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체
안현미


우주 체험을 한 뒤에는 전과 똑같은 인간일 수 없다
-슈와이카트(우주비행사)


하루종일 분홍눈이 내렸다
세로도 가로도 없는 그 공간을 '방'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우주'라는 말을 발견했다

그후 우리는 '하나는 많고 둘은 부족한' 별에 착륙했고
중력은 희박했고 궤도를 이탈한 계절은 랜덤으로 찾아왔다
어제는 겨울 오늘은 여름 낮에는 가을 밤에는 봄

우리는 당황했지만 즐거웠고 우리는 은밀했다
이상했지만 세계는 완벽했고 중력은 충분히 희박했다
검색창 밖으론 하루종일 푹푹 분홍눈이 내렸고

하루종일 우주선처럼 둥둥 떠다녔다
사랑과 합체한 사랑은, 그리고 또 우리는
그후 '하나는 많고 둘은 부족한' 별의 거북무덤엔 다음처럼 기록되었다

사랑을 체험한 뒤에는 전과 똑같은 인간일 수 없다!

 

 

 

*

처음 펼친 시집의 첫 번째 시가 마음에 들 때는 막 두근두근하다.
이럴 땐 곧장 다음 시로 넘어가지 않고
잠시 책을 덮은 다음 방금 읽은 시의 좋았던 구절들을 생각한다.
분홍눈이라고 했지. 세상에, 깜깜한 우주에.
어제는 겨울 오늘은 여름 낮에는, 뭐였지? 아, 이렇게 부드럽게 흩어지는 시간들이라니.
조심조심 다시 책을 펼친다.
나 역시 시인처럼 당황스럽지만 즐겁게,
그리고 은밀하게 우주를 떠다닌다.
둥둥.
내 몸이 왜 이렇게 가벼운가 했더니
이곳은 중력이 충분히 희박한 우주.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의 계절을 알 수 없는 (뭐 상관도 없는)
이상하고 완벽한
우주. 

  

*  
 

안현미 『이별의 재구성』 (창비 2009) 


첫 시를 오래오래 읽고 또 읽은 다음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겨
두 번째 시를, 세 번째 시를 읽었다.
그런 다음 어딘가 떳떳한 마음으로 (응?) 친구들께 권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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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1-11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 제가 이 시집을 읽고 싶어라 했었는데 잊고 있었군요 ㅎ

다락방 2009-11-11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홍눈보다 더 제 흥미를 끄는건 '이별의 재구성'이라는 시집의 제목인데요.

사랑을 체험한 뒤에는 전과 똑같은 인간일 수 없다. 네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로요. 결코 전과 똑같을 수 없죠, 암요. 와- 시를 읽는 나의 친구라니! 완전 멋져요. >.<

섬사이 2009-11-11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몸이 왜 이렇게 무거운가 했더니
이 곳은 중력이 충분히 강력한 우주,
세 아이를 둔....
40대 아줌마의 우주..
그래도 랜덤으로 찾아와 뒤죽박죽 흘러가는 시간은
공통점이에요. ㅋㅋㅋ
오랜만에 네꼬님 봐서 그냥 기분이 좋아요. ^^

레와 2009-11-1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사랑을 체험한 뒤에는 전과 똑같은 인간일 수 없다! '

이렇게 격하게 공감가는 구절이라니.. 잠이 확 달아났어요, 네꼬님!^^

2009-11-11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는 사람 2009-11-19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꼬 씨 재능(매력으로 해석해도 상관 없음)은 아무리 가둬 두려해도(뭐... 그닥 가둬 두려 애쓰는 것 같지는 않지만) 잘 가둬지지 않는...바늘 구멍만한 틈새만 있어도 기필코 비집고 나오는 빛 같구려.

아베끄 2009-11-21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읽는 그녀들은 넘 사랑스러워요.
분홍색은 제 페이버릿컬러예요. 남들이 뭐라 하건 찐분홍색 옷을 막 입구다녀요.
띠지를 벗겨낸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 커버는 어찌나 맘에 쏙 들던지 책 받고나서 한참 황홀경에 빠졌었어요. 그래도 눈은 하얘야 될 것 같은...
토요일 회사 출근해서 딴짓하다 횡설수설하다 갑니다^^

네꼬 2009-11-23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모두 반가운 분들. 모두모두 함께 시를 읽읍시다. (응?) 자자, 아는 사람님도 일루 오세요. (저 알아요, 누구신지.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