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친구와 마주한 자리에서, 어릴 적 한 때는 작가가 되고자 했던 친구의 꿈을 되살리며 만일 정말 작가가 되었더라면 그 숨 막히는 '마감 증후군'을 어떻게 견뎠을까 - 자조 섞인 웃음으로 작가로 살지 않는 생에 감사하는 동시에 잠시나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어깨를 잔뜩 움추리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작가라고 뭉뚱그렸지만, 우리가 호명한 작가는 자기계발서나 어떤 학문의 사상을 간추리는 책을 쓰는 사람을 뜻한 것이 아니라 시와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창조하는 사람'을 무의식 중에 떠올리게 된 글 짓는 이라는 의미가 더 크겠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 어떤 시가 어떤 소설이 이러니 저러니 말로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참 쉽다.
문자 그대로 피 눈물을 짜내어 문단에 등단할 만한 작품을 인정 받고나서도 이후에 의뢰 받아 쓰는 작품이 최초 작품에서 비춘 소위 '가능성'을 뒷받침하지 못할까봐 두려운 마음을 눌러가면서 대중을 떠나 자기 자신에게 납득이 갈 만큼의 완성도를 내야 하고, 그 누구도 쓰지 않은 무엇을 쓰고 싶다는 열망과 좌절 사이에서 오가는 오만가지 심정을 평생 다스리며 오로지 계속 쓰는 것 외에 대안이 없는 삶을 사는 그들, 작가들에 비하면.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로로 (짐작에 불과한) 그 괴로움과 환희를 살짝 엿보았을 뿐이다.
엿본 자의 죄가 있다면 그 대가로, 이런 책을 읽을 때의 내 마음은 한없이 두근거리고 때로는 아프다.
읽기 전에 두근거렸던 마음은, 이제 알 수 없는 외로움으로 물들어 간다.
내용을 차치하고, 그저 이 문장 하나 하나, 수없이 쳐내고 다듬고 넣다 뺐다를 반복한 어휘들을 예전처럼 휙휙 - 쉽사리 지나치면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알려주는가', 그도 아니면 '문체가 아름다운가 아닌가' 따위를 생각할 수 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다듬기를 반복하여 갖추게 된 가독성이 담보로 깔리지 않았다면 내 어두운 눈은 결국 여전히 문장을 천천히 음미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비'라는 주제를 두고, 마감을 온 세포로 느끼면서, 그 와중에도 일상을 영위하면서, 그 누구도 아닌 '쓰고자 하는' 자신이 만들어 낸 형벌 아닌 형벌 앞에서 와들와들 떨어가며,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순간들이 오기 전까지의 '고독' - 그 무시무시한 시간을 상상하면서 읽자니 많이 시리더라. 그래서 감히 나까지 덩달아 외로워져 버린 것이다.
7개나 되는 작품이 모였다면, 그 중 한 둘은 어떻게든 상대적인 비교 끝에 지렛대 아래로 끌어내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없지는 않았다. 아주 야멸차게 말하자면, 출판사에서 유명 작가들의 각개 전투를 기다리기 보다는 짧은 단편으로 모음집을 만들어 기획하면 더 빠른 시간 내에 결과물을 만들고 더 많은 독자층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지도 모르기에, 한 둘이 그렇게 끌어내려지면 책의 가치는 은연 중에 훼손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않나 싶어서.
노파심이었다. 종합선물세트라고 해도, 내용물이 알차면 원래 종합선물세트에 심드렁하던 사람도 다시 보기 마련. 잘됐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