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필수 자신 있게 따라 쓰기
좋은친구 편집부 지음, 황명석 그림 / 좋은친구출판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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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의 바른 글씨 예찬론

 

나는 지금 현직 교감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일이다. 강원도 산골 학교에서 5학년과 6학년을 한 교실에서 가르치던 시절이다. 일명 복식학급 담임교사였다. 학교 전교생 수가 30명 남짓했다. 교사는 딱 3명. 5학년과 6학년을 모두 모아 봤자 10명이 안 됐다. 학기 초 의욕적으로 담임교사인 내가 직접 학습지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3월부터 12월까지 우리 반 아이들을 위해 나만의 학습지를 손수 제작했다. 그 학습지에는 <초등 필수 자신있게 따라쓰기> 처럼 바른 글씨체를 위해 따라 쓰기란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따라 쓸 글자들은 학교 이름, 학교의 교목, 마을 이름 등 학생들과 친숙한 이름들을 따라 쓰도록 구성했다. 수학적 창의적을 길러 주기 위한 코너, 영어, 재미난 퍼즐 등 다양하게 학습지 한 쪽 지면을 빼곡히 채워 아침 활동거리로 내 주었다.

 

아이들 중에 특별하게 아직도 기억나는 학생이 있다. 당시 6학년 이었던 김*민, 고*현 학생이다. 기억이 생생하게 나는 이유는 정말 글씨체가 똑발랐다. 격자 정사각형 칸에 글자 한 자 한 자를 또박또박 써 냈다. 1년 내내 말이다. 뭉툭한 연필을 손에 꼭 쥐고 힘껏 눌러 쓴 흔적이 학습지에 고스란히 남았다. 약간 비뚤어진 글씨는 지우개로 지워 다시 고쳐 쓴 흔적까지 남길 정도로 정성껏 글씨를 썼던 학생들이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분명 자신의 주어진 역할들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에 비해 오늘날 학생들은 어떨까? 아이패드, 키보드, 스마트폰 등 IT 도구의 발달로 글씨를 쓸 기회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지금의 아이들을 가리켜 '포노사피엔스'라고도 하지 않나. 정말 직접 손 글씨를 써 보낼 기회가 많지 않다. 가정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학교에서도 글 쓸 기회가 많지 않다. 대부분 교실 안에 있는 커다란 TV화면에 의지하여 학습 활동을 한다. 고작 종이에 쓸 일이 있다면 자신의 생각 몇 자 적는 일 밖에는 기록하는 활동이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상급학교로 진학하더라도 글씨 모양이 나아지지 않는다. 손에 필기도구를 쥐어본 적이 없으니 자신의 이름 석 자 쓰는 것도 지렁이 기어가듯이 흘려 쓸 뿐이다. 학생들만 그럴까? 아니다. 학교에 있어보면 성인이 된 교직원도 매 한가지다. 가끔 서명부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쓴 것을 보면 어른 글씨체라기보다는 초등학생 글씨체처럼 보인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과연 글씨를 바르게 쓰는 것이 필요할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대신 해 주고, 사물인터넷의 발달로 말로 명령을 내리는데 과연 글씨를 쓸 필요가 있을까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요한 것을 결정하고 서명을 할 때, 직접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들을 종이에 써야 할 일들은 시대가 변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정갈한 글씨체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그것이 결국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모습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바른 글씨체는 바른 자세에서 시작된다. 힘주어 또박또박 정성껏 시간을 들여 쓰는 행위는 신체적으로 바른 자세를 갖게 만들어준다.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손에 힘을 줄 수 밖에 없다. 손가락 근육을 움직여 주니 뇌의 활동을 활발하게 만들어준다. 어릴수록 글씨 쓰기를 권장해야 하는 이유가 뇌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바른 글씨체는 자신감을 갖게 해 준다.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은 제법 자신만의 멋드러진 글씨체를 간직하고 있다. 서명을 할 때에도 나만의 글씨체로 종이에 족적을 남긴다. 젊은 교직원들이 서명지에 씌여진 글씨체를 보고 '글씨가 참 멋있다' 라고 한 마디씩 하곤 한다. 나와 비슷한 세대의 선생님들의 글씨체는 하루이틀만에 만들어진 결과물이 아니다. 오랫동안 써 온 나날들의 흔적들이다. 반면 글씨를 많이 써 본 적이 없는 분들은 글씨가 가벼워 보인다. 


글씨 연습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 반복적 훈련이라 생각하고 글씨를 써 보면 노력한 것만큼 글씨의 모양이 잡힌다. <초등 필수 자신있게 따라쓰기>와 같은 교정본을 따라 쓰다보면 어느새 글씨가 바르게 잡혀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 쓰도록 견본으로 나온 글들이 우리말 동시, 이솝 우화에 나온 글들이라 글씨체를 만들어가기도 하지만 어휘와 문장의 이해도를 높이는 능력도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에 맞게 재미난 그림을 보고 따라 쓰도록 구성되어 있다. 어른들 글씨 교정할 때도 사용하면 좋을 듯 싶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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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미래 - 코로나가 가속화시킨 공간 변화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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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미래가 있다라고 유현준 건축가는 말한다. 인류의 역사는 공간을 활용한 역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신석기 혁명의 유적지로 발굴된 터키의 차탈회윅에서도 움집 형태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간은 권력으로도 활용되었다. 북아메리카의 고대 유적지 카오키아에는 높은 둔덕이 있었다. 종교적 의미이든 어떻든 최고 지배자는 높은 곳에서 아래로 지켜보며 통제의 장소로 활용했을 것이며 그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신성한 곳으로 보이지 않는 바리케이트를 설치해 놓고 계층 간 차별을 확실하게 했다. 공간을 힘이 작용하는 부분으로 활용한 흔적들은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유현준 건축가가 시종일관 책에서 강조한 부분은 책의 부제이기도 한 '코로나가 가속화시킨 공간 변화'다. 코로나 이전에는 누구나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단 감염을 예방하자는 차원에서 국가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을 세우면서 공간은 정말 특별한 사람만이 활용할 수 있는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최대한 사람들이 밀집된 곳은 피해야했기에 한적한 곳, 소수의 몇 명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천정부지로 가격이 올라갔다. 앞으로 미래에는 지금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감염병의 발생 횟수는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결국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은 공간마저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된다. 공유 공간을 확보하든지 특단의 대처가 마련되지 않으면 가상 공간에서만 대리만족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건축 전문가답게 대한민국 도시들의 건축물들을 새롭게 변화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닭장처럼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형 도시들에서는 미래가 없다고 말한다. 규제가 완화를 해서라도 좀 더 다양한 모양의 건물들이 도시를 채워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필로티 구조의 건물들이 문어발식으로 세워질수록 도시의 실제 활용 면적은 점점 줄어들게 되니 정부가 나서고 민간 업자들을 끌어모아 건물주들이 합의하에 주차공간은 지하화하며 1층의 매력적인 공간은 특색있는 상가로 돌려 누구나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거리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현준 건축가다운 구상이다. 

 

LH투기로 국가 주도의 주택공급 정책이 빛을 바래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부족한 주택 시장을 공급을 해서라도 주택의 가격을 다운시켜야 한다는 원칙은 변함이 없다. 다만 젊은층들을 위한 최소형 주택이나 청년층도 자기 소유의 주택을 보유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정비할 것을 요구한다. 가령 임대주택이 보기에는 좋으나 결국 영원히 주택을 보유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빠뜨릴 수 있음을 우려한다. 실질적인 주택 소유가 잘못된 것은 아닌데 마치 주택 소유를 위한 노력들을 투기나 잘못된 윤리의식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이야기한다. 

 

공간의 변화는 교육에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경제적 효율을 따진다면 학생이 줄어드는 작은 학교는 과감히 폐교하는 것이 정답일 수 있겠지만 앞으로 다가올 기후변화와 전염병 발병을 예상한다면 밀집도가 어느 정도 완화된 작은 학교를 살려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지금 당장이야 학생 수가 줄어드니 통폐합을 유도하는 것이 유리할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학생 수가 줄어든만큼 여유분의 학교 공간을 다른 방향으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으며 작지만 강한 학교로 학생들이 멀리서도 찾아올 수 있는 학교로 변모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관련 법규가 완비되어야겠지만 말이다. 건축법이라든지 시설에 관한 규칙 같은 것들도 유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안전과 크게 밀접한 것이 아니라면 기존이 학교 공간을 파격적으로 디자인을 한다면 학생 뿐만 아니라 인근 주변 시민들의 공유 공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지금의 교실 규모(약 20평)는 학생 수 20명이 6~8시간 함께 지내기에는 부족한 공간임에 틀림이 없다. 20평 규모의 아파트에 20명을 집어 넣고 6~8시간 함께 있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욕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유현준 건축가도 강조했듯이 이제 공간은 필수적인 영역이 되었다. 없어서는 안 될 영역이 되었다는 말이다. 정치적 권력자들도 공간 활용을 어떻게 정책적으로 끌어내느냐에 따라 국민들의 마음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주거 문제, 교통 문제, 환경 문제 등 모두 공간과 관련성이 높다. COVID-19 이후에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계층 간의 양극화가 심화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도 공간 활용에서 드러난다. 공간에 미래가 달려 있고 미래에는 누구나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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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배움의 주인이 되는가 - 학습자 주도성과 생성 교육
정기효 지음 / 비비투(VIVI2)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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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을 자극하는 것은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신체와 온전히 동일하거나 익숙한 것들이어서는 곤란하다. 지금의 나와 이질적인 무엇과의 만남으로 자신의 사고와 신체의 배치가 흔들리는 경험이 배움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자 시작이다. 이질적인 감응으로 욕망의 배치와 신체의 강도가 달라져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함으로써 세계를 변혁하는데 기여하는 일이 배움에 대한 나의 정의이다" (86~87)

 

저자는 초등학교 현직 교감이다. 교사 시절때부터 학생들의 '배움'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하고 고민해왔다. 교육과정 안에서 학생들의 '배움'이 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간과할 수 없어 직접 학생 개별 학점제, 학생 학점제, 학생 자율 학점제, 학생 자율 과정, 학생 자율 시수, 학생 생성 교육과정을 시도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앞두고 그의 노력들이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경상북도교육청에서는 시범적으로 학생 생성 교육과정을 도입하고 실험적으로 진행중에 있다고 한다. 

 

저자가 말하는 학생 생성 교육과정이란 무엇인가? 학생 생성 교육과정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저자가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은 학생이고, 학생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교육과정을 통해 진정한 배움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지금까지의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은 주어진 교육과정일 뿐이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제시한 성취기준마저도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획일적으로 각 학교급에 따라 뿌린 주어진 교육과정의 한 부분이었다. 현장에서 남다른 시각으로 고민하고 애쓰는 교사들에게는 성취기준마저도 걸림돌이 되었고, 특히 COVID-19 로 인해 시행된 원격수업에서는 기존에 뿌려진 성취기준이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원격수업과 대면수업이 혼합된 블렌디드 수업을 위한 성취기준의 수정이 있다고 하지만 이것조차도 국가에서 획일적으로 정한 성취목표일 뿐이다. 저자가 생각하기에는 겉만 번지르한 교육과정으로 다변화한 시대 속에서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인간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강조하는 학생 생성 교육과정이란 무엇인가? 경상북도 일부의 초등학교에서 현재 실험적으로 진행 중에 있다. 관련 자료를 보면 국가에서 제시한 성취기준은 참고하되 학생이 직접 만든 성취기준을 가지고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과제를 수행하는 부분이 눈에 띈다. 국가에서 제시한 수업 시수 중에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고 만들어가는 교육과정 시수를 과감히 할애하여 학생들의 주도성과 창의성을 키워보자는 의미이다. 교사는 당연히 조력자로 피드백을 상시 염두해 두고 학생들이 만든 교육과정에서 앎이 제대로 생성되고 있는지 눈여겨 보는 역할을 한다. 학생 생성 교육과정이 지금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시도되고 있지만 이것이 활성화되면 전 교과에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배움은 누군가가 떠먹여주는 것이 아니다. 배움은 말그대로 학습자가 주체가 되어 스스로가 느끼는 것이다. 교사가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배움 조차도 학습자가 아닌 누군가가 판단해 주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배움을 빙자한 학력 또한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강조한다. 학력의 잣대는 무엇이며 학력이 과연 변화되는 시대 속에 고정불변한 것인지도 의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배움의 주인이 되는가>는 학교 현장에서 실천한 배움의 에세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그동안 탐구한 교육 철학서이기도 하다.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깊이 있게 책을 탐독해 왔으며 어려운 철학서를 붙들고 고민했는지 그려진다. 그렇기에 결코 가볍지 않는 책이자 이론에만 천착되어 현실을 터부시한 책이 아님을 대번 독자들이 알게 될 것이다. 앞부분에는 저자가 고민하는 교육, 학력, 배움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어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교육과정의 실제부분이 나오니 인내하며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다. 

 

현직 교감으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교육과정의 최선두에 서서 교사들과 고민하고 연구하는 저자의 모습이 존경스럽고 부러울따름이다. 하루아침에 쌓여진 깊이가 아니라서 과연 범접할 대상은 아니지만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교육과정에 대해 관심 있게 들여다보고 교육의 새로운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해가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간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깊이 있는 내용은 아직 쉽게 이해하기 어려워 두고 두고 생각해 보며 문맥에 담긴 행간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겠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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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 추는 남자 (벚꽃에디션) -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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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나도 <플라멩코 추는 남자>를 만나보았으면.....

 

주인공 허남현은 굴착기 기사다.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현재 두 번째 아내와 살고 있다.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딸을 두었고, 지금의 아내와의 사이에서도 딸을 두었다. 67세 노년이 나이에 접어둔 남현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았났을 때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로 기록한 <청년일지> 노트를 서재에서 찾아낸다. 거기에는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것들도 기록해 두었다. 그 중에 하나가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보연이를 찾는 일이고 보연이에게 아빠 노릇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일이었다. 남현은 수소문 끝에 보연이를 찾는다. 그리고 보연이와 함께 스페인 여행을 떠난다. 스페인 광장에서 플라멩코를 춘다. 수 많은 관광객들이 지켜 보고 있지만 남현이에게는 딸 보연이가 지켜 보고 있다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보연이는 잃은 아빠를 늦게나마 찾게 되고 서로가 용서를 하게 된다. 

 

학교에 근무하다보면 한부모 가정이 제법 많이 늘어나고 있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서그렇겠지만 안쓰럽게 느껴진다. 아이의 잘못이 아니었는데 고스란히 상실의 아픔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가야 할 아이의 미래가 그려지기 때문에 마음이 쓰인다. 사춘기에 접어들면 부모의 도움이 더욱 필요한 때가 있을텐데 어떻게 하나 생각이 든다. 행여나 상처가 곪아 터져 삐뚤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된다. 아빠와 엄마가 있는 가정에서도 여러가지 힘든 일이 많은데 한 부모 그늘아래에서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지고 가야 할 아이의 장래가 눈에 밟히기도 한다. 내가 그런 삶이 살았기에 피부로 더 와 닿나보다. 아버지 없이 자랐기에 그 설움을 잘 안다. 아버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나, 단 둘이서 살았다.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금기어였다. 나 스스로도 아버지가 누군지 간절하게 물어보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과거를 다시 끄집어 내는 것 같아 깨끗이 잊어버리며 살고 있다. 그러다가 <플라멩코 추는 남자>를 읽으며 잊었던 아버지의 존재가 다시 생각난다. 왜 아버지는 나를 찾지 않았을까? 지금도 살아계실까? 만약 플라멩코 추는 남자, 허남현처럼 지금이라도 내 앞에 나타난다면 어떨까? 

 

나도 제법 나이가 들었다. 이제 곧 있으면 50이니 말이다. 혈기 왕성할 때야 우리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존재가 불편하고 원망가득하겠지만 반백 인생을 맞이하는 지금에서야 만약 나타난다면 보연이처럼 처음에는 당황스럽겠지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가정을 꾸려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자녀들도 장성하여 손주까지 보고 노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수 있겠다. 허남현의 두 번째 가정의 가족들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 남편에게 전 처 소생의 딸이 있다는 사실도 이해해 준다. 허남현의 또 다른 딸 선아도 다른 엄마의 딸, 언니가 있다는 것에 적지 않게 당황하지만 아빠를 용서하고 넉넉히 이해한다. 나 또한 그렇지 않을까. 이왕 이렇게 살아왔는데 왜 우리 가족을 버렸냐고, 나를 찾지 않았냐고 따질 수 있겠는가. 그저 생명을 준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고 늦게나마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을 따름이다. 젊었을 때는 이 모든 가정사가 숨기고 싶은 비밀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니 이것 또한 내 삶의 일부분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오히려 이런 가정사가 있었기에 가정의 소중함을 절실히 바라고 지켜내려고 하지 않았나 싶다.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말못할 아픔과 상처가 있지 않을까? 다만 밖으로 꺼내 놓을 수 없기에 지금도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있을 뿐. 나를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지금이라도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을 사람이 수두둑 할 것 같다. COVID-19를 신호탄으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각퍅해 지고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감염될 줄 모르기에 만남을 꺼려하고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더더욱 대화할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자멸의 위기에 처해 있고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지원금으로는 회생 불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주변의 이웃들의 아픔을 서로 공감해 주지 못하는 것이 더욱 안타까운 현실이다.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굴착기를 사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인간미가 묻어 있는 늙다리 청년에게 마음을 준다. 약삭빠른 젊은이보다 무디지만 진솔한 청년에게 자신의 굴착기를 넘기려 한다. 공감해 주는 사람, 용서해 주는 사람이 필요한 시기다. 설령 사회적 지탄을 받을 짓을 한 사람이라도 왜 그런 짓을 했는지 한 번 쯤은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과정이 필요한 시기다. 누가 플라멩코를 추는 남자, 허남현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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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교육공동체운동 - 세계적 동향과 전망 한국교육연구네크워크 총서 10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지음 / 살림터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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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아니, 교육은 달라져야 한다. 시대가 바뀌면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도 바뀌듯이 교육을 통해 변화시킬 인간상도 조금씩 수정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제4차산업혁명, COVID-19 등 미래가 갑자기 소환되어 교육의 발자국들은 가속화가 불가피졌다. 학교가 교육의 중심이라는 생각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근대학교의 시작은 단시간안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국가 주도의 일방향적인 교육 정책은 나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문제는 앞으로다. 각 국가별로 교육을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지고 있다. <마을교육공동체운동: 세계적 동향과 전망>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미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덴마크, 영국의 사례는 우리도 달라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해 준다. 1930년대부터 미국은 필요에 의해서 커뮤니티 스쿨을 확대해 가고 있으며 가깝고도 먼나라 이웃 일본은 법령에 근거하여 커뮤니티 스쿨 즉 지역과 함께 하는 학교를 지원하고 있다. 다민족 국가인 캐나다도 각 주별로 교육 자치권을 통해 지역 사회와 함께 교육적으로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공화주의라는 국가의 가치 아래 기회평등을 위해 시민주도의 교육을 추구해 가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우리나라는 2010년대부터 '마을교육공동체'라는 우리나라만의 지역과 학교가 함께 협업하는 교육운동을 전개해가고 있다. 마을교육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해 보완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우리나라만의 특성에 맞는 민관학 거버넌스를 교육과 어떻게 맞춰 가야할지, 마을교육공동체의 주체가 누가 되어야할 지 등 각계 각층의 목소리를 담아 연구한 소논문 형식의 글들을 모은 이 책을 여러분에게 추천한다. 

 

먼저, '마을교육공동체'라는 뜻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 

 

각 지역교육청 조례(경기도, 광주시, 세종시 등)에 근거하면 "마을 내 학생, 교직원, 학부모, 마을 주민 등이 함께 학생의 교육활동 지원을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 로 정의할 수 있겠다.  '지역의 아이들은 지역이 키운다' 라는 모토 아래 마을을 통한 교육, 마을에 관한 교육, 마을을 위한 교육을 행하는 것이다. 

 

'마을을 통한 교육' 과 '마을을 위한 교육' 은 학교가 중심이 된 교육이라면 '마을을 위한 교육'은 지역이 중심이 된 교육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공동체란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요소다. 공유된 가치, 정서, 관심과 참여를 토대로 구성원 간의 소속감이 완성되는 곳이다. 지역은 인적, 물적 기관으로 구성된 일종의 복합적 기능을 가진 곳이다.  학교교육이 지역사회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역사회 발전과 교육적 가치가 함께 가야 한다는 네트워크적 인식이 깔려 있다. 다른 세계 여러나라와 차별되는 우리나라만의 마을교육공동체 운동의 차별점은 학교 단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장점도 될 수 있지만 지속적 동력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재정 지원이 중단되면 마을교육공동체 운동이 위축될 수 있다. 학교 안으로 사업들이 밀려오면 학교 구성원의 인력만으로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결국 또 다른 인력 보충이 필요하게 된다. 아니면, 지역 거점 마을교육공동체 전담센터를 개설하여 지역 안의 마을교육공동체 운동의 구심적이 되도록 하는 제도적 보완장치가 필요하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학교가 구심점이 되어 사업을 진행하다보면 좀 더 효율적으로 예산이나 재원들을 사용하기가 어렵게 된다. 

 

교육과 돌봄은 지역의 공동 과제여야 한다. 지금까지 학교는 학생들의 앎과 공동체적 삶을 통합시키지 못했다. 학생이 살고 있는 마을과는 동떨어진 수업을 진행해 왔다. 현실과 지식이 분리되어 있었다. 학교와 마을이 분리되어 공동체 의식을 가질 수 없었다. 최근들어 마을을 알아가기 위한 다양한 교육과정 재구조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변화의 시작이라고 본다. 학생들이 마을의 현안 문제를 학생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일,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들의 일터를 돌아보며 정주 의식을 가지게 하는 일, 마을을 둘러보는 현장체험학습, 마을 주민들과 만나 대화를 시도하는 일 등은 얼마든지 교육과정 재구성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COVID-19 로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에 따라 대도시로 향하는 현장체험의 움직임들이 뚝 끊겨 버려 자발적으로 마을 안에서 체험의 기회를 늘려가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의 과제는, 

 

지역사회 안에 있는 인적, 문화적, 환경적, 역사적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일이다. (마을을 통한 교육

학생이 속해 있는 지역에 대해 배우는 일이다. (마을에 관한 교육)

학생들이 지역사회의 훌륭한 자원이 될 수 있도록 미래 진로 역량을 키워 주는 일이다. (마을을 위한 교육)

 

마을 안에 다양한 인적 자원들이 많다. 현재 방과후학교 강사로, 진로 멘토로, 마을 선생님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다. 마을 주민들을 통해 생각과 가치, 역량을 생생히 배울 수 있다. 학교는 마을과 함께 가야 한다. 수업이 마을의 일부가 되어야 하고, 마을이 수업이 되어야 한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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