요 0 | URL
아카데미를 겨냥한 영화 같다는 말씀을 듣고보니, 흐음 저 역시 약간은 그렇다 싶은데요? 예리하십니다.
다우트, 예전에 보려고 했다가 놓친 거 같네요. 멋진 남동생님 추천이니 꼭 봐야겠어요, 아흐.

 
느림보 마음 - 시인 문태준 첫 산문집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누구라도 반박할 수 없게 좋은 말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들은 지나치게 반복 권장되어서 '아 이젠 정말 지겹다 그런 말, 어차피 현실에서는 그 말대로 하지도 못하잖아'라고 생각되는 말들이 있다.  

'느림의 미학' 같은 말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일찌기 밀란쿤데라가 '느림'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고, 산책을 하자거나 워킹을 하자거나 단어만 바꾸어가면서 현대인들의 헐떡거리는 발걸음을 늦춰보려는 시도도 많았다.  

문태준의 '느림보 마음'도 역시 그 연장선에 있지만, 시인의 읊조림과 같은 짧은 글들은 읽다보면 느림의 '미학'보다는 느림보 '마음'으로 저절로 옮아가게 해준다는데 그 실용성이 있다.  

가족 혹은 그가 더 즐겨 사용한다는 식구에 대한 무한한 서정성이, 식구가 내게 주었던 지긋지긋함과 자꾸 부싯돌이 부딪히듯 스파크를 내서 순해진 마음결에 제동을 걸고 약간은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느낌을 받았던 건, 시인만큼 소박하고 순수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갖지 못한 내 가난한 마음에 역시 그 시원이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모든 것을 아름답게만 본다고, 더럽고 힘든 것을 제껴놓는다고 느림보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니요, 느림보 마음이 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느려져야 하는데, 이 전염병 같은 조급증을 어서 눌러버려야 하는데', 라고 '욕심껏' 생각하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지독한 욕망의 발로가 될 뿐.  

펄떡거리며 난리를 치던 물고기도, 물 안에 내려놓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유롭고 편안하게 헤엄을 치는 것. 일상과 내 숱한 저열한 욕심들과, 어깨를 밀치며 나아가려는 어줍잖은 경쟁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고요한 물 자리를 내 안에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기 위해서 작게나마 실천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가, 이런 책을 읽고 가끔 하늘을 보면서 무연히 멍한 시간을 갖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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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사 膳友辭 

_함주시초 4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 

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 

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 나조반: 나좃쟁반. 갈대를 한 자쯤 잘라 묶어 기름을 붓고 붉은 종이로 둘러싸서 초처럼 불을 켜는 나좃대를 받치는 쟁반 

*소리개소리: 솔개소리. 솔개는 무서운 매의 일종임. 

*세괏은: 매우 기세고 억세고 날카로운. 

 

 

 

 

 

 

 

 

최근 위 백석의 시를 한 달 여 강의를 들었던 <동무론>과 연계하여 다시 들었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는 백석의 당당함은 예의 동무론에서 김영민 선생이 '욕심없는 의욕'을 설파하는데 쓰였다. 공부란, 하면 할 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지는 것임을, 구절구절 어려움에 통탄의 한숨을 쉬며 책을 읽다가 강의까지 들어도 어려워서, 겨우 깨닫는 나는, 앞으로 가난해도 서럽지 않게, 외로워할 까닭 없게, 누구 하나 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그깟 한 달의 강의로도, 한 권의 책을 읽는 행위로도 쉬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임을 또한 여실히 깨우쳤는데,

고작 이 정도의 깨달음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는 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시 한 편이 갖는 아름다운 위력에 대해서 멍 하니 놀라기도 하고, 그러니 나 따위, 무엇을 읽어도 함부로 까불어대지 말자는 자성이 들기는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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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2009-11-14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이 차요, 치니님

치니 2009-11-14 22:02   좋아요 0 | URL
춰요, 감기 조심, 니나님. :)

파고세운닥나무 2009-12-22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지하가 말하는 '흰 그늘'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백석은 오래 묵혀 읽을수록 좋은 시인인 것 같아요.

<사슴>의 발랄함도 처음엔 마뜩찮았는데,후기시와 균형감을 이룬다는 생각도 하구요.

개인적으로 제가 용렬하다고 느꼈던 적이 있어요.

전 김영민 선생님이 교수직을 버린 게 멋지구나 했는데,숙대에서 다시 교수 하신다니까 왠지 그렇더라구요.

좋은 글 고맙게 보고 갑니다.

치니 2009-12-23 12:13   좋아요 0 | URL
김지하의 흰 그늘은 잘 모르지만, 백석이 오래 묵혀 읽을수록 좋다는 말씀에 공감해요. 아마 백석 뿐 아니라 좋은 시인들의 글은 거의 그렇겠지요, 그것이 또한 시가 가진 최대의 매력인 듯. 언제 어떻게 또 누구에 의해 읽혀지냐에 따라 늘 달라져요.

제가 알기로는 김영민 선생의 숙대 교수직도 이번 학기를 끝으로 마감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아마 짐작하는 그 이유로 그만두시는 것 같습니다. :)

첫 댓글 반갑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09-12-23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지하의 자서전이 <흰 그늘의 길>이에요.

김영민 선생님 교수직 관련한 일은 '치니'님으로부터 처음 듣네요.

전에 쓰시마 유코 소설에 관해서 댓글 단 적 있는데요^^

공감이 가는 댓글 고맙습니다.

치니 2009-12-23 23:17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김지하씨 <흰 그늘의 길>도 한번 읽어보고싶네요. :)
 

아들은 요즘 노래 연습을 한다. 

아들은 노래 연습을 하지만 소위 보컬 트레이닝을 받지 않아서, 자기 맘대로 아무 목소리나 내면서 연습한다. 

나는 그렇게 자기 맘대로 연습하고 무언가를 만들면서 노는 아들이, 엄청 부럽다.  

참으로 부질 없는 소리지만, 내가 그 나이 때 이러고 놀았으면 지금쯤은 조금 더 잘 놀고 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까.

http://minihp.cyworld.com/46011741/3120912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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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0 1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1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09-11-1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내말이,,,나도 그런게 가장 후회스럽다는,,,그런데 우리 땐 그럴수밖에 없지 않았어???암튼 난 자기가 올린 링크가 안보인다,,싸이는 내 컴으론 안돼~흑

치니 2009-11-11 11:10   좋아요 0 | URL
아, 맥킨토시라서 안되나? ^-^;; 헤, 별 거 아니에요. Creep을 지가 다른 뮤직비디오에 얹어서 불러본 거.
우리 때 뿐 아니라 요즘도, 어떤 아이들은 그럴 시간이 없이 공부하느라 바쁠테고, 나이와 상관없이, 잘 노는 건 모종의 훈련이 필요한 거 같아요. ^-^

네꼬 2009-11-1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요, 치니님도 잘만 노시면서! 근데 핸드드립 커피는 어떻게 됐어요?

치니 2009-11-12 20:29   좋아요 0 | URL
^-^;; 놀아도 놀아도 더 놀고싶은 이 마음, 어찌 할까요.
핸드드립 배웠지만, 결론은 역시 버킹검. 자기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하면 된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
 
마녀의 한 다스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문화인류학, 개정판 지식여행자 7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이단은 완결된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 구멍을 내준다. 늘 보아온 풍경을 달리 보게 하고, 신선한 면을 보게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의나 상식으로 여겨져온 것을 뒤집는 위협도 숨기고 있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단순히 정의하자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남들이 더 잘 알아듣게 쓰는' 것일 지도 모른다. 요네하라 마리의 책을 두번 째(지난번 '프라하의 소녀시대' 이후) 접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명료하고, 균형 잡혀있고, 유머러스하고, 교조적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성찰을 담담하게 나누는 그녀의 화법은, 위에 적은 한 문장으로 간단히 요약될 만한 일관된 주제를 여러가지 사례로 풀어내는 이 한 권의 가볍지도 묵직하지도 않은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엔돌핀의 역할을 한다. 고정관념이나 상습적인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 같은 이에게도 조금의 부담감이나 죄책감을 주지 않고 그저 그녀의 명강의에 즐겁게 귀를 기울이면서 서서히 마음을 열게 하니, 효과적이기 이를 데 없는 것. 

이것이 그녀가 작가 이외에 가진 또 하나의 직업, 통역사라는 직업이 가진 장점 - 타 문화에 접한 경험이 유달리 많다는 -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 마리 여사에 비하면 그 경력이나 실력이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번역과 통역 일을 해보았던 나의 주장이다. 

감히 말해보건대, 마리 여사는 통역사가 아니라 다른 어떤 직업을 가졌어도, 이만큼 혹은 그 이상의 통찰력으로 그 직업을 통해 얻은 모든 정보와 세상을 바라보는 제대로 된 시각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을 것이고, 나로 말하자면 번역/통역 일 이외에 다른 일을 하더라도 그 일에서 얻게 된 지식이나 눈꼽만큼의 통찰도 스스럼없이 나눌 재기를 갖지 못했으니, 아, 읽으면 읽을수록 자괴감에 빠져드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양가도 있고 맛도 있는 달콤한 케잌을 야금야금 베어 먹으면 포만감과 행복감에 빠져들 듯이, 이런 책을 자괴감 때문에 외면한다는 것은 참으로 바보스러운 짓. 내가 같은 직종에서 일했던 당시에 말하고자 했던 수많은 말들이 어두운 심연에 가라앉아 있다가 뽀글뽀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은 문장들을 꼼꼼이 읽어나가는 즐거움은 전작에 비해 유달리 그 속도가 경쾌하고 빨랐다는 것을 말해두고싶다. 

그나저나, 마리 여사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마법사 집회에서 받았다는 '악마와 마녀의 사전'이라는 책은, 나도 어디서 얻을 수만 있다면 꼭 한번 읽어보고싶네, 이런 식이라니, 마법사들 너무 귀여운 것 아닙니까. 후후.

사랑: 공짜 이익을 얻기 위해 상대에게 거는 주문의 일종. 이 주문에 걸린 사람은 대가 이상의 것을 받았다거나 상대의 덕을 봤다고 생각한다. 주문을 외는 사람이 착각하여 자신이 손해 봤다고 여길 때도 많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등 일부러 토를 다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본래는 대가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희망: 절망을 맛보기 위한 필수품. 

배려: 약자에게는 보이지 않고 강자에게만 보이는 공손함의 표시. 

겸손: 자랑하고 싶은 것을 남이 대신 말하게 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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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2009-11-16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살까 다른 책을 살까 고민하다 결국 다른 책을 사고야 말았네요. 구입한거라면 나중에 대어 가능할까요? 한번은 읽고 싶지만 구입하고 싶은 간절함은 없네요.. (이상한가요?)

치니 2009-11-17 13:28   좋아요 0 | URL
번역 및 통역 일을 많이 한 토니님은 공감이 많이 될 내용이에요. 제가 갖고 있는 책 보낼게요, ^-^ 주소 알려주세요 ~

토니 2010-01-03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정연휴 집에 다녀오는 길에 열심히 읽었습니다. 읽는 동안 혼자 피식피식, 키득키득 웃다가 또 어느 부분에선 '그렇지' 하며 무릎을 치기도 하고. 제가 지금까지 통번역을 했다고 하더라고 이런 글을 결코 쓰지 못했을 겁니다. 아니 앞으로 백년은 더 일한다고 해도.. 사실 과거 통번역을 했을 때 늘 제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했거든요. 어쩌면 그래서 그만 뒀는지도 모르겠어요. :) 좋은 책 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치니 2010-01-04 09:44   좋아요 0 | URL
저 역시 그래요, ㅋㅋ 한 때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이런 글을 쓰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 그래서 마리 여사가 대단해 보여요. 새해 복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