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J와 어머니가 내렸다. 평소 말이 없는 소년이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표정이 좋지 않다. 집이 먼 경우라 오는 길에 고단했나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자면서 왔어? 피곤해 보이네." 해도 답이 없다. 어머니가 "선생님한테 할 말 있잖아. 말씀 드려." 하는데 J는 여전히 답이 없고 대신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얘가 장염에 걸렸거든요. 그래서 누나하고 엄마만 요 앞 까페에서 차 마셨다고 기분이 안 좋아요. 오늘 수업 때도 간식 먹으면 절대 안 돼요." 어머니 말씀을 듣고 J를 안아주면서 "아이고 이 겨울에 장염이라니. 날도 추웠는데 어떡하냐." 그러자 J가 우앙 울음을 터뜨린다. 방수가 되는 점퍼 위로 눈물이 또르르 또르르 미끄러진다. 당황한 어머니가 "아이고, 왜 또 울어." 하시며 가볍게 나무라셨다. "추우니까 들어가서 울자." 나는 J를 데리고 들어왔다.  


언제부터 아팠는지, 증상이 어땠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물어보는 동안에 J는 조금씩 진정이 되어 울음을 그쳤다. 따뜻한 물을 권했는데 고개를 내젓는다. 나는 선물 포장용 비닐 봉투를 꺼내 와 테이블 위에 있던 곰돌이 젤리를 몽땅 담았다. 초콜릿을 담으면서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다음주 올 때까지 날마다 하나씩 먹어." 라고 했다. 누나랑 엄마는 절대로 주지 말고 너 혼자 먹으라고, 혹시 너무 나눠 주고 싶으면 그래도 되지만 선생님은 네가 혼자서 다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조금 웃었다. 평소에 아끼는 고양이머그 (잡지 만들던 시절 마감에만 쓸 정도였다)를 꺼내며 다시 따뜻한 물을 권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머그에 그려진 고양이가 나오는 책을 함께 읽었다. J는 조그맣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말수가 적은 소년은 너무 어렵고, 그리고 너무 좋다.









서울에 사는 J는 누나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 나를 만나러 파주까지 온다. 처음 만난 날은 한 시간 동안 "네"와 도리도리로만 의사를 전했고 그나마도 다 합쳐야 다섯 번이 되지 않아서 무지 애를 먹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뭐 했냐고 물어보니까 선생님이랑 얘기 엄청 많이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하셨다. 듣는 것으로 대화하는 사람이 있다. J도 그런 어린이였던 것이다. 활달하고 붙임성 있는 누나에 비해 표현이 없는 소년. 누나가 할 일을 마치고 집에 올 때까지, 어머니가 퇴근할 때까지, 빈 오후를 외할머니와 TV와 함께 보내는 게 일상인 소년. 아마도 나는 J가 실제로 만난 사람 중에서 제일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엄청 얘기를 많이 했다는 것이겠지.


애초에 일정에 무리가 있고 집도 멀어서 한 달만 만나기로 했었다. 책을 읽고, 읽어 오고, 얘기하고, 또 읽고. 떡국을 주제로 얘기하던 날(응?) J는 나이 먹는 게 좋다고 했다. "할아버지 되니까요." 이유를 물어도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헤어지는 날 내 앞에서는 잘 참았는데, 집에 가는 차 안에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엄마가 "선생님이 또 시간 맞출 수 있으면 만나자고 하셨으니까, 나중에 전화 해볼게."라고 달랬는데 그 뒤로도 종종 울면서 전화 좀 해보라고 한다고 어머니가 난감해하셨다. "주로 자기 전에 그렇게 울어요." 그 말을 듣고 며칠 동안 나 역시 잠들기 전에 J가 생각 났다.


그래서 이번 겨울에 어렵게 일정을 조정해 한 달을 만나는 중이다. 이 와중에 한 주는 누나 스케줄 때문에 못 오고, 2주만에 오는데 장염에 걸렸으니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날 만나러 와주다니 생각할수록 고맙고 미안했다.


"울고 있는데 누가 울지 말라고 그러면 막 화 나지 않아?" 했더니 쑥 들어간 눈이 동그래진다. "아니, 누구는 좋아서 울고, 울고 싶어서 우느냐고. 참고 참다 어쩔 수 없이 우는 건데. 그리고 울지 말라고 하면 마음 대로 그만 울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치? 어떤 땐 그래서 더 울게 되고 그렇더라." 그러자 J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울고 싶을 때 울어도 돼. 근데 울면 힘이 빠지잖아. 그러니까 울면서도 언제쯤 그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는 게 좋은 것 같아. 그리고 어른이 되면서는 울면 힘드니까 이번엔 안 울어야겠다, 하면서 조금씩 덜 울면 좋고. 선생님은 그랬어." 이 말을 하면서 나는 같은 말을 나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르쳐 주어서 고맙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J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이 맥락 없는 악수에 놀라지 않고 조용히 응해 주었다. 작고, 조금 축축하고, 따뜻한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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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01-30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냥 반가워요

네꼬 2016-01-30 00:51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님 저도 반가워요. (어딘가 청소 안 한 집에 친구 온 기분...)

로자 2016-01-30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좋은 느낌의 글!
저에도 가르쳐 주어서 고마워요.

네꼬 2016-01-30 00:58   좋아요 0 | URL
로자님 감사합니다. 배운 것 또 배워도 저는 늘 몰라요;;

다락방 2016-01-30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마지막에 눈물이 핑 돌았어요. 늘 얘기하지만, 글 좀 자주 써주세요! 으앙 ㅠㅠ

네꼬 2016-01-30 12:07   좋아요 0 | URL
으앙 ㅜㅜ 게으른 친구를 격려하는 다락방님. 고마워요.

2016-01-30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30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16-01-30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꼬님 ㅠ_ㅠ J어린이를 떠올리며 저도 눈물이 핑 ㅠ_ㅠ;;;; 네꼬님 글을 읽으며 조카아이들에게 조금 더 좋은 고모가 될 수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좀 더 자주 써주세요. ㅠ_ㅠ;;;;;;

네꼬 2016-01-30 12:10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은 지금 더 좋은 고모이실 것 같은데요 뭘. 여기 게으른 친구 격려하는 친구 또 계시네. 고마워요. 우아아앙 ㅜㅜ

웽스북스 2016-01-30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나도 이 글 읽는데 눈물 왜 핑 돌지? ㅜㅜ

네꼬 2016-01-30 17:35   좋아요 0 | URL
웽님이 착하기 때문이죠. 날씬한 웽님아!

밤의숲 2016-02-01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착한 건가요!!! ㅠㅠ

네꼬 2016-02-02 13:19   좋아요 0 | URL
밤의숲님 그럼여 착하고 말고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