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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 꾸리는 법 - 골고루 읽고 다르게 생각하기 위하여 땅콩문고
원하나 지음 / 유유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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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019년 각각 독서모임 운영자로 모임을 꾸려 나간 경험이 있다. 2018년 모임은 독서모임으로 성격이 변질(?)된 경우이고 2019년 모임은 처음부터 독서모임으로 계획하고 운영된 경우다.

 

2018년 독서 모임부터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작은교사모임으로 15명 내외의 각 학교 업무담당자들이 회원이다. 자발적 모임이 아니라 반강제적 모임이었다. 운영자 역할을 모두 거절하길래 할 수 없이 맡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이는 회원 수가 줄어들었다. 별도의 회비도 없겠다, 원래 원치 않았던 모임이겠다, 강한 구속력이 있는 모임도 아니겠다, 서로서로 모르는 처지이겠다, 흥미거리라고는 눈 뜨고 찾아봐도 없어보인지라 모임의 지속가능성도 희박해 보였다.

 

관에서 주관해 달라는 모임이라 예산 200만원을 쓸 수 있는게 가장 구미가 당기는 매력 포인트다. 회장격인 내가 책임지라고 하는 모임이니, 애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책부터 사서 모든 회원들께 개별로 택배 배송해 드렸다. 과한 친절때문인지 붙박이 충성 회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모임성격을 전환시켰다. 독서모임으로^^

 

저자도 초청하여 모임을 가졌고, 연말에는 책 후기는 아니지만 작은학교 근무 경험담을 담은 소책자도 정식 출판했다. 책 제목은 『작은 학교 교사 이야기』, 부크크, 2018.

 

『독서모임 꾸리는 법』(원하나, 유유,초판 1쇄 2019.9.24, 3쇄 2019.11.24, 152쪽, 10,000원)을 미리 접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회원들을 대상으로 우수회원 책 선물 아이디어, 모일 때마다 윤독하기로 책 읽기 부담 줄어주기, 모임 규칙 정해 열심회원만으로 정회원 구성하기, 모임 안에 소모임 만들기 등은 모임의 분위기를 쇄신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출석 도장 이벤트로 출석 독려하기도....ㅎㅎ

 

2019년 모임은 그야말로 독서하겠다는 취지로 계획서를 제출하고 사업비를 따온 정식 프로젝트 독서모임이었다. 회원은 7명으로 제한 되어 있었다. 저자 원하나님도 독서모임을 꾸릴 때 최소 7명~10명으로 구성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10명까지 확대한 것은 2~3명 정도 결석자가 생기는 탓 때문이다. 적어도 7명이 돼야 나눔이 풍성할 수 있다.

 

다시 돌아와 2019년 독서모임을 이야기하자면 학교 내 다양한 인적 구성으로 모임을 꾸렸다. 학교장, 행정실장, 교사, 보건교사, 도서관사서, 교무행정사 등으로. 막강한 라인업이다. 단, 연령대가 다양하고 직종이 광범위해서 공통된 관심 영역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7개월 간 지속하다보니 느슨해 지는 경우가 생겼다. 저자(원하나)가 말한 바처럼 긴장감을 얻기 위해 시즌제(3개월 단위)로 쪼개 운영하는 법도 좋았을 것 같다. 독후 감상평, 서평 등의 회원 글들을 모아 소책자를 만들었다.『책과 사람의 만남』, 성원출판사, 2019,비매품.

 

스마트폰이라는 강력한 장애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더 재미있는 독서모임을 연구하지 않으면 그나마 있던 영역마저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운영자가 고생스럽더라도 들풀처럼 독서모임을 꾸려 가야 한다. 그대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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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길이 되다
이원식 지음 / 두란노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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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보다 성경이 먼저 들어온 나라, 조선!

 

세계 기독교 선교 역사에 보기 드문 사례가 있다. 선교사 보다 성경을 먼저 접한 나라가 있다는 점이다. 조선이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 속에서 목숨을 걸고 '성경'을 먼저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통해 기독교가 삽시간에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앞서 병인박해를 통해 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들 당한 바가 있다.  '성경'을 지닌다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극히 위험한 일이었다.(『정민의 다산독본 파란』 1~2권, 정민, 천년의상상, 2019) 

 

누군가 던져 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민족과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기독교만이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 책은 이렇게 무모한 도전을 한 믿음의 사람들 이야기다. 영화제작자이기도 한 저자가 중국, 일본 곳곳에 다니면서 '코리안 바이블 루트'를 조사했다. 한글로 성경이 번역된 곳이다. 몰래 성경을 조선으로 들여 온 곳이다. 낯선 땅(중국, 일본)에서 조선을 품고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 처자식과 본인의 생명까지 송두리째 바친 외국 선교사들이 머무른 곳이기도 하다. 

 

저자가 촬영하고 조사한 지역을 장소별로 구분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

 

코로나 바이러스의 진원지로 알려 진 곳이지만 '코리안 바이블 루트'에서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1865년(제1차 전도여행), 1866년 8월(제2차 전도여행)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통역관으로 대동강 평양 근처를 방문해 한문성경을 전하다가 순교가 로버트 J. 토마스를 기억하고 있는가? (『회복해야 할 사명, 전도』최종상, 성서유니온)

 

한국의 첫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를 아는가? 그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으로 올라오다가 군졸들에게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죽을 때 군졸에게 건넨 성경은 '최치량'에게 건네져고 그는 훗날 평양교회를 세웠다. 제너럴셔면호 부근에서 성경을 받은 홍신길은 서가교회를 세웠다.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베었던 군졸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전도는 이런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하나님은 영국의 웨일즈, 거기서도 아주 작은 마을 흘라노버의 작은 교회 20대 청년 '로버트 제메인 토마스'를 선택하여 한국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회복해야 할 사명, 전도 』60~62쪽

 

중국 상하이로 파송되어 온 토마스 선교사는 항구에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중국 내륙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후베이성 우한시로 정탐을 다니던 중 아내가 유산을 한 채 과다출혈로 세상을 떠난다. 아내와 아기가 묻힌 중국을 떠날 수 없었고 산둥반도 세푸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만난 조선인 김좌평과 최선일을 만나면서 조선을 알게 되었다. 그후 예수를 모르는 조선이라는 땅을 놓고 기도하며 자신이 있을 곳이 베이징이 아닌 조선이라고 확신했다.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에서 순교가 내막이다. 만약 토마스 선교사가 상하이에서 서쪽으로 중국 내륙 중심지에 위치한 우한시 가지 않았다면 아내를 잃지 않을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조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후베이성 우한시는 조선에게는 각별한 도시임에 틀림이 없다.

 

토마스 선교사를 통해 윌리엄 번즈, 윌리엄슨 목사가 조선을 알게 되었고, 존 로스(스코틀랜드) 선교사가 한글성경을 최초로 번역하게 된다. 존 로스 선교사의 한글 선생이었던 이응찬, 존 로스 선교사를 통해 성경을 건네 받은 의주상인 백씨가 집에 돌아와 아들 백홍준에게 주었는데 그 백홍준이라는 아들은 훗날 조선의 사도바울로 불린 인물이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와 관련된 인물로 서상륜은 권서인이 되어 서울까지 성경을 가지고 내려온 인물이다. 김진기, 이성하는 조선 최초의 세례인이 되었다.

 

2. 의주

 

의주는 예로부터 중국 접경지역이어서 중국을 오고 가는 관문이었고 국경이 폐쇄되는 가운데에서도 밀수입이 성행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곳 의주를 관통하는 압록강을 통해 '코리안 바이블 벨트'가 형성되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의주상인 백씨는 영국산 옥양목을 얻기 위해 토마스 선교사에게 접근했지만 대신에 한문으로 쓰여진 얇은 성경을 건네 받았다. 백씨가 위험을 무릅쓰고 성경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백씨의 아들 백홍준은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고, 인쇄된 성경을 들고 의주를 거점으로 주변 지역에 성경을 퍼트리게 되었다. 한글성경이 들어온 역사적 장소가 의주다. 한글성경 번역에 앞서 1816년 서해안을 탐사하던 바실 홀과 맥스웰은 서해안 마량진 근처에 정박해 영어성경을 전했고, 1832년 귀츨라프가 동인도회사의 배인 로드 앰허스트호를 타고 백령도와 고대도, 제주도 등을 탐사했는데 고대도에서 한문성경을 전한 바가 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듯이 당시 한글성경 번역을 위한 최상의 조합이 만들어졌다. 의주 상인들은 성경 번역을 위해 준비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문과 중국어를 알았고 한글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 팔도와 중국 땅을 누비고 다니며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며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95)

 

3. 일본

 

일본은 조선의 의주와 동시다발적으로 성경이 들여온 곳이다. 의주 상인을 통해 번역된 한글성경이 여인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급속도록 퍼졌다면 일본에서 번역되어 들여온 국한문혼용성경은 소위 식자층과 고위층으로 번져나갔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본에서 성경이 번역될 수 있었을까?

 

이수정이라는 인물을 기억해야 한다. 1882년 임오군란의 결과로 조선은 일본에 사죄한다는 의미로 박영효를 단장으로 한 '수신사'를 일본으로 급파한다. 이수정은 당시 수신사의 비공식 수행원이었다. 이수정은 일본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츠다센'이라는 일본인 목사를 만난다. 우치무라 간조 목사와도 관련된 인물이다. 이수정은 일본에서 기독교를 접한 뒤, 미국에 선교사를 요청한다. 이 일로 조선에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가 언더우드, 헤론, 아펜젤러, 스크랜턴이다. 이수정은 일본에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매진한다.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성경이 먼저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길이 되어준, 목숨 걸고 성경을 날라 준 무명의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코리안 바이블 벨트의 중심지였던 '의주'가 다시 한번 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대부흥의 근원지였던 '평양'의 배후에는 코리안 바이블 벨트 '의주', '중국', '일본'이 있었다. 성경을 번역하여 날라준 곳이다. 지금 우리 손에 쥐어준 성경의 가치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참고로 네팔 T족에도 부족의 언어로 성경이 보급되어 활발히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저자가 기록으로 남겼다. 하루 3시간을 걸어 예배에 참석하러 온다고 한다. 부끄러운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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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2 - 정민의 다산독본 파란 2
정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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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는 두 권의 책에서 다산 정약용의 젊은 날의 정치가이자 행동가, 실무자로 살았던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지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파란 1권에서도 줄기차게 정민 교수가 이야기했던 점은 다산 정약용은 겉으로는 배교한 듯 했으나 속으로는 천주를 믿고 의지했었음을 낱낱히 조사하여 밝히고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북경 신학교를 졸업한 제1회 졸업생 신부인 중국 본토 소주 사람 '주문모' 신부를 구출하고 도망가게끔 한 장본인이 다산이었다는 점을 다양한 문헌 속에서 찾아냈다. 다산이 아니고서는 조정의 색출 작업에서 주문모 신부는 꼼짝 없이 잡힐 수 밖에 없었다. 색출 작업이 있을 것이라는 고급 정보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다산 뿐이었다!

 

둘째,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낙향했을 때 천주교의 핵심인물인 이존창을 손쉽게 검거하여 조정에 보고를 한 것은 당시 '주문무' 신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교세를 확장시켜야 했기에 천주교 핵심인물과 교통하며 전략상 이존창을 검거하여 관심을 다른데로 돌려야 했었다.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인물은 오직 다산 밖에 없었다. 이 사실은 다산이 천주교 핵심인물과 비밀스럽게 교류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셋째, 다산과 관련된 인물 모두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셋째 형 정약종부터 이승훈, 황사영, 윤지충 모두 집안 사람들이다. 다산이 살아 남아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그는 겉으로 배교한 척 했다. 주변 사람들이 봤을 때는 다산 형제(정약전, 정약용)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1권에서도 언급했듯이 정조 임금이 죽기 전 18년은 청년 정약용은 날개 단 듯 꿈을 이뤄갈 수 있었다. 한 번도 현장 경험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물리학적인 역학계산까지 척척해 냈다.(수원화성, 곡산 가계도)

 

"이래서 독서하는 선비가 필요한 것이다" 정조가 이가환에게 이야기한 말이지만 정약용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다산은 정조의 의중을 먼저 읽어 한발 앞서 나갔다. 정조 임금의 속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간파하고 필요한 부분을 즉시 해결해 가는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어떤 어려운 일을 시켜도 다산은 척척 해냈다"

 

다산의 저작 중에 '목민심서'를 모르는 분은 없겠다. 지금의 황해도 곡산부사로 좌천되어 내려갔을 때 지방관으로서 본을 보인 것들을 경험을 토대로 적어간 지방관 역행 수행서이다. 정민 교수는 혈기왕성했던 다산이 소송에 연루되어 억울한 심정으로 분을 내며 곡산으로 내려갔다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 같았다면 대충 지방관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 싶은데 다산의 사람됨은 역시 출중하다. 훗날 신유박해 때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곡산부사로서 선정을 베푼 일이 참작되어 유배형(강진)으로 감해 지는데 일익을 감당했다고 한다.

 

정민 교수는 청년 다산의 모습을 800쪽에 가까운 분량으로 1,2권 나누어 조사하여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이다. 앞으로 유배 시기 18년, 해배 시기 18년을 정갈하게 정리하여 독자들 앞에 내 놓는다고 한다. 박제화된 정약용의 모습이 아닌, 인간 정약용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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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1 - 정민의 다산독본 파란 1
정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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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나는 박제화된 성인 다산을 만들 생각이 없다. 그도 우리와 같이 숨 쉬고 고통받고 고민하던 청춘이었다" (8)

 

우리가 잘 아는 다산 정약용은 정조 임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다산의 목숨을 노리는 정객의 칼 날을 온 몸으로 바위처럼 막아 준 사람이 정조 임금이다. 정조의 심복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다산은 총애를 받았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 많은 이들이 다산의 정치적 위치를 끌어 내리기 위해 그를 조준을 했고, 정조준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 천주교였다. 천주교 말고는 다산을 위협할 수 있는 공격거리가 없었다. 임금이 든든한 배후로 받쳐 주고 있었기에 흠 잡을 것이 없었다. 젊은 시절(18년) 다산 정약용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천주교도 빼 놓을 수 없다.

 

정민의 다산독본 1권 『파란 1』은 청년 정약용을 다룬다. 그동안 독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문헌 속 행간의 정약용을 연구한 정민 교수의 정약용 파헤치기를 볼 수 있다. 사실 지금껏 알려온 정약용은 '다산학'을 이룰 정도로 평범한 사람 치고는 어느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민 교수는 다산 정약용도 우리와 똑같은 심성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며, 다산과 관련된 문헌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통해 인간 정약용을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다만, 18세기 조선의 정치적 배경과 관련된 이야기이기에 관련 사전 지식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지루한 읽기, 고단한 읽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은 정약용과 관련된 책 치고는 상당히수준 높은 책이라고 봐야 한다. 정약용에 대해 의욕을 가지고 읽기를 처음 시도하고자 하는 초보자분들은 약간 숨고르기를 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먼저, 정조 임금이 다산을 총애했던 이유를 보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야당 계열인 '남인'을 키울 필요가 있었는데 그 중심에 청년 '정약용'이 눈에 들어왔다. 학술 군주로 유명한 정조 임금과 토론을 심도 있게 할 정도로 청년 '정약용'은 학문적 깊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공부법을 보면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 세상이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여도 마음으로 승복되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다. 질문의 포인트를 명확하게 갈라 논거를 들어 핵심을 찌른다. 선입견 없이 문제에 집중한다. 이것이 평생을 일관한 다산의 공부 방식이었다. 다산은 눈치 보지 않았다. 문로에 따라 정해진 공부를 해 왔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61)

 

"메모는 다산 학술의 출발점이자, 거의 모든 것이었다. 다산과 그의 제자들은 메모하는 것으로 그들의 공부를 시작했다"(133)

 

"한 가지 주제를 들고 여러 날 한곳에 머물며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은 다산이 속해 있던 성호학파의 학적 전통에 뿌리를 둔다. 이들은 공부 도중에 문제에 막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면 모여서 상의하고 함께 토론했다" (136)

 

정민 교수가 분석한 청년 '정약용'의 공부법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공부에 있어서도 혁신을 추구했던 청년 '정약용'은 관습에 따라 공부해 온 다른 이들과 구별되었고 그것이 학술 군주였던 정조의 마음에 쏙 들어왔던 것이다. 정조의 씽크탱크 격인 '규장각'의 초계문신으로 당당하게 입학시킨 정조는 청년 '정약용'에게 과로가 될 만큼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연구과제를 던져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정약용'은 완벽하게 과제물을 보고서로 올렸다. 인내와 끈기까지 겸비한 그는 정조의 정치적 자산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정조는 정약용 일가가 포함된 남인을 위한 여러가지 정치적 포석을 많이 단행했다. 그 예로 '문체반정'이라는 정책이 있다. 격에 맞지 않은 글을 쓰지 말라는 임금으로서는 속 좁은 정책 제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행시킬 '남인' 세력을 전면에 세우기 위한 정치적 속임수라는 사실임을 정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노론 자제들을 중심으로 당대 유행했던 청대 소품 문체의 수용과 겉멋이 든 삐딱한 글씨체를 함께 거론함으로써, 고의로 논점을 흐려 상쇄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하곤 했다" (121)

 

정조 임금은 정약용을 포함한 '남인'계열을 보호하기 위해 '천주교' 사태를 자신의 비호 세력을 깍아내리기 위한 한낱 정치적 음해로 여기도록 애를 썼다. 윤지충의 제사 거부로 시작된 '진산 사건'은 충분히 정국의 태풍이 될 수 있었다. 정약용은 1784년 9월경 자청하여 이승훈에게 영세했고 그의 세례명은 약망, 즉 사도 요한이었다. 이승훈, 이가환 등 정약용 일가들을 견제하기 위한 도구로 남인 중에서도 공서파측은 집요하게 천주교의 제사 거부를 들고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 임금은 고도의 정치술을 발휘하여 논쟁의 화살을 벗어나도록 노력했다.

 

참고로, 천주교의 제사 거부가 뜨거운 감자가 되었던 계기를 정민 교수는 아래와 같이 조사했다.

 

"동아시아에서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한 칙서는 가톨릭의 해묵은 논쟁과 문제 제기, 그리고 이에 대한 오랜 토론 끝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이 결정은 이전부터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의 보유론적 관점과 적응주의 원칙을 거부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은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관점과 스페인의 원조를 받은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등의 교조주의적 관점이 충돌하면서 야기된 긴 논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필 이때 북경에서 프랑스 예수회 교단이 해체 축출되면서 프란치스코회 교단이 새로 자리 잡은 시점인 것이 화근이었다."(308)

 

다시 요점을 정리해보면, 윤지충의 제사 거부는 중국에 들어와 있는 천주교로부터 제사에 관한 답을 받기 위한 간 윤유일이 만난 신부가 바로 교조주의적 관점을 지닌 프란치스코회 신부였다는 점이다. 결국 윤유일은 조선에 들어와 조선에서 행하고 있는 제사를 거부해야 한다는 답서를 천주교인들에게 내 놓았던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겠지만 만약 윤유일이 만난 신부가 적응주의적 관점의 예수회였다면 병인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약용이 천주교를 배교했다고들 알고 있지만, 정민 교수는 문헌 또는 서로 오고간 서신 속에서 직접적으로 밝힐 수 없었던 정약용의 마음을 행간에서 발견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하면, 정약용은 겉으로는 배교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천주교를 옹호하며 정치술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윤유일이 (중국으로 들고 간) 편지는 이승훈의 이름으로 적혀 있었다. (중간생략) 이승훈은 처형당하기 전에 의금부 공초에서 북경에 보편 편지는 정약용이 허락 없이 자신의 이름을 도용해 쓴 것이었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309)

 

 정민 교수는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최초로(?) 밝혀 내고 있다. 정조 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관한 얘기다. 사도세자가 특별히 읽었던 소설책 목록 중에 북경에서 들여온『성경직해』, 『칠극』이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에서 훗날 천주교 교리서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한 이 두 책이 당시에 이미 사도세자의 거처에 놓여 읽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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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와 혁명가 - 영성의 두 갈래 길
이도영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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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 봉담마을에 위치한 더숲어숲동산교회 이도영 목사는 남다른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전작 『페어처치 』에서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했다. 이번 『성자와 혁명가 』에서는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두 갈래 영성을 말하고 있다. 왜 기독교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는가? 그 이유를 이도영 목사는 성자적 영성과 혁명가적 영성이 통합되지 못한 결과로 본다. 어느 한 쪽이라도 결여된다면 기형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이기주의에 도취된 기복만 바라는 교회(혁명가적 영성의 결여)되거나 자기 의만 드러내려는 과격한 교회(성자적 영성의 결여)가 될 수 밖에 없다.

 

저자 이도영 목사는 의도적으로 책을 구성할 때 성자적 영성을 전면에 배치한 뒤 나중에 혁명가적 영성을 소개한 듯 싶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도 성자적 영성이 우선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혁명가적 영성을 지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가 말한 것처럼 '존재'보다는 '소유'만 강조하고 하나님의 위대함보다는 자신이 소유한 믿음의 위대함만 의지하려는 영성은 사실 없는 것만 못한 신앙이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고 교인을 불쌍히 생각하는 이유도 제대로 된 '성자의 영성'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자와 혁명가 』앞부분 성자적 영성의 기초와 적용을 다룬 1,2부에서는 저자의 어렸을 적 힘들게 살았던 자기 고백(불우한 가정, 열등감 등)과 신학을 한 뒤 공군 군목으로, 안산동산교회에서 부목사, 더불어숲동산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는 동안 경험하고 실천한 신앙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독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가 있는데 병든 자를 치료하고 성령이 역사하는 순간들이 필요할 때마다 일어났다는 점이다.

 

지면의 3분의 2를 할애하면서 성자적 영성을 이야기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했겠지만 3분의 1에 해당하는 '혁명가적 영성'을 왜 지녀야 하는지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개신교에서 개혁하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장 칼뱅의 '기독교강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기독교강요'는 프랑수아왕에게 보내는 편지임을 서론에 담겨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쓴 책임을 알 수 있다. 개신교에서 중요시하는 인물 중에 한 명인 바울의 교회론도 세상과 분리된 종교적 목적을 위한 모임이 아니라 도시국가의 대내외 정치적 의사 결정을 하는 사회적이고 참여적인 도시 전체의 민회에 가까웠다고 한다. 왈도파 개신교인 마리 뒤랑은 38년 프랑스 콩스탕스 감옥에 갇혀 지내지면서 '저항' 정신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혁명가적 영성'을 불온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간절히 담아 놓았다.

 

교회의 일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깨어나야 한다, 시민사회 안에서 시민의 덕목을 소유해야 한다, 세상의 부조리에 분노하며 소회된 자의 편에 서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여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으로 변혁시킬 개혁가 또는 혁명가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혁명가적 영성으로 실제로 실천하고 있는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세월호, 미투, 장애, 난민, 공정 무역, 대안 건축(헤테로토피아) 6개 부분을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봉담 마을에서 실천하며 지역을 넘어 시 전체로, 도 단위에서 의제로 삼을 정도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는 구원론과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분리 된 점" (242) 이라고 강조한다. 신분만 변하고 사람은 변화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는 용서되지만 죄인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롭다 여김을 받았지만 성화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복음의 사사화"(247) 라고 말한다. 복음은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결코 내용은 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복음은 공공의 장에서 선포되며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복음은 공공의 진리라는 것이다. 개인 윤리만 있고 사회 윤리가 없는 것이 한국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이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자선과 시혜 안에 정의의 문제가 생략되어 있다"(248)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없다고 지적한다. 구조적인 악을 해결해야 하는 정의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오직 개인적인 자선과 호의로만 생각한다는 점이다. 공의와 정의는 사회적 차원의 윤리이다. 성경은 개인의 자유만이 아니라 집단의 자유를 말한다.

 

성경은 시선의 문제가 곧 권력의 문제라고 본다.(280) 지배와 억압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의 문제라는 점이다. 공동체는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기 위해서' 존재한다. 공동체는 연약한 자를 돕는 곳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연약한 자임을 아는 곳이고, 우리 모두에게 장애가 있음을 아는 곳이며, 서로 연약함을 보듬어주는 곳이다.(284) 손상은 생물학적인 것이고 장애는 사회적인 것이다 .

 

"교회가 그 지역만의 필요를 알아내고 그 지역을 섬기는 것이 없으니 지역이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지역 교회는 반드시 지역의 공공재 또는 공유재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기에 지역이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정한 교회라면 지역이 교회를 붙들게 만들어야 한다" (326)

 

이도영 목사의 『페어처치』와 더불어 『성자와 혁명가』가 기존 교인들에게는 불편한게 사실이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폭넓은 관점으로 보게 해 주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분명한 것은 저자가 말한대로 성자적 영성과 혁명가적 영성의 두 갈래에서 균형을 이뤄간다면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다. '빛과 소금'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붙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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