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론 / (3) 변덕이냐 변화냐
영리한 인간은 그 근본에서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내가 조형해온 ‘현명한 인간’이란 이미,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공부의 결실을 맺고 있는 사람이다. 사과나무는 ‘돌이킬 수 없이’, 그리고 충실히 사과를 맺으며 그 시절인연을 소중히 하는 법이고, 가령 일단 소크라테스를 만난 사람은 ‘돌이킬 수 없이’ 그의 자장(磁場)에 휩쓸려 들 수밖에 없다. 나는 20대의 어느 순간 키르케고르를 ‘만나’※나는 그를 ‘읽지’ 않았다!※기성의 제도 기독교로부터 섭동(攝動)했는데, 아, 실로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공부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다. 이에 비하면 영리한 것은 ‘변화’가 아니거나 혹은 기껏 ‘변덕’이다. 아, 우리의 세속은 바잡거나 반지빠른 변덕의 세상이다! 물론 변덕은 몸이 아니라 생각이 주체일 경우에 가능한 삶의 태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가 변화의 비용이고 그것이 결국은 몸의 주체적 응답의 방식일 수밖에 없다면, 공부란 삶의 양식을 통한 충실성 속에 응결한 슬기와 근기일 수밖에 없다.


영리한 인간들은 학같이 긴 다리로 물가를 노닐면서 솜씨있게, 날름날름 물고기들을 쪼아먹는다. 학은 자신의 깃을 물에 적시지 않는다. 칸트를 비판하는 헤겔의 유명한 말을 임의로 차용하자면, 물에 들어가지 않고도 영법(泳法)을 배우는 사람은 참으로 영리한 인간인 셈이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세속인 자본제적 삶의 형식은 이처럼 영리한 인간들을 체계적으로 재생산한다. ‘대학(大學)’이라는 자못 무서운 이름을 붙인 곳마저 그 영리한 인간들이 자신의 영토로 점유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두커니 서거나 이드거니 걸으면서 현명한 인간, 혹은 공부하(려)는 인간은 물속에 몸을 잠근다. 그리고 너무 오래, 너무 깊이 잠근 탓으로 혹간 몸에는 지느러미가 돋고 아가미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생활로부터 ‘돌이킬 수 없이’ 단절하며, 마침내 ‘변덕’이 범접할 수 없는 지경으로 ‘변화’하고 마는 것이다.

“몸을 물에 담그지 않고 수영을 배우는, 즉 생각으로써 배우는 사람은 영리한 변덕쟁이일 뿐이다. 이들은 공부와 만나지 않고 다만 구경할 뿐이다. 반면 물에 들어가 몸으로써 배우는 현명한 사람은 그 공부에 사로잡혀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는다. 영리한 변덕이 판치는 시대를 돌아보며 ‘어떤 공부’의 죽음을 애도한다.”

영리한 인간들은 공부조차 상품으로 대하며, 값없이 냉소하는 가운데 그 필요한 부분을 발밭게 뽑아 먹는다. 그래서 공부를 ‘퀴즈화’시켜 벼락치기를 일삼는다. 임금의 호의도 무시한 채 스스로 과거시험을 피해 다니곤 했던 연암도 학술-문장-과거로 서열을 매긴 바 있고, 다산도 과거제의 폐해가 없는 일본을 한편 부러워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과거를 아예 공부로 치지도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의 안팎을 막론하고 온통 현대판 과거시험들로 북새통이다. 이 수험생들은 자신의 몸으로써 공부와 만나지 않는다. 자신의 생활양식으로써 공부를 뚫어내지 않는 것이다. 아니, ‘만날 때라야 배운다(It is when we meet someone that we learn something)’(서양 속담)지만, 이들에게는 ‘만남’ 그 자체가 송두리째 빠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디우(A. Badiou)의 말처럼, 만남이 아니기에 아무런 ‘사건’일 수도 없는 것! 이들은 선생도 만나지 않고 구경하며, 책도 만나지 않고 절취(截取)할 뿐이다.

공부가 나를 지배하지 않고 내가 공부를 지배하려 할 때 변덕은 변덕스럽게 기승을 부린다. (내 용어로 풀면, 앞의 것은 ‘하아얀 의욕’이고 뒷놈은 ‘박잡한 욕심’일 뿐이다.) 물론 그 변덕이 상업주의적 차이의 문화와 결탁하고 ‘결코 물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 상품의 전략’(아도르노) 속으로 되먹임된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공부가 나를 지배하는 사건을 일러 변덕이 아닌 ‘변화’라고 부른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만난 사건, 엥겔스가 마르크스를 만난 사건, 조영래가 전태일을 만난 사건, 그리고 뉴턴이 사과를 만난 그 사건 속의 ‘돌이킬 수 없음’처럼, 그 만남 속에 개시된 공부의 물줄기는 돌이킬 수 없이 그 학생들을 휘어잡는다.
......(중략)

»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지금까지 공부 안하는걸 자랑으로 삼아왔는데, 이젠 어디 가서 함부로 그러지 말아야겠다. -_ㅠ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anicare 2007-09-04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어느 분이 쓰신 걸까요? 치니님의 글은 아닌 거 같은데.
영리조차도 못하면서 공부도 안하고 변덕스러운데다 게으른 인간은 어디 들어가야 하나..
음...그게 루저인가 싶기도 하구.

저 글 쓰신 분,제 생각엔 영리한 인간 아니었나 싶네요. 자기 호주머니를 까뒤집어 놓고 한심해하는 기색이 느껴지거든요.


치니 2007-09-04 16:46   좋아요 0 | URL
앗, 제가 저자의 이름을 적지 않았군요. ^-^;; 퍼온 글인데 이런 실수를.
저도 처음 보는 이름이었는데, 어디선가 글을 읽고 정신이 좀 퍼뜩 들더라구요. 얕은 지식으로 요령 피우는 자신이 싫을 때 읽으려고 퍼왔어요.
(영리하지도 못하고 공부도 안하고 게으른 인간, 흑 접니다. 변덕은 그다지 심하지 않은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저나 hanicare님 반가와요 ~

sudan 2007-09-04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어를 공부해볼까 아니면 영어학원을 끊을까 생각하던 차였는데, 에..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그 공부가 아닌거죠? ^^;;;

치니 2007-09-05 11:27   좋아요 0 | URL
수단님은 늘 공부하시잖아요.
교양 쌓으신다고 두문불출 하실 때도 있고...
어려운 책들도 읽으시고...
게다가 일어 혹은 영어?
여기서 말하는건 그 공부가 아닌거 같긴 하지만, 부단히 궁리하는 건 암튼 살아있음이죠 ~ ^-^

nada 2007-09-05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은 절대 안 먹고 수영 배우려는 사람--> 바로 접니다. 흑흑.
공부에도 그런 얕은 수를 쓰고 있는 거 같아요. 반성..

치니 2007-09-05 11:29   좋아요 0 | URL
꽃양배추님, 수영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요 밑에 네꼬님과 저는 그 수영하셨다는 집 근처 계곡이 궁금하답니다! ㅎㅎ
아마 대개 다 그런 수를 쓰고 살겠죠. 사실 그런 수가 없이 일일히 진지하게 대하다가는 이 복잡한 세상, 어뜨케 살아요...
 

누구에게도 마음을 그대로 열어 제치지 말기.
누구에게도 내 마음과 똑같기를 바라지 말기.
나를 전적으로 응원하는 사람은 바로 나.

2007 여름이 가고 있다.
어저께 해준 ‘커피프린스1호점’ 스페셜에서 김창완씨는 “커피프린스는 뭐냐?”라는 질문에 “2007년 여름이다”라는 대답을 명쾌하게 했더랬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스스로에게 거꾸로 “2007년 여름은 뭐냐?” 라는 질문을 문득 던져보게 되더라.
2007 여름은 다른 해의 여름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다.
여름이니 당연히 매 해 그랬듯이 더웠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더웠다는 것이 또 다르고,
여름이니 당연히 매 해 그랬듯이 더 지치곤 했지만, 이번에는 왠지 더 지쳐 했던 것 같고.
여름이니 당연히 가을을 몹시 기다리게 되지만, 이번에는 가을 이후 겨울까지 미리 기다리는 것 같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는가? 없었다.
달라진 게 있지만, 특별하다고까진 할만하지 않다.
아니 달라진 것은 그런 내 마음의 상태이다.
이제 웬만한 사건은 사건으로 다가오지 않고, 그저 살다보면 생겨나는 해프닝 쯤으로 여겨지는거다.
자 , 그럼 마지막 질문.
2007 여름 나는 조금이나마 성장했는가?
그렇다고 하고 싶다.
예전보다 덜 흔들리고, 덜 아파하고, 나 자신이 원하는 것에 더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니까.
그런데 … 덜 흔들리고, 덜 아파하고, 원하는 것을 얻고자 더 경주한다고 해서 성장하는 거 맞을까…미치도록 아파하면서 마구 흔들려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조금이나마 성장하는 거 아닐까…
결국, 성장하는게 어른이 되는거 라는 명제가, 아마 그게 못내 싫은가보다.
그래서 뜬금없이 맨 위에 적은 세가지를 또 마음에 새겨보는 중인가보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게다예요 2007-08-29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성장하는 거 철드는 거에 미련 갖지 않으려고요. 김창완님이 언제 이런 말을 했다네요. 철드는 것보다 철 안 드는 게 더 어렵다고. 너무 일찍 크고, 철들다 보니 지치고, 어렵고, 복잡하고, 포기하고 그러네요. 조금 덜 컸더라면, 조금 덜 철들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저는 많이 해요. 남은 여름 그저 잘 하려고만 하지말고 철딱서니 없이 좀 저지르고 살고 싶어요. ^^

치니 2007-08-29 16:57   좋아요 0 | URL
네 , 철 안 들고 사는 것도 정말 소질이 있어야 된다 싶어요.
소질 뿐 아니라 어쩌면 주변 환경까지 받쳐줘야 되고...
그렇다고 제가 그런 소질이 있거나 환경이 받쳐주는건 아니지만,
작년 재작년, 거슬러 올라가서 몇년 전...을 떠올리면 그땐 참 철이 없었네, 라는 생각은 종종 들어요.
다예요 님은 저지르고 사시길 ~ ^-^ 그러다가 재미난 일이라도 생기면 꼭 알려주시기.

mooni 2007-08-2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커피 프린스가 뭔가요? :) 하고 쓰고보니, 검색을 해보면 된다는, 생각을 해버린, 뭐든지 스스로 하는 새나라의 네티즌 마하연. 옷. 티비 드라마군요... 재밌나요? +_+

mooni 2007-08-29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지금 검색한 거 읽어보니, 보지는 않았지만, 얘기는 알아요. -_- 신문기사 DB화 하는게 최근 업무중 하나거든요. 스포츠지에 한동안 그야말로 날이면 날마다, 인물소개, 드라마소개가 나와서 지겹다고 투덜거리도 했던 초인기 드라마...왜 까먹은 건지...벌써 치맨가...OTL 철도요, 캐고생해서, 애써 들고도, 철든거 잊어버린거면 어쩌죠...ㅜ.ㅜ

치니 2007-08-30 09:13   좋아요 0 | URL
ㅋㅋㅋ 마하연님, 귀여워요.
커피프린스는, 저도 다 보진 못했지만, 스페셜 시간에는 김창완씨가 자근자근 나레이션 해주는 게 좋아서 열심 봤죠.
오버라는 생각이 드는 씬들도 꽤 눈에 띄고, 억지 설정도 눈에 띄었지만, 그래도 그 모든것을 커버할만한 나름의 힘과 미덕이 돋보이는 드라마였어요.
피디 아줌마의 웃음이 엄청 카리스마 있더군요. 후후.

nada 2007-08-30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디 아줌마(?) 참 귀여워보이시더라구요. 그리고 부드러운 카리스마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에겐 그런 카리스마가 많든 적든 묻어나는 거 같아요.
최근 집 근처에 호젓이 수영할 수 있는 계곡을 발견했는데, 아 글쎄 여름이 다 가버렸잖아요. 털썩.
아쉬워서 오바하며 수영하다가 살짝 감기 기운까지 생겼어요. -.-
이래저래 보내기가 아쉬운 2007년 여름이어요.^^

치니 2007-08-30 12:41   좋아요 0 | URL
아 , 그러고보니 아줌마라고 한게 좀 걸리네요. 신변은 알지도 못하는데...^-^;;
배우들이 좀 잘했다 싶으면 크게 웃음을 터뜨려주는게 그 어떤 격려보다 더 큰 격려였을 거 같아요.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에겐 그런 카리스마가 묻어난다는 말씀에, 흑 마음이 괜히 서글퍼집니다. 하고싶은 일...언제 하긴 하려나.
사실, 하고 싶은 일이 없어요, 뭘 하고 싶냐고 물으면 아무 일도 안하고 싶다고 대답하게 되요.
초가을 감기는 무서운데, 살짝 걱정되네요. 조리 잘하세요 ~

네꼬 2007-08-30 18:11   좋아요 0 | URL
응? 배추님 어디 사시는데 집근처에 그런 계곡이!! 부럽잖아요!!

치니 2007-08-31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핫, 예리한 네꼬님, 양배추님이 알려주시면 우리도 호젓한 그곳에 한번 놀러가죠. ㅋㅋ

nada 2007-09-05 18:58   좋아요 0 | URL
ㅋㅋ 제가 시골 살잖아요.
전원(?) 생활도 나름 매력이 있답니다.
제가 여기 아님 무슨 수로 전용 수영장 두고 살겠어욤~

치니 2007-09-06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저두 정말 점점 전원생활 하고 싶어지니 큰일이에요.
전원생활도 다 밥줄이 해결되어야 하는것 아니겄습니까.
 

늙었는지 아침 잠이 더 이상 안온다. 물론 더 이상 안 온다는 시각이 11시이긴 하지만, 일요일이면 누가 전화라도 하기 전까지는 몇시가 되던 계속 딩굴딩굴 자다말다를 해왔는데, 11시에 더 이상 눠 있을 수 없는 기분이 되니, 착잡하다.

일어나자마자 어젯밤 자다가 쉬야를 하러 가면서 편의점 생각이 났던게 떠올랐다.

우리 동네 편의점은 자다가 쉬야를 하러 갈 때 강력히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기때문에 그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자연 떠올리게 한다.

위치 자체가 그렇다.

화장실 창문을 열어두고 있는데, 그 창문과 편의점 정문은 길 하나를 사이에 놓고 맞닿아 있고, 편의점 정문 근처에는 커다란 티비 모니터를 걸어둔 채 24시간 방송을 틀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몽롱하게 자다가 일어나서 화장실 의자에 앉아 "텔레반 인질..."어쩌구 새벽녘의 피곤한 아나운서 목소리를 듣거나, 축구 경기를 해설하는 소리를 듣거나, 심지어 드라마 소리를 듣고 있자면, 소란스러움에 신경질이 솟다가도 혼자가 아니구나 라는 어이없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화장실에서만 들리는 수위를 넘어 방까지 목소리 뿐 아니라 숨소리까지 들리는데다가 그 티비를 보고 앉았으면서 여름밤 맥주잔 기울이는 부엉이들 때문에 숙면에 차질이 생긴 날이 한 두날이 아니다. 몇번을 신고까지 하려다가 참고, 편의점 주인아저씨에게 볼륨을 줄여달라는 부탁만 해온 상태인데, 이제 여름이 다갔네 하는 생각에 지난 해에 이어 또 포기상태.

이 주인아저씨로 말할것 같으면, 한마디로 나로서는 정이 안가는 사람이다.

갈 때마다 두번에 한번씩은 예전에 읽은 "달려라 아비"라는 소설이 생각나는데, 김애란에게 감사하다. 내가 가진 모든 편의점에 대한 기준과 애증을 그 소설의 한 단편에서 너무 잘 표현해주고 있었던 기억이 생생해서이다. 이렇게 마뜩치 않은 주인아저씨 같은 타입을 표현하자면, 그 소설 읽어본 사람에게는 더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될만큼 세세하고 예리하게 표현한 단편이 하나 있었다.

아무튼 이 아저씨, 보통 알바를 주로 쓰는데 자기가 24시간을 거의 죽치고 있는 자체가 맘에 안든다.

밖에 티비 모니터를 걸어서 24시간 방송을 할 뿐 아니라, 정문 앞에는 채소를 화분에 넣어 키우고 있는데, 그것이 정겹다기보다는 한참 지저분하고, 이 채소들을 걷어먹기 위해 똑같이 푼수 없어 뵈는 동생으로 뵈는 남자분과 한 명 정도의 여자를 때마다 초청하여 그 앞에서 삼겹을 구워드신다.

삼겹만 구워 드시냐, 아니다. 손님이 조금만 없다치면, 서서 컵라면이나 다른 먹거리를 해 드시고 있는 광경도 너무 자주 본다.

티비 모니터만 걸어놓으시냐, 아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엄청나게 큰 볼륨으로 소위 흘러간 뽕짝을 고속도로용으로 만든 노래들이 흘러 나온다. 뭘 천천히 사려다가도 황급히 뛰쳐나오게 만든다는 걸 모르는지 아는지, 노래를 따라 부르느라 신난 주인 아저씨. 참 개념 없어보인다.

친절과 사생활 개입에 대한 기준도 애매한건 이런 아저씨에게는 너무 잘 어울리는거라, 되도록 사생활 이야기를 슬쩍 물어오지 않게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며 2년여를 살아왔지만,

가끔이나마 하린군을 데리고 가면, 유효기간이 딱 당일로서 끝나는 우유를 쥐어주면서 한마디씩 안하고는 못배기시니.

결국에는 조금 멀더라도 다른 편의점을 가는 - 동네가 동네인지라 이런 편의점보다는 십대 알바들이 돌아가면서 뛰는 아주 냉정하고 사무적인 편의점도 많다 - 방법이 최선이겠는데, 게으른 내 육신이 그걸 자꾸 포기하게 한다.

오늘은 일요일. 갑자기 자신이 처량하다. 오늘은 물도 있고 담배도 있고 해먹을 거리도 있으니 그넘의 편의점에 안가도 되겠네, 라며 좋아하는 꼬락서니가...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8-05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06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da 2007-08-05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마지막, 치니 님의 안도가 저에게도 절실히 전해져 오면서..아니 도대체 어떤 편의점 아저씨길래? 김애란의 단편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히힛. 한밤중 변기 위에 앉아 편의점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여자. 어느 어둑한 홍콩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것도 같아요.

치니 2007-08-06 09:43   좋아요 0 | URL
김애란의 단편은 시간 되면 함 읽어보시길. 양배추님 덕분에 저도 한번 다시 들처 봤는데, 그 단편의 제목이 "나는 편의점에 간다"였군요.
홍콩 영화의 한 장면 같다니, 역시 상상력이 한 수 위세요. ^_^

chaire 2007-08-06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편의점에 거의 '담배'를 사러 가곤 했지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젠 그 일이 과거형이 되어버렸는데, 편의점 주인장 남자랑 제법 편하게 지냈던 터라, 저번 어느날엔가는 하드(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수박맛바!)를 사러 갔더니, 그게 다냐고 요샌 왜 담배를 안 사느냐고, 하더군요. 그 아저씨는 항상 제가 카운터에 가서 지갑을 여는 그 순간, 저의 엔츠를 꺼내놔두곤 했거든요. 하여, 몰랐구나, 나 담배 끊었잖아(그 주인장은 추정컨대 나랑 동갑, 밧트 외모는 동갑 아님..), 했더니, 뭐하게 끊어요 하더군요.. ㅋㄷㅋㄷ (아저씨 입장에선 그렇겠지?) .. 하여간, 어떤 편의점은 그렇게 마음이, 물론 '어떤' 마음은 통!하기도 한다는..
아, 물과 담배, 먹을거리 재료, 그게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죠, 사실...

치니 2007-08-06 15:30   좋아요 0 | URL
가장 이상적인 편의점 맨과의 관계를 갖고 계시는군요.
이런 알흠다운 풍경은 아쉽게도 그다지 자주 보이지 않아서...^-^;;
하긴 굳이 각박하게 선 그으며 살아갈 것도 없는데, 전 애가 좀 까칠해놔서요.
아무튼 엔츠를 피우셨었군요. 흠. 저로서는 한번 밖에 피워본 경험이 없어서 맛이 기억이 안나요.
언제 또 피우실건데요? ㅋㅋ 기다려집니다 ~

누에 2007-09-08 0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편의점이란게 없는 곳에서 살아서 가끔 생각난답니다. 밤에 쫄랑쫄랑 나가서 만화책 빌리고 담배랑 맥주랑 양파링 사가지고 쫄래쫄래 들어오는, 그 가슴이 훈훈해지는 풍경이 그리울 때가 많아요. 정말 덩달아 '달려라 애비'라는 책이 읽고 싶어지네요. ^^;

치니 2007-09-08 13:58   좋아요 0 | URL
아 , 미루어 짐작이었는데, 정말 프랑스 거주 중이신가보네요.
한국의 편의점 만큼 편안한 데는 세계 어느 곳에도 별루 없죠? ^-^
그래도 티비 크게 트는 아저씨, 아앙 아직도 미오요.
 

 

 

 

 

........그러나 너무 진지하고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 에쓰코의 신조였다. 맨발로 걸으면 발에 상처가 난다. 걷기 위해서는 신발이 필요하듯 살아가기 위해서는 뭔가 이미 만들어진 '믿음'이 필요하다. 에쓰코는 무의미하게 페이지를 넘기면서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그 누구도 그걸 부정할 순 없다. 우선 증거가 없다'

--------------------------------------------------------------------------------------

"우리도 친절하게 상담해 주자고"

이 부부는 기성복 밖에 입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맞춤 양복점의 존재 이유를 의심하는 것처럼 이미 벌어진 비극은 마음껏 재미있어 하지만 비극을 만들어 입는 사람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에쓰코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자였다.

--------------------------------------------------------------------------------------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건가. 이런 장난이 뭐 그리 재미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이들 장난에도 나름대로 그럴싸하고 진지한 이유가 있어. 무관심한 어른의 관심을 끌려는 아이들 세계에서 유일한 술책이 장난인거야. 아이들은 자신들이 버려졌다고 느끼지. 짝사랑하는 여자들과 아이들은 똑같이 버려진 세계에 살고 있어. 거기에 사는 사람이 본의 아니게 잔인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야.'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07-09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09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7-07-10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밀글 / ㅎㅎㅎ 저도 이전에 읽은 미시마 유키오는 너무 강해서 아름답기보다 거부감이 들었어요.
이 책은 그렇게 맛 가기 ㅋㅋ 이전의 초기 작품이라, 그런 느낌이 훨씬 덜하고, 참신하답니다.

토니 2007-11-25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 이책 읽고 있어요. 작가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 반신반의하며 책을 들었는데
정말 한 글자도 버릴게 없는 멋친 책이네요. 연달아 한두 번은 더 읽고 싶은...

치니 2007-11-25 21:43   좋아요 0 | URL
비운의 천재 작가라는 수식어는 이런 사람에게 붙이는 것 같죠?
저도 한 자도 버릴 게 없는 책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번 대방출 때도 이 책은 뺐죠. ㅎㅎ
 

안 온 사이 이미 인테리어가 바뀐 서재.

낯설다. 곧 적응하겠지.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랬듯이.

좋다 나쁘다라는 생각도 별루 안드는, 매사가 이런 식인, 나.

 

그나저나,

그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적어두러 왔었지, 참.

어제 퇴근 길, 정확히는 어디선가 교육을 받고 귀가하는 중,

집 앞 지하철 역 내에서 황인숙 시인을 보았다(고 믿는다).

앞에서 걸어오는 긴 파마머리, 약간은 뚜우 한 얼굴 표정, 그녀가 누차 산문집에서 걱정하던 통통한 몸매가 그녀를 99% 황인숙이라고 증명해주고 있었는데...

나는 바보처럼 언젠가 내가 알던 사람이긴 한거 같은데 누군질 모르겠다고 생각하다가,

1분 정도 경과 후에 아차! 하고 알아냈다.

물론 인사는 하지 않았고 (다행이지, 오지랖 떨었음 쪽 팔려서 어쩔 뻔 했누),

왠지 모를 반가움은 있었다.

잠시, 홍대에서 누구랑 술을 먹을까...라고 궁금해하기도.

 

세상은 역시 그다지 넓기만 하진 않다. 훗.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lowup 2007-06-14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가 통통한 몸매를 걱정했던가요.
왜 전 마른 몸매라고 기억하죠?
깡마른 몸에 그 우주인 퍼머라야 어울릴텐데.
어째 살짝 아쉽네요.

sudan 2007-06-14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분은 아시는데 왜 전 모르는 거죠?
시집 표지 날개에 있는 사진을 본 것도 같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길 가다가 알아볼 일은 없을테고요. 치니님이랑 나무님은 황인숙 시인을 어떻게 아시는거에요?

sudan 2007-06-14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까 위에 댓글이야말로 오지랖 떠는 쪽팔린 질문인것 같아요. -_-

sudan 2007-06-14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걍 지워버릴까. ㅠ.ㅠ)

치니 2007-06-14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 / 예, 제가 읽은 산문집에서는, 자제되지 않는 식욕을 한탄하며 헬스클럽 회원권을 끊기도 하는 등 다이어트에 대한 이야기가 좀 나왔드랬어요, 이쁘고 날씬한 사람들에 대한 동경 같은 대사도 나오고...ㅎㅎ 재미있었어서, 기억하고 있어요. 전 그게 아쉽다기보단, 귀여워요.

수단 / 우선, 새로운 서재에서 만남을 기뻐하며! ㅋㅋ
시집 표지에 사진은 어떤지 저야말로 기억이 안나요. 산문집 사진에서는 딱 그 파마였죠, 길고 부스스한 파마. 사진을 하도 여러번 보면서 책을 읽어선지 표정까지 너무 잘 기억나요.
근데 왜 위 질문이 오지랖이란 건지...걍 지워버릴까는 또 모에요. ㅋㅋㅋ 우리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