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사 膳友辭 

_함주시초 4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 

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 

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 나조반: 나좃쟁반. 갈대를 한 자쯤 잘라 묶어 기름을 붓고 붉은 종이로 둘러싸서 초처럼 불을 켜는 나좃대를 받치는 쟁반 

*소리개소리: 솔개소리. 솔개는 무서운 매의 일종임. 

*세괏은: 매우 기세고 억세고 날카로운. 

 

 

 

 

 

 

 

 

최근 위 백석의 시를 한 달 여 강의를 들었던 <동무론>과 연계하여 다시 들었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는 백석의 당당함은 예의 동무론에서 김영민 선생이 '욕심없는 의욕'을 설파하는데 쓰였다. 공부란, 하면 할 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지는 것임을, 구절구절 어려움에 통탄의 한숨을 쉬며 책을 읽다가 강의까지 들어도 어려워서, 겨우 깨닫는 나는, 앞으로 가난해도 서럽지 않게, 외로워할 까닭 없게, 누구 하나 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그깟 한 달의 강의로도, 한 권의 책을 읽는 행위로도 쉬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임을 또한 여실히 깨우쳤는데,

고작 이 정도의 깨달음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는 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시 한 편이 갖는 아름다운 위력에 대해서 멍 하니 놀라기도 하고, 그러니 나 따위, 무엇을 읽어도 함부로 까불어대지 말자는 자성이 들기는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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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2009-11-14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이 차요, 치니님

치니 2009-11-14 22:02   좋아요 0 | URL
춰요, 감기 조심, 니나님. :)

파고세운닥나무 2009-12-22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지하가 말하는 '흰 그늘'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백석은 오래 묵혀 읽을수록 좋은 시인인 것 같아요.

<사슴>의 발랄함도 처음엔 마뜩찮았는데,후기시와 균형감을 이룬다는 생각도 하구요.

개인적으로 제가 용렬하다고 느꼈던 적이 있어요.

전 김영민 선생님이 교수직을 버린 게 멋지구나 했는데,숙대에서 다시 교수 하신다니까 왠지 그렇더라구요.

좋은 글 고맙게 보고 갑니다.

치니 2009-12-23 12:13   좋아요 0 | URL
김지하의 흰 그늘은 잘 모르지만, 백석이 오래 묵혀 읽을수록 좋다는 말씀에 공감해요. 아마 백석 뿐 아니라 좋은 시인들의 글은 거의 그렇겠지요, 그것이 또한 시가 가진 최대의 매력인 듯. 언제 어떻게 또 누구에 의해 읽혀지냐에 따라 늘 달라져요.

제가 알기로는 김영민 선생의 숙대 교수직도 이번 학기를 끝으로 마감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아마 짐작하는 그 이유로 그만두시는 것 같습니다. :)

첫 댓글 반갑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09-12-23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지하의 자서전이 <흰 그늘의 길>이에요.

김영민 선생님 교수직 관련한 일은 '치니'님으로부터 처음 듣네요.

전에 쓰시마 유코 소설에 관해서 댓글 단 적 있는데요^^

공감이 가는 댓글 고맙습니다.

치니 2009-12-23 23:17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김지하씨 <흰 그늘의 길>도 한번 읽어보고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