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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교토 여행을 좋아한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내가 숨을 곳이, 마음 놓고 사랑할 도시가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지난 봄, 치료가 되었든 치유가 되었든 어떤 위로가 필요했을 때 그곳을 찾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지난 여행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조금도 얻지 못했다. 사람이 많고 날이 흐렸다고는 하지만 벚꽃이 만발한 교토는 분명히 아름다웠고, 사람들도 여전히 친절했다. 그러나 나는 걸음마다 아팠고, 새벽이면 눈도 뜨기 전에 이미 울면서 잠을 깨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빨리 교토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대로 이 도시를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끌림』은 어느 시인의 여행을 기록한 책이지만 ‘산문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한강 하류의 다리 공사를 보면서 그 일이 시를 쓰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던 시인이니, 그의 여행기를 읽는 것은 무척 기대가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200여 도시를 여행하고도 그 기록을 그저 ‘산문집’이라 하다니, 그리고 ‘끌림’이라는 이 뜻밖의 제목을 붙이다니. 못 떠나는 사람이 주눅 들게 하지 않는, 떠나고 싶은 이들의 바람을 달콤하게 대리만족시켜 주지 않는 이 책이 나는 처음부터 좋았다.
책을 펼치면 속표지도 차례도 없이 곧바로 그의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왜 떠나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그가 도착한 도시가 어디인지 떠벌리지 않고, 당연히 그 도시의 역사며 문화적 발자취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아주 가깝게(이것이 중요하다. 도시의 풍경을 담는 게 아니라 아주 가깝게) 들이댄 카메라로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길모퉁이와 과일과 술병과 옥수수와 빨래와 고양이와 자전거를 담아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 먼 데를 구경하고 온 이의 모험담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사려 깊고 말 없는 친구의 손에 끌려 정말로 그 도시에 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을 만난다.
거대한 어항 같은 도시 안에서 물기 없는 호흡을 하고 있을 때.... 깊은 밤 잠에서 깨어 통장 잔액 확인을 하고 있을 때, 죽집에 들어가 죽 한 그릇 시켜놓고 기다리다 주인이 가져다준 신문 첫 장을 외면하고 싶을 때, 허파로 숨을 쉬어야 하는 고래가 아플 적에 친구 고래가 아픈 고래를 수면까지 밀어올려서 숨을 쉬게 한다는 얘길 들었을 때, 웅크린 채로 먼 길 가는 달팽이의 축축한 행로를 지켜보고 있을 때, .... 뭔가 가득 채워놓은 것이 쓰러져 엎어졌을 때, 이사 후 아무렇게나 기대 놓은 그림을 누군가가 말을 해줘서야 바로잡고 있을 때... 보름달 주기를 따라 피었다 졌다를 반복하던 마당의 꽃들이 어느 순간 돌아가야 할 때가 됐다고 말할 때, 다시 또 누군가를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을 때.
#024 나는 간다
이 책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틈틈이 꺼내 아무데나 펼쳐서 읽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를 따라가 멕시코의 청결한 이발사를 만나고, 자기 키만 한 액자를 들고 선 청년과 함께 빠리의 지하철을 타며, 런던의 택시운전사로부터 행색이 초라한 손님에게 팁을 받은 슬픈 이야기를 듣고, 잔돈이 없어 여행자에게 그냥 옥수수를 내주는 순박한 페루 청년에게서 따뜻함을 느끼고, 수첩의 달력 칸칸에 베토벤, 존 레넌, 고흐, 아인슈타인을 적어 넣은 어떤 여행자의 수첩을 엿보고, 그리고 ‘불행히도 우리가 다시 태어난다면’ 베니스가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알게 되었다. 여행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끄는 곳으로 따라가는 것이다. 그 도시가 나를 부른 이유를 깨달을 때까지 겸손하게 마음을 열고 머물러야 한다. 걷고 보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도망가서는 안 된다. 도망해버리면, 돌아오는 길이 괴로울 테니까. ‘끌림’으로 떠나고, ‘끌림’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교토에 다시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 도시가 나를 불러준다면. 그러면 가서 그곳의 공기를 꼭 안아주어야겠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