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 선생님을 따라서 철원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철원의 두 중학교 학생들과 같이 [1945, 철원] 배경이 된 곳을 돌아보는 행사. 바람 쐴 겸 같이 가자는 선생님 말씀에 노느니 장독 깬다고 따라 나선 건데 날도 참 잘 잡았지. 강원도에 들어서자마자 어서 오시라는 듯 눈발이 거세지더니 점심을 먹고 나오자 이런 풍경이 되어 있었다. 철원엔 눈이 정말 많구나.

 

 

 

 

[1945, 철원]은 해방 직후 철원을 배경으로 한 청소년소설. 처지와 이념이 다른 아이들이 각자 희망과 좌절, 의지와 불안을 안고 세상에 나아가는 이야기다. 이현 선생님은 우연히 철원 '노동당사' 건물을 비롯해 허허벌판에 겨우 남은 옛 철원 시가지 흔적을 보고 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가 하고 매료되었다 한다. 해방무렵 춘천보다 컸던 도시, 남북 모두에게 애증의 대상이었던 도시, 전쟁이 한 도시를 어떻게 없애 버릴 수 있는지 증명하는 도시.

 

철원에 살고 있는 아이들과 이 작품을 읽은 선생님들이 강연과 함께 기행을 마련했고, 향토사학자 선생님도 여기 동행하셨다. 우리는 학교에서 중3 아이들이 만든 어설프고 귀여운 [1945, 철원] UCC를 보고, 선생님의 강연을 잠깐 듣고, 다같이 버스에 올라 '안보관광' 코스로 철원의 제한구역을 방문했다. 설명을 열심히 들으면서 따라 다녔는데, 늘 그랬듯 사진은 엉뚱한 것만 찍었다. 눈 구경 실컷 했네.

 

 

 

길이 미끄러워서 버스가 아주 천천히 갔다.

 

 

 

 

5만평 규모, 역무원만 80여 명이었다는 철원역의 터.

 

 

 

 

두 갈래 철로. 하나는 원산으로, 하나는 경성으로 향했다고.

 

 

 

 

월정리 역사 뒷뜰의 나무. 나는 이런 거나 찍고.

 

 

 

 

방해 되지 않으려고 일행과 떨어져 구석에서 사진 찍는 날 보던 군인 청년이 와서 사진을 좀 보자고 한다. 이 사진을 보더니 저도 웃긴지 피식 웃고 돌려주었다.

 

 

제한구역의 황망한 아름다움도 인상 깊었지만 그보다 내 마음에 새겨진 것은 아이들과 선생님들이었다. 춥다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싫단 소리 안 하고 작가 선생님 얘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역사 선생님 말씀에 따라 주위를 둘러보는 아이들이 예뻤다. 저희도 입이라고, 추우니까 열량 높은 게 당기는지, "느끼한 거 먹고 싶다" "난 떡볶이." "난 탕수육." 하며 재잘대다가, 또 정색하곤 "작가가 되려면 자격증 있어야 돼요?" 하고 묻는 아이들. 속으로 아이구 이뻐라, 열 번쯤 말한 듯.

 

그 예쁜 아이들 뒤에는 좋은 선생님들이 계셨다. 세 개밖에 안 되는 계단이 눈 와서 미끄럽다고 한 명씩 손을 잡아 내려오게 하고, 조곤조곤 살뜰하게 아이들을 챙기던 담당 선생님은 버스 기사님은 물론 불청객인 나에게조차 정중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셨다. 향토사학자 역사 선생님은 애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너희 증조할아버지들이 이 땅을 어떻게 일구고 무슨 일을 당하고 어떻게 살아남으셨는지, 우리가 같이 기억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선생님 얘기에 귀를 기울여줘서 선생님이 너무 고마워."라고 하셨다.

 

 

 

 

플래카드에 적힌 말, "70년 전 철원 사람들의 꿈과 사랑을 찾아서." 이 소박한 문구의 진정성.

 

 

 

 

 

철원역 터에서 준비해온 옛날 사진을 넘기며 설명하는 향토사학자 선생님. 꽁꽁 언 손과 눈밭을 헤친 발. 아이들은 그 손과 발이 보람 있도록, 동그랗게 모여서 선생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들이 손을 잡고 폴짝 뛰었다. 핸드폰 카메라라 0.5초 늦게 찍혔지만, 그애들 웃음소리까지 여기 담아 왔다. 철원은 어쩔 수 없이 척박한 곳이었다. 그러나 사랑받는 아이들은 어디서든 태가 난다. 덕분에 즐거웠어요, 아가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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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8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9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섬사이 2013-11-29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읽으며, 사진을 보며 울컥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이현 선생님한테 같이 가자 옆구리 찔리는 네꼬님도 부럽고,
눈 내린 철원역 하얀 들판을 배경으로 폴짝 뛰어오른 저 아이들의 발랄함이 예쁘고,
향토사학자 선생님의 꽁꽁 언 손과 눈 범벅이 된 신발을 눈여겨 보고 사진에 담을 줄 아는
네꼬님의 다정한 마음이 사랑스러워요.

네꼬 2013-11-30 12:47   좋아요 0 | URL
섬사이님, 이현 선생님 좋아한단 말씀 전해 드리면 이현 선생님 또 엄청 뻐기면서 다니실 거예요. ㅎㅎ 꼭 전해드립죠!
거기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다 예쁘고 좋았어요. 눈이 와서 힘들었지만 덕분에 잊을 수 없는 여행이 되었지요. 헤헤. 저 좋아요? 헤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좋아한다 막...)

프레이야 2013-11-29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토사학자 선생님, 참 다감하시군요. 아이들의 왁자한 웃음소리가 사진 속에 오롯이 들어있네요. 철원은 한번도 가보지못한 곳인데ᆞᆞᆢ그들의 꿈이 제 아버지의 꿈이기도 해요. 네꼬님의 눈사진으로 제 눈이 호강합니다^^

네꼬 2013-11-30 12:49   좋아요 0 | URL
그쵸. 그 선생님도 철원에서 나고 자라셨대요. 철원의 역사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그곳 할머니 할아버지들 인터뷰를 녹취하고 계신다고 하더라고요. 자부심이 강하면서도 아이들에게 다감하셔서 멋졌어요!

Mephistopheles 2013-11-29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겐 분단이 아픔이며 향수인데....

누구에겐 욕심을 채우기 위한 근사한 아이템인 세상입니다.



군인 아저씨 사진 검열했을 때.

네꼬님이 "이러지 마시라요. 내래 이상한 것 안찍었시요" 라고 했다면.....

네꼬 2013-11-30 12:50   좋아요 0 | URL
ㅋㅋㅋ 메피님, 정말 그래볼 걸 그랬네요. ㅋㅋㅋㅋ 군인 청년 깜놀하게. ㅋㅋㅋㅋㅋ

작가 선생님도, 역사 선생님도 하나같이 말씀하셨어요.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데, 함부로 입에 올리는 거 아니라고요. 아이들도 가슴에 새겼을 것 같아요.

밤의숲 2013-11-29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철원 가고 싶은데, 저도 향토사학자 선생님 설명 듣고 싶은데.
날씨까지 저렇게 근사했다니 부럽네요. >_<

네꼬 2013-11-30 12:51   좋아요 0 | URL
최소한 날씨는 부러워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엄청 춥고 미끄러웠거든요. 음, 덕분에 확실한 인상을 남겼지만요. 밤의숲님, 일단 저 책, '1945, 철원'을 읽어보심 어떨지. (이미 읽으셨으려나~)

레와 2013-11-2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훈훈해졌어요. ..
좋은 선생님들이 고맙네요. 우리 주위에 이런분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

네꼬 2013-11-30 12:53   좋아요 0 | URL
좋은 선생님들 정말 감사하죠. 아이들을 사랑하면서도 "내애애가 얼마나 애들을 사랑하는데!" 하고 생색 안 내시는 게 신기했어요. (-_-) 그 틈에서 덕분에 저도 사랑받는 청소년 코스프레.... (퍽)

서니데이 2013-11-29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원이 겨울엔 많이 춥다고 들었는데, 진짜 눈이 많이 오나 봅니다. 올 때도 눈 때문에 고생하셨겠지만, 사진올려주셔서 저는 잘 보고 갑니다. ^^

네꼬 2013-11-30 12:54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 눈이, 진짜, 진짜, 지이이인짜 많더라고요! 올 때는 깜깜한데 미끄러운 국도 뒷길 운전하느라 이현 선생님이 고생.. (그러나 그녀는 베스트 드라이버). 저만 보기 아까운 풍경, 같이 봐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