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계절 - Another Yea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마침 이런 글을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면 결국 부러움이란 게 무엇이겠는가? 일단 아우구스티누스가 묘사했던, 자기 어머니의 젖을 빠는 동생을 부러워하는 아기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여기서 주체가 부러워하는 것은 타자가 소중한 대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타자가 대상을 즐길 수 있는 방식이다. 따라서 그 대상을 훔쳐서 제 소유로 삼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가 가진 진정한 목적은 타자가 대상을 즐기는 능력/역량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러움이라는 감정은 부러움, 검약, 우울이라는 삼항 관계 속에 배치될 필요가 있다. 이 세 가지 형태의 감정은 대상을 직접 향유할 수 없는 상태에 있지만, 바로 그 불가능한 상태가 비친 거울상을 향유하는 상태에 있기도 하다. 부러움의 감정을 가진 주체는 타자가 소유하고 있고/있거나 타자가 주이상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부러워하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구두쇠는 대상을 소유하긴 하지만, 그것을 향유/소비할 줄 모른다. 구두쇠는 단지 대상을 소유하는 데에서,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소비되어서는 안 될 신성한 실체, 손댈 수 없는/금지된 실체로 격상시키는 데에서 만족을 느낀다. 지금까지 우리가 봐왔던 고독한 구두쇠의 전형적인 모습은 집에 돌아와 조심스레 문을 다 걸어 잠그고 궤짝을 열어 제 소중한 대상을 몰래 훔쳐보며 경탄하는 장면이다. 그가 대상을 소비하지 못하도록 막는 사실 덕분에 그 대상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지위가 보장된다. 한편 우울한 주체의 경우는 구두쇠처럼 대상을 소유하긴 하지만, 왜 그것을 욕망하게 됐는지, 그 이유를 잃어버린다. 따라서 우울한 주체는 셋 가운데 가장 비극적이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지만, 거기서 어떤 만족도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 <폭력이란 무엇인가> (슬라보예 지젝 저) 중에서. 

나는 자꾸만 영화 속 톰과 제리보다 매리에게 온통 신경이 쏠렸다. 눈빛 하나로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가히 전 지구에서 가장 평화로운 일상을 연출하고 있는 톰과 제리는 부부, 제리의 직장 동료인 20년 지기 친구인 매리는 그들 부부에 대한 부러움 속에 영화의 마지막까지 '우울한' 주체라는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이 담담한 영화가 왠지 으슬으슬한 미스테리 영화처럼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지젝은 책에서 저런 이유로 폭력이 발생한다고 진단한다. 즉, 누군가의 욕망을 제거하고 자신이 이겨야 끝나는 제로섬 법칙 때문에 폭력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란다. 가령, '너에게 하나를 주고 남이 두 개를 가져도 좋으냐 아니면 너에게 하나를 빼앗고 남에게 두 개를 빼앗는 것이 좋으냐' 라고 물으면 사람이란 후자를 택한단다. 내가 이기느니 차라리 남이 지는 것이 나은, 평등을 희구하는, 원천적 부러움이라는 감정 때문에 사람들은 아무 이유없이 테러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뉴올리언즈의 흑인들은 백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 때문에 폭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소유한 것을 자신들과 똑같이 소유하지 않아야만 하기에, 종교로 인한 폭동 역시 다른 종교가 향유하는 것을 자신들과 똑같이 향유하지 못하게 해야 하기에.......이런 식으로 말이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매리는 지젝 식 논리의 틀 안에 끼워맞추기 좋은 인물이다. 그녀는 제리를 참 좋아하고 제리의 집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Peaceful 하다며 경탄하지만, 톰 제리 부부의 아들이 여자친구를 얻자 스스로도 이해불가한 질투의 화신이 되어 모든 관계를 망쳐버리고 부부에게 위기의식과 실망감을 남겨주고 마는 - 평화를 깰 위험이 있는 폭력의 주체가 된다.  

하지만, 시선을 거꾸로 뒤집으면, 그러니까 매리의 시각에서 보자면, 톰 제리 부부는 그 자신들만의 안온한 생활 속에서 폭력을 전혀 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혹은 그들이 폭력을 유발한 건 아닐까. 철저한 이기주의 - 자기애가 이기주의의 동의어라 친다면 - 로 매리가 조금이라도 성역을 침범하면 '네가 이해해야 해, 여기는 우리 가정이야, 우리는 가정을 지켜야 하고' (극 중 제리의 말이다) 라면서 넌지시 밀어내는 일을 반복적으로 했던 것을 폭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하아 - 아무래도 영화를 너무나 내 시각에만 좁게 가두고 본 모양이다. 실은 이런 이야기가 아닌데. 그저 제목처럼 '인생의 모든 계절'을 살아가는 우리네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린 것일 뿐일 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뭐, 영화란, 아니 모든 예술작품이란, 관객의 반응이 아무리 제멋대로여도 불평할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났으니 어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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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8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8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1-03-18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톰과 제리여? 왜 저는 만회가 퍼뜩 떠오르는지~ 지젝의 책의 텍스트가 마이클리의 세상의 모든 계절의 이미지속으로 빨려들러갔군요~ ㅎㅎ

치니 2011-03-19 13:01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 유명한 만화 속 톰과 제리를 영화에서도 언급해요. 그 앙숙 커플이 실제로는 잉꼬라면서. ㅎㅎ
요새 이것저것 짬뽕으로 읽고 보니, 막 섞이나봐요. ㅎ

프레이야 2011-03-25 0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굿모닝^^
이런 영화가 있군요.
어디서 보셨어요? 아주 보고 싶어지는 영화에요.
제목부터 시적인 게 끌려요.

치니 2011-03-25 13:4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 님, 굿 애프터눈 ~ :)

저는 아트선재 시네마에서 봤는데, 그 당시엔 개봉 직전 시사회였고요,
아마 어제부터가 본격 개봉일인 걸로 알고 있어요.
프레이야 님 계신 데도 아마 찾아보면 하는 데 있을 거에요. 감독이 마이크 리, 나름 유명한지라 챙겨 보는 분들 있더라고요.
영화 보시면 제 리뷰가 얼마나 억측인지 알게 되실 겁니다. ㅋ

2011-04-11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2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친구와 마주한 자리에서, 어릴 적 한 때는 작가가 되고자 했던 친구의 꿈을 되살리며 만일 정말 작가가 되었더라면 그 숨 막히는 '마감 증후군'을 어떻게 견뎠을까 - 자조 섞인 웃음으로 작가로 살지 않는 생에 감사하는 동시에 잠시나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어깨를 잔뜩 움추리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작가라고 뭉뚱그렸지만, 우리가 호명한 작가는 자기계발서나 어떤 학문의 사상을 간추리는 책을 쓰는 사람을 뜻한 것이 아니라 시와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창조하는 사람'을 무의식 중에 떠올리게 된 글 짓는 이라는 의미가 더 크겠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 어떤 시가 어떤 소설이 이러니 저러니 말로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참 쉽다.
문자 그대로 피 눈물을 짜내어 문단에 등단할 만한 작품을 인정 받고나서도 이후에 의뢰 받아 쓰는 작품이 최초 작품에서 비춘 소위 '가능성'을 뒷받침하지 못할까봐 두려운 마음을 눌러가면서 대중을 떠나 자기 자신에게 납득이 갈 만큼의 완성도를 내야 하고, 그 누구도 쓰지 않은 무엇을 쓰고 싶다는 열망과 좌절 사이에서 오가는 오만가지 심정을 평생 다스리며 오로지 계속 쓰는 것 외에 대안이 없는 삶을 사는 그들, 작가들에 비하면.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로로 (짐작에 불과한) 그 괴로움과 환희를 살짝 엿보았을 뿐이다.
엿본 자의 죄가 있다면 그 대가로, 이런 책을 읽을 때의 내 마음은 한없이 두근거리고 때로는 아프다.
















읽기 전에 두근거렸던 마음은, 이제 알 수 없는 외로움으로 물들어 간다.
내용을 차치하고, 그저 이 문장 하나 하나, 수없이 쳐내고 다듬고 넣다 뺐다를 반복한 어휘들을 예전처럼 휙휙 - 쉽사리 지나치면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알려주는가', 그도 아니면 '문체가 아름다운가 아닌가' 따위를 생각할 수 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다듬기를 반복하여 갖추게 된 가독성이 담보로 깔리지 않았다면 내 어두운 눈은 결국 여전히 문장을 천천히 음미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비'라는 주제를 두고, 마감을 온 세포로 느끼면서, 그 와중에도 일상을 영위하면서, 그 누구도 아닌 '쓰고자 하는' 자신이 만들어 낸 형벌 아닌 형벌 앞에서 와들와들 떨어가며,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순간들이 오기 전까지의 '고독' - 그 무시무시한 시간을 상상하면서 읽자니 많이 시리더라. 그래서 감히 나까지 덩달아 외로워져 버린 것이다.

7개나 되는 작품이 모였다면, 그 중 한 둘은 어떻게든 상대적인 비교 끝에 지렛대 아래로 끌어내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없지는 않았다. 아주 야멸차게 말하자면, 출판사에서 유명 작가들의 각개 전투를 기다리기 보다는 짧은 단편으로 모음집을 만들어 기획하면 더 빠른 시간 내에 결과물을 만들고 더 많은 독자층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지도 모르기에, 한 둘이 그렇게 끌어내려지면 책의 가치는 은연 중에 훼손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않나 싶어서.
노파심이었다. 종합선물세트라고 해도, 내용물이 알차면 원래 종합선물세트에 심드렁하던 사람도 다시 보기 마련. 잘됐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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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3-1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뭐좀 물어볼께여 이 소설집에 "김숨 | 김미월 | 한유주 | 윤이형 | 황정은 | 장은진 | 김이설" 이렇게 작가가 있는데 김숨어떤가여? 편혜영이랑 동급으로 취급하던데여~ 편혜영의 신간 저녁의 구애를 읽고 나서 "아 좋다" 그러고 그 기분살려서 김숨으로 넘어가고 싶긴한데 아직 전혀 읽어보지를 않아서여:D 윤이형, 장유주도 알고 싶은데 ㅋㅋ

저의 게시판의 댓글 남기신거 정말 감사합니다,,
친히 왕래까지 하셔서 몸둘바를 모르겠네여~
제가 누누히 (건방지게 표현하자면) 말하고 싶은게 영화많이 보는것도 중요하지만 사람과의 대화가 저한테 더 소중한거 같아여(제가 선택한 영화를 안보면 어때요ㅎㅎ) 그대신 저번에 오버스럽게 영화광친구들이랑 술먹다가 이세상에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본 사람과 안본 사람으로 나눌수 있어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 했는데 동의하더라구여ㅋㅋㅋㅋㅋㅋ
저 그영화되게 좋아해요~

아파트공화국의 감상은 치니님이 남기신 40평 그대로예여 저의 느낌도, 단지 프랑스인도 되게 치밀하다라는 정도여~


치니 2011-03-16 18:49   좋아요 0 | URL
저도 김숨 씨 작품은 다른 건 못 읽어보고 이 책에 소개된 <대기자들>이 처음이에요. 화려하거나 기승전결이 뚜렷한 작품은 아니지만 묘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고요, 편혜영 씨 작품을 안 읽어봐서 ^-^;; 상대적으로 어떤지는 모르겠어요.

영화를 보고 나누는 대화는 요샛말로 깨알 같은 재미가 있죠. :) 저 같이 잘 까먹는 사람은 한참 지난 영화에 대한 대화는 좀 어려움이 있지만서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봤어요. 저더러 누가 마츠코 같다고 하면서 권한 영화라 조금쯤 부담스러운 시각으로 봤는데, 영화 자체는 저도 마음에 들었어요. 다만 제가 마츠코 같다고 한 그 분에게는 억울한 심경이 오래 갔죠. -_-;

네오 2011-03-17 10:13   좋아요 0 | URL
어~ 저번에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셨다고 해서 언급한건데ㅠㅠ
아니 그런데 치니님이 어떤면이 마츠코를 닮아있길래 궁금궁금^^;

치니 2011-03-17 11:36   좋아요 0 | URL
글쎄요, 저도 그걸 모르겠더라고요. 물론 그 여배우의 생김새를 말하는 건 아니겠고, 그 영화 속 마츠코처럼 평생 허영에 눈이 가려 멍청한 남자라도 덥석, 뭐 이런 걸 두고 닮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좀 꺼림직했어요.

네오 2011-03-18 23:53   좋아요 0 | URL
이 "비"의 인기스러움은 뭐져? 교보에서 그 실체를 확인하니 반갑더라구요~
조금 읽어보고 사지는 않았어여 대신에 <저녁의 구애>는 다 읽어답니다~
자랑질 ^^v

"마츠코처럼 평생 허영에 눈이 가려 멍청한 남자라도 덥석" 이라고 쓴걸보고~ 치니님은 이렇게 해석하셨나봐여? 전 마츠코가 진심으로 그 남자들을(남자들이 그녀가 싫다고 헤어지기 전까지는) 다 사랑한것으로 봤는데~ 아~ 멍청한 남자들은 맞죠~ 그녀가 허영에 멀었다,,,,생각해볼 대목이네여~


치니 2011-03-19 13:04   좋아요 0 | URL
<저녁의 구애>는 저도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네오 님이 이렇게 자랑하시니. :)

음, 마츠코는, 그넘의 '너랑 닮았어'라는 말을 머릿 속에 가득 담은 채로 봤으니 저에게만 유독 허영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사랑이, 때로는, 그 순간엔 사랑이지만 지나고나면 제 마음을 소비하기 위한 허영이기도 하더라고요. ^-^;;

따라쟁이 2011-03-16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고 있어요. 음.. 치니님 처럼 멋진 글을 쓸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리뷰를 써야할것 같은 기분이 드는 책이에요. 치니님 말씀처럼. 그녀들의 애씀이 보여서. 뭔가 답글을 써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건방진> 기분이 드네요^^

치니 2011-03-16 18:50   좋아요 0 | URL
아, 읽고 계시군요. 알라딘의 많은 분들이 읽고 계신 듯해서 괜시리 제 마음이 든든(?)합니다. :)
건방지다뇨 ~ 이렇게 댓글 남겨주시면 감사할 따름인 걸요. :)

차좋아 2011-03-16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볼래요^^' 저도 그런 걱정을 했는데 치니님이 걱정 마, 했으니 읽을래요 하하
(노파심말이에요^^&)

치니 2011-03-16 18:52   좋아요 0 | URL
차좋아 님 지금 책 리스트도 많고 커피 로스팅도 해야 하고 사진도 찍어야 하고 책 모임도 나가야 하고 - 헉헉, 너무 많은 일을 동시에 하는 거 아닌가, 괜한 걱정이 들어요. ㅋㅋ 하지만 이 책은 읽어보시면 어쩌면 많은 일들을 하는 중에 쉼표 같은 책이 될 지도 몰라요. 그러니 걱정 마시고. :)

stillyours 2011-03-1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아침 하나씩 읽고 있는데,
그 사이에 비 오는 날이 하루쯤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중.

치니 2011-03-18 18:54   좋아요 0 | URL
아, 매일 아침 하나씩 - 이 방법이라면 각 작품을 곱씹을 시간이 더 확보된다는 점에서 좋은 듯. 저도 그럴 걸 그랬어요!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블랙 장르의 재발견 1
오스카 와일드 지음, 서민아 옮김 / 예담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예술이 진정으로 반영하는 것은 관객이지 삶이 아니다. ......쓸모없는 것을 만드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에 열렬히 감탄하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전혀 쓸모없다.
 
   
   
  생각하면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천재성이 아름다움보다 오래 지속된다는 건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거든. 우리 모두가 교육을 받기 위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몹시도 애를 쓴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존재를 향한 거친 투쟁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갖고 싶어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어리석은 희망 속에서 쓰레기와 사실들을 정신에 가득 채워넣는거지. 지식으로 완벽하게 똘똘 뭉친 사람 -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이상이야. 한데 지식으로 완벽하게 똘똘 뭉친 사람의 정신은 얼마나 끔찍하겠나. 그건 마치 온갖 잡동사니와 먼지로 가득 찬 데다, 모든 물건에 적정한 가치 이상의 가격이 매겨진 골동품 상점과 같아.  
   

위대한 작가일수록, 단 한 줄의 문장, 단 한 권의 책으로 독자에게 수많은, 끊이지 않는, 답이 없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선 저 위 두 가지 인용문을 보라. 어떤 생각이 드는가.

첫 번째는 7페이지, 서문에서부터 나오는 문장, 두 번째 역시 27페이지 초반부터 나오는 문장이다. 서문은 오스카 와일드 자신의 말이고, 초반에 나오는 저 대사는 냉소적인 지식인으로 분한 책 속의 헨리 경이 읊은 말이다.
초반에 나는, 당연히 헨리 경의 저 대사에 저자인 와일드의 주장이 녹아 있으려니 믿고 다음을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헷갈리기 시작했다.
헨리 경의 경구 식 대사는 가끔 치명적인 오독을 불러 일으키고자 일부러 써버린 듯한, 그러니까 반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강하게 질문을 제시하는 느낌을 주었으며, 헨리 경에게 줄곧 반론을 펼치는 인물인 도덕적인 지식인 바질 경의 대사를 읽고 있자니, 냉소하는 헨리와 훈계하는 바질 중 어느 쪽이 오스카 와일드의 본심인지 구분이 되지 않기 시작했다.
옮긴이의 해석을 보면 이 책이 나오던 19세기 당시 와일드는 탐미주의 혹은 유미주의라고 불리는 기조의 선두에 섰던 인물이고, 그의 예술에 대한 주장은 지식이나 이성 보다는 아름다움과 감각 쪽으로 완전히 편향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나는 줄곧 헷갈렸다.
어쩌면 작가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도발하는, 바로 그 질문들 자체가 내게는 버거운 것들이라 혼돈스러운 상태에서 - 그러니까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로 - 읽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반면 이 모든 혼돈 속에 아름다움의 상징으로써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도리언 그레이' 경은, 내게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악의 상징, 보들레르 식으로 말하자면 악의 꽃 같았다.
와일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 본성이 결국 악이라는 - 그리고 이 악은 이성 따위로는 애초부터 통제되지 않으며 오로지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때만 우리들을 해 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아니면 도리언 그레이 같은 천부적인 미를 소유한 사람은 그 자체가 아름다움의 극치이므로 변치않는 아름다움이라는 목표를 충족하고자 인간으로써의 삶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고통받고 자멸하니, 결국 인간이란 예술 - 그 쓸모없는 감각적 쾌락의 끝에 있는 무언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마는 바보같은 존재이고 예술가 역시 이를 조장하는 무리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혼돈은 계속된다. 진정한 아름다움이 뭔지도 이젠 더이상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제 만난 십대 소녀가 이 책을 읽고 싶어했을 때 내가 말렸다는 것. 그러니까 이 책을 어린 영혼이 읽으면 안될 것 같은 두려움이 내 안에 생겼다는 것.
좀 더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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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1-03-14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년용으로 어린시절 이 책을 읽었던 분의 말에 의하면, 청소년용은 이렇대요.

"나쁜짓을 했더니 초상화가 늙었어요" --> 착하게 살자, 뭐 이렇게 결론 내게 하는? ㅋ
오스카와일드가 땅을치겠죠? ㅋㅋㅋㅋㅋ

치니 2011-03-14 22:32   좋아요 0 | URL
앗, 청소년용이 따로 나왔군요? ㅎㅎ 고전이라는 범위 안에서 그런 기획이 있었나부네요.
어떤 식으로 가지를 쳤는지 급 궁금해집니다. 전체 내용의 호러성은 둘째 치고, 와일드가 쓴 어떤 문장들은, 실제로 이 작가가 사악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자주 품게 만들던데, 흠흠.

굿바이 2011-03-1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훠! 인용문에 두들겨 맞는 기분이네요.
실은 제가, 작가는 전혀 모르겠지만, 오스카 와일드를 살살~ 피해다녔거든요. 뭐랄까, 정답은 아니어도 뭔가 발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될 것 만 같은, 노파같은 그런 심정으로다가 --;
그나저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뭣일까요...참말로....

치니 2011-03-15 13:54   좋아요 0 | URL
ㅎㅎㅎ 피해다녔다는 그 말씀, 노파같은 심정, 완전 이해가요. 그런 게 있어요, 이 양반. 쫌 무섭슴다.
하지만 천재는 천재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 같은 범인은 천재가 하는 양만 봐도 재미나기 땜시 읽었습니다만, 굿바이 님은 영 안 내키면 안 읽으셔도 무방할 듯. 뭐허러 피하던 걸 굳이. ㅎㅎ

네오 2011-03-15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박이 곧 예술인가" 의 질문의 답이 "진정한 아름다움이 뭔지도 이젠 더이상 모르겠다"라고 정의를 내리신 건가요? :D, 제가 난독증이 걸려서 그런지 글의 정리가 안되네요~ 이번의 태그도 생략하시고~ 이번의 예담에서 새롭게 출판을 했나보져? 전 펭귄클래식판본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리고 혹시 "사랑해 파리"라는 옴니버스 영화보셨나여? 에피소드중의 오스카와일드가 소재인 영화가 있져, 그의 무덤이 파리에 있다는것을 그때 처음 알았어여~ 그리고 그 여주인공 완전 오스카 와일드 팬이던데, 그거때문에 남자가 괴로워하는것을 보고 참나~(여자는 아주 멋지게 오스카 와일드식으로 프로포즈를 원하는데 남자는 그런방식을 싫어허죠) 오스카 와일드같은 감수성을 보통 남자들이 지니기 힘들져 ㅎㅎ 잘 보고 갑니다

치니 2011-03-15 18:40   좋아요 0 | URL
네오 님은 정말 모르는 게 없으셔요! ^-^
그렇습니다, 글이 정리가 안 되더라고요. ㅋㅋ 난독증 때문이 아니라 제 글이 문제입니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토록 유명한 책이었는지도 몰랐어요. 예담이 출판을 했다는 것도, 네오 님이 말씀하셔서 다시 봤고. 아무튼 번역은 꽤 성실한 편이어서 만족스러웠어요.
"사랑해 파리"를 열광하면서 봤죠. 제게는 나름 추억이 서린 도시라;; 그런데 이런, 오스카와일드가 소재인 영화는 아주 어렴풋하게 기억나네요. 그게 와일드였다는 건 까맣게 잊었고 그의 무덤에 찾아가는 장면은 기억을 애써 되살리니 조금씩 조금씩...에고, 이러니 뭘 보고 읽어봐야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차좋아 2011-03-16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도 읽을래요. ㅋㅋㅋㅋㅋ 모임 책이었는데 읽지도 않고 모임도 안 나갔어요. '에잇 안 읽을테다!'(뭐 잘했다고 에잇이냐!) 마음 먹은게 엊그제 같은데 치니님 리뷰를 보니 궁금해서 읽어야겠어요.

치니 2011-03-16 18:44   좋아요 0 | URL
모임 책이었는데 안 읽고 나가는 거 - ㅋㅋ 기시감이 듭니다. 예전에 저도 자주 그랬던 기억이;;; ㅋㅋ
시간이 되신다면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차좋아 님이 어떻게 느끼실까 궁금하거든요. :)
 
여명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어떻게든 객관적으로 읽어보려던 내가 바보스러워졌다. 콜레트에 대한 기분좋은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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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3-15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 가니 문학동네의 신간이 우수수 쏟아져 있더라구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참 맘에 들져?

치니 2011-03-15 18:41   좋아요 0 | URL
^-^;; 역시, 문학동네 전집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읽었습니다. 저의 허술함을 매번 들키네요.

stillyours 2011-03-18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읽기 전에 한수철 님과 같은 생각했는데!
읽다 보니 1에서 2로 갔던 것 같아요.

치니 2011-03-18 18:55   좋아요 0 | URL
그져그져, ^-^ 읽다 보니 2로 가는 거 같더라고요. moon 님 덕분에 몰랐던 콜레트의 세계를 만났어요. 놀라운 세계. :)
 
곰스크로 가는 기차 (양장)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런, 나에게는 원래 곰스크가 없었다,기뻐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쯔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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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3-11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치니님, 저에게도 곰스크는 없는 것 같아요.

치니 2011-03-12 14:31   좋아요 0 | URL
아앗, 그래요? 나만 없는 줄 알고 약간 침울해졌었는데. 히히, 왠지 위로가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