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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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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남좌파는 엘리트다. 그리고 사실, 우리 사회의 엘리트는 '강남'이라는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엘리트는 강남좌파와 강남우파, 그리고 강남중도가 존재할 뿐이다. 

 솔직히 강준만의 <강남좌파>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분명했다. 실제로 일반 대중에게 강남좌파는 특정한 기호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옷잘입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등) 신분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진화했고, 정치적 의미에서 강남좌파는 엘리트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2.만약 <강남좌파>의 출간이 몇 개월만 늦춰 졌다면, 안철수에 대한 인물평을 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느새 우리의 정치는 완벽한 대리정치로 수렴하고 있는데, '개 중에 나은 사람'이 무리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무리의 지도자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강남좌파>를 하나의 현상으로 파악하면서, 

   
  한국인은 물질적 삶과 정신적 삶에서 서로 융합하기 어려운 두 개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물질적 삶은 박정희식 개발독재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는다. 반면 정신적 삶은 개발독재 패러다임을 거부하며 세게 최첨단을 달리는 패러다임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한국 사회 도처에 그런 모순이 널려있다. 이게 바로 '총론 진보, 각론 보수'와 그에 따른 '투표와 여론의 괴리 현상'이 나타나는 배경이기도 하다.(73쪽)  
   

 라는 강준만의 지적이 현 시점에서 타당하고 핵심을 말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안철수에 열광하는 것과 이명박에 열광하는 것은 총론에서만 다를 뿐 각론에서 같다고 뒤집어 생각할 수도 있겠다. 

3.엄밀하게 말하면, 이 책은 '지금'이라는 시기에 개입하는 현재적 책이다. 사실 모든 강준만의 책이 그런 '현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 책은 특히나 지금 여기의 현실정치에서 보이는 하나의 딜레마를 가장 정면에서 응시하게 해준다. 

앞서서 말했지만, 소위 현 정권에 대한 대안으로 거론되는 이들이 모두 '강남좌파'라면 그것은 호불호를 떠나서 하나의 현상으로서 심사숙고해볼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왜 우리는 '무리 중에서 나은 사람'의 정치에서 '나은 사람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정치에 빠지게 되었나? 

4.혹자는 계급정치(넓은 의미에서의 계층정치)의 종언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할테고, 이런 저런 변화로 인해 '평평해진 세계'에서 이유를 찾기도 할 테지만, 개인적으로는 대중이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없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를테면 '정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이라고 부를 수 있을텐데, 농담이라도 '내가 해도 그보단 잘하겠다'는 말 대신 '그 사람 대신 저 사람이 상대적으로 낫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정치적 불구의 징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5. 사실 <강남좌파>의 1장~3장이 본론이고 인물평이 담긴 4장 이후는 부록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머리 한켠에서는 '왜 이들 중 교수, 사장이 아니라 청소부, 자영업자, 월급 노동자 출신이 없을까'라는 질문을 달고서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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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사람들과 만나면 늘 '덥죠'라고 묻고 답했던 시간이 과거가 되었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지난 폭염에 달궈진 - 편집자들은 그 더웠던 여름날 이 책들을 만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새 책들을 꼽아보았다. 

  

첫 책은 4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기수로 꼽히는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이다. 왜 사회는 갈등하는가라는 질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구조나 계급, 미움과 질투, 차이와 차별에서 찾아냈고 혁명이니 종교니, 관용이니 하는 해법을 제시해왔다.  하지만 지긋지긋하게는 사회는 반목한다. 

호네트의 진단은 의외로 '상식적'이다. 서로의 '알아줌'(인정)이 문제라는 것이다.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서 사회의 변화, 인식의 변화를 설명했다. 호네트가 주목하는 개념은 바로 여기서 착안된 것인데, 다양한 사회적 주체간의 상호인정이 필요한데 이 사회는 그러한 인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1인 시위 등의 가두시위는 알려지지 않는 이들의 '뜻'을 알아달라는 표시다. 뜻이 통하지 않으면, 직접 그 뜻을 실현하고자 할 수 밖에 없다. 바로 인정투쟁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만큼 인정투쟁이 강한 곳도 드물 것일텐데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을 듯 싶다.

  

아렌트에 대한 책이다. 정말 아렌트 르네상스를 실감케한다. 브뤼엘의 <아렌트읽기>라는 중요한 책이 출판된 것에 이어 또 다른 아렌트 관련 서적의 등장인 셈이다. 이 책은 사회과학책을 전문적으로 펴내는 루트리지 출판사의 기획물 중 한편을 이룬다. 바로 이 사실이 낯선 필자와 낯선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해준다.  

 한나 아렌트는 이야기의 힘을 믿었다. 서술의 힘을 믿었다는 말인데, 그를 통해서 개개인은 스스로를 들어낸다. 그 드러냄은 단순히 영웅의 드러냄 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독특한 불멸성을 획득하게 된다. 우리 모두가 특별한 존재라면, 누가 누구보다 어떻다는 비교조차 사소한 것이 될 수 있다. 아마 아렌트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소환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파인만이다. 게다가 만화다. 이 독특한 사람을 설명하는데 만화만한 매체가 있을까.  마치 마블코믹스의 영웅시리즈 옆에 놓여 있을 듯한 느낌이라니.

 

 

 

  

저자 마크 데이비스는 참 대단한 사람이다. 한편에서는 <슬럼>이라는 책을 쓰고, 다른 한편에서는 <조류독감>에 대한 책을 써내더니 이젠 자동차폭탄이다. 여전히 그의 대표작 <수정의 도시>가 번역되지 않은 것은 심대한 유감이지만, 그래도 자동차폭탄을 매개로 하는 그의 이야기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원제인 '부다의 자동차'는 자동차 테러의 시초 격인 마리오 부다가 제이피 모건을 목표로 감행한 자동차 폭탄을 의미한다. 이슬람의 자동차테러에서 볼 수 있듯이 집단이 아닌 개인적 결행으로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는 자동차 폭탄은 20세기 역사의 한 이면일 수도 있겠다.  

마크 데이비스가 그렇게 녹녹한 사람이 아니듯, 자동차 폭탄에 대한 그의 책 역시 묵직한 울림을 줄 것이라 기대한다.

 

  

 

안중근에 대한 엽서를 만들었다가 혼나고, 미국에 가서 몰래 다시 만든 사람. 제국주의 일본에서 온갖 빨갱이 사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킨 사람. 요즘처럼 신념을 가진 사람이 배척되는 때가 있나 싶고 그래서 이런 책이 번역되는 것을 보니 신기하다.  

누군가 이 책에서 고토쿠의 '우리'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우리에게 우리는 누군인가라며, 고토쿠의 우리는 동아시아의 민중이었다고 말이다. 경제적 세계화에 비해 초라할 만큼 허약한 정서적 세계화를 생각해본다면 그의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충분히 재론될 만하다. 

 

이제 낙엽을 기다려야 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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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읽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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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은 1975년에 한나 아렌트가 사망한 이후 그에 대한 방대한 평전을 쓴 사람이고,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해에 또 다시 그에 대한 평전을 쓴 사람이다. 한 사람이 한 인물의 주요한 시기에 쓰여지는 평론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거의 유일한 일이 아닐까 싶다. 책의 내용에도 소개되지만, 영-브루엘은 아렌트의 수많은 제자 중 수제자로 꼽히는 2명 중 한명이다.  

2. 

흥미롭게도, 영-브루엘의 아렌트에 대한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2007년과 2011년이다. 원작은 20년 가까이 시차가 있지만, 90년대 후반부터 생기기 시작한 국내 아렌트 연구자들의 활동으로 인해 아렌트의 저작은 봇물 터지듯이 소개되었고, 그에 대한 2차 저작 역시 그렇다.  

3. 

이런 맥락에 놓인 이 책 <아렌트 읽기>는 'What X Matters'라는 총서의 한 권으로 출판된 것을, 독립된 책으로 번역한 것이다. 앞서의 전기가 아렌트의 생물학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책은 아렌트의 '정신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하는 그의 정신적 삶을 전기, 중기, 후기라는 대략적인 시기 구분을 통해서 살펴본다. (아쉬운 것은 통상 그가 '세계사랑'에 대한 개념을 사용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시작하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이 점은 분명한 이유가 있기에 넘어간다) 

전기, 중기, 후기 할 것없이 아렌트가 강조한 한 단어를 떠올리라면, 나는 '생각'이라는 단어가 적절할 것이라 본다. 그 만큼 아렌트는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다. 실제로 필화사건이 되어 버린, 나치전범 아이히만에 대해 그가 붙인 '악의 평범성'은 '생각없음'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의 어떤 정치체제와는 다르게 현대의 체제로서 존재하는 전체주의 역시 '생각없음'과 연결된다. 생각은 자신의 머리가 아니라 미디어나 언론, 혹은 정치지도자에게 맡기는 순간 생겨나는 정치체제가 바로 전체주의라는 것이다. 이는 극히 현대적인 정치체제인데(이에 대해 영-브루엘이 얼마나 강조하던지...), 그것은 '무지'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와는 다르게 문맹률도 낮고, 고전에 대한 교양도 높지만 생각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바로 전체주의를 특징짓기 때문이다.(전범 재판을 받던 아이히만이 칸트의 도덕률을 인용할 만큼 상식 수준은 높았다!!) 

4. 

<아렌트 읽기>를 읽으면, 난해하기 그지 없는 아렌트의 주요한 저작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를 제공받을 수 있다. 특히 <인간의 조건>과 같은 책에 대해서 그가 강조했던 '행위'가 사실상 예측불가능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해석은 꽤나 놀라웠다. 그렇게 해서 가능성의 영역으로서 정치에 대한 고민, 그리고 프랑스혁명에 대별되는 미국 혁명의 가치 등 그의 고유한 문제의식이 떠올랐다. 결국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그에 그치지 않는다. 아렌트의 현재화 혹은 '아렌트주의'라고 칭할 수 있는 방식 때문인데, 영-브루엘은 아렌트의 사상과 911테러, 그에 이은 전쟁행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과거청산과정, 동유럽의 민주화 등 아렌트 사후의 사건들을 연관시킨다. 이를 통해서 아렌트 사상에 대한 훈고학적 해석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에서의 비판적 독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영-브루엘이 한국판 서문에서 '진실과화해위원회'의 한계를 지적하고, 중동에서 일어난 잇단 혁명적 움직임에 대해 평가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동시대에 대한 관심이 이해된다(상아탑 속의 세상에서 진리를 찾는 수많은 아렌트 전문가가 아니라 이 사람이 평전을 쓴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영-브루엘은 아렌트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아렌트를 통해서 '아렌트주의'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며, 바로 이 책 <아렌트읽기>는 그 전범이 되는 책이다. 

5.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아렌트읽기>가 아니라 <아렌트를 통해 읽기>로 바뀌어야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된다. 책을 보는 과정에서 수십개의 책귀가 접혀나갔고, 많은 부분에 밑줄이 그어졌다. 최근에 본 어떤 책보다 많은 영감을 준 책이다(필멸성과 불멸성 사이에서 나타나는 행위의 영웅적 측면, 그리고 용서와 약속의 의미...). 더구나 아렌트 전문가가 번역한 책은 꽤나 잘 읽힌다. 모처럼, 짜릿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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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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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0년대 후반, 문화비평가라는 직함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전에 문화비평이라는 장르가 탄생했다. 문화비평이란 작업이 영미권의 특수한 환경에서 숙성된 문화'비평'이었던 반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문화'라는 대상을 비평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어렵게 태동한 문화비평은, 그야말로 대상에 매몰되는, 그래서 문화를 다루는 비평작업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문화비평가라는 직업은, 그 전까지 자유기고가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들의 새로운 직함이 되었다. 

2. 

그래도 그렇게 문화비평의 황금기가 있었다는 것이, 지금과 같이 문화의 영역이 더 이상 생산을 멈춘 불모지의 시대보다 나았다는 생각이다. 당시만 해도 문화현상에 대한 다양한 비판적 담론이 만들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문화의 생산자-향유자-비평가라는 삼각의 구도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디워'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문화에 대한 향유자와 비평가의 취향 차이는 서로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비판적 문화비평은 소란속에 거세되었다. 그렇게 남은 영역은, 향유자의 손해보지 않는 상업적 선택을 도와주는 문화상품에 대한 소핑호스트들과 문화적 소란을 인용하여 사회, 경제, 정치영역의 엄숙함에 '똥침'을 날리고자 하는 '문화 전사'만이 남았다. 

3. 

그런 점에서 이택광 교수가 내놓은 <이것이 문화비평이다>(자음과 모음)은 어쩌면, 불모지가 된 우리의 문화비평이라는 척박한 토양에서 끈기있게 피워낸 성과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문화비평가란 뿌리에서 문제를 본다는 의미에서 '급진적 비평가'(11쪽)이며, 문화비평은 문화라는 형식을 통해 사회의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문화비평이라는 장르 자체가 곧 정치적인 것(13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문화비평이야말로 일상에 파묻혀 있는 불편한 정치성을 발굴해서 제 몫을 찾아주게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글쓰기'(15쪽)라고 평가한다. 

저자의 문화비평은 대개 신문지면을 통해서 공개되었으는데, 그런 특징을 반영하듯 100개의 꼭지에 달하는 글들은 3~4쪽의 짧은 내용이다. 하지만 기고된 글이 그렇듯 길이와 상관이없이 각각의 글이 수미일관하고, 완결된 논지의 형태를 지니고 있느니 가볍게 볼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표제들을 죽 읽어보면, 10년 상간의 일들이 기억의 뒤편에서 톡톡 튀어나오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4.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맘에 드는 글을 '강준만을 위하여'와 '신세경, 송두율, 쌍용자동차', 그리고 '마빡이, 근대적 노동에 대한 조롱'이다. 나는 각각에서 저자의 태도, 방법, 입장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준만을 위하여'에서 저자는, '움직이는 진정성'에 대해 언급한다. 90년대 자유주의의 급진성을 보여주었던 강준만이 끝끝내 자신이 지켜왔던 자유주의에 의해 무시되는 현실에서, 진정성이 위기에 처한 현실을 읽어 낸다. 하지만, 저자는 강준만이 주목한 진정성을 '인물에 매몰됨으로써,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진정성의 범주로만 인물을 봄으로써 강준만은 윤리적 차원을 떠나서 작동하는 구조적 지형도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88쪽)고 말한다. 저자가 말한 강준만의 동맹 중 장졸에 불과했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저자의 지적은 정확하다. 강준만이 '인물과 사상'에 주목했다면, 이택광은 '구조와 문화'에 주목하는 것이고 나름대로 강준만의 자장 속에서 '반인간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신세경, 송두율, 쌍용자동차'는 어떻게 대중이 익수한 주제에서 점점 낯선 주제로 오버랩핑해가는지 보여주는 글이다. '보이지 않는자', '몫이 없는자'로서 신세경이 처한 위치, 그리고 달성할 수 없는 욕망이 어떻게 비극으로 달려가는지를 신세경, 송두율, 쌍용자동차라는 문화적 키워드로 직조해낸다.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발언권이 없는 이들을 계속해서 침묵케 하는 통치이고 "이 통치의 기술은 신세경과 송두율 교수, 그리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를 외부자로 만들어버리는 현실의 논리 그 자체인 것"(196쪽 )이다. 아마도 송두율과 쌍용자동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신세경을 알고 있었다면, 저자가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역으로 송두율과 쌍용자동차를 알고 있지만 신세경을 모르는 이는, 왜 당시 대중들이 신세경이라는 극중 인물에 대해 몰입했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저자는 상이한 문화적 주체들이 '공진화'하고 있는 구조를 해명함으로써 일종의 '감정의 공시성'을 짚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마빡이, 근대적 노동에 대한 조롱'은 벤야민이 인용한 역사의 천사처럼 뒤돌아 있는 저자를 떠올리게 한다. 저자에 따르면, 개그의 한 형식으로 마빡이는 새로울 것이 없는'재 브랜드화'의 성과이다. 하지만, 과거와 다르게 마빡이의 개그를 보고 웃는 것은 어쩌구니 없는 행위에 대한 웃음이 아니라 '조롱'이라고 분석한다. 우리를 웃기는 것은 이렇게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노동의 구조에 대처하지 못하는 출연자의 무기력이기 때문에 그 웃음은 "조롱"(263쪽)이다. 참 가슴아픈 분석인데, 신경제니 혁신이니 하는 사회분위기에서 소위 근대적 노동행위가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분석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창조성이라는 새로운 축적 패러다임을 위한 노력의 반작용으로서 근대적 노동에 대한 조롱이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아마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겪는 변화가 대개 이런 식의 토대를 무너뜨려가면서 집을 짓는 어쩌구니 없는 행위라는 조소가 아닐까.  

 5. 

이 책을 읽다보면 참 많은 생각을 하게된다. 평론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다른 장르처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인물의 인용으로 기를 죽이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좀 하면 대강이라도 알 수 있는 사회이슈로 풀어내는 글을 통해서 보지못했던 것을 보게끔 해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 "그것이 문화비평이다"라고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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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참, 이래저래 회색빛 나날을 살고 있다. 제주도에 태풍이 올라오고 하루에 300밀리가 넘는 비가 쏟아지고.... 서울 하늘에도 다시금 비가 내리고 있다. 

그리고 주민투표, 헌정사상 최초로 주민들의 청원에 의해 발의된 직접민주주의의 한 제도적 형태를 보면서 사실은 사건이 됨으로서 그 본래의 의미를 갖추게 된다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래 저래, 이번 여름은 꽤나 눅눅하고 오히려 이열치열이랄까 왠지 묵직한 책들에게 눈이 갔다. 

2. 

첫번째 책과 두번째 책은 좀 무겁다. 하지만 이런 책들이 '선택' 될 수 있는 생물학적 기간이 짧을 것이기 때문에 마치 종 보호에 나서는 환경운동가와 같은 마음으로 찜해 둔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 

우리는 이상한 고전의 복귀를 목도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칼 슈미트의 귀환이 대표적이다. 

누가봐도 민주주의적 법사상과 거리가 먼, 그의 독재관과 대의민주주의관에서 무언가 계기를 찾겠다며 나서는 사상가들의 무당파성이라니... 

그런면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기대어 근대의 법체계 역사를 되짚어보는 블로흐의 저작은 충분히 '카운터 헤게모니'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우리에겐 유토피아의 철학자로 알려진 그가 과거에서부터 당대까지의 주요한 법철학을 살펴봄으로써, 법을 통해서 이상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얼마나 한계지워진 것인지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법 이전/이후에 존재하는 인간 자체의 도덕률이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리링의 논어, 세번 찟다]  

 

고전이 무색 무취의 경전이 되면, 그 자체로 역사적 폭력성을 갖게 된다. 예수라는 이방인이 100년 전만 해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았던 이 땅에 각종 '땅 밟기'라는 형태의 무속형 신앙운동이 벌어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공자가 스스로를 칭하며 말했던 상가집 개라는 표현을, 그대로 논어 자체에게 돌려주었다는 이유로 논쟁이 된 이 책은 '살아있는 고전'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교본이다. 종으로 횡으로 논어를 찟어내면서 중국사회의 '고전열풍'이 보여주는 역설을 짚어내는 그의 필력이 궁금하다. 

 

3. 

다음은 책의 내용을 넘어서는, 희귀종의 보호 차원에서다. 이런 시도는 충분히 높은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보는 입장인데 엄숙한 분위기 탓인지 조금만 '사짜' 냄새가 나도 진정성을 의심한다.  유쾌하지 않는 철학이 세상에 스며들 수가 있겠는가. 

 

[도올의 중용한글역주] 

 

어쩌면, 금세기에 일가를 이룰 수 있는 토종 사상가 중 한명이 도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생각을, 당대에 함께 생존하면서 알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까지는 아니어도 다행스러운 경험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4. 

마지막으로는 저항이라는 키워드다. 약간은 이상한 조합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조합이 지금 이 시점에서 택할 수 있는 저항의 두 측면이라고 본다. 

 

[박홍규의 이반 일리히 평전]   

   

아마 서구 사상가나 이론의 토착화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영남대 법과 교수인 박홍규는 참 비범한 사람이다. 초기 에드워드 사이드의 글을 번역하더니, 윌리암 모리스에 대한 글을 써내고 아렌트니 토크빌이니 하는 책을 내더니 뜬금없이 멈포드 평전을 써내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꾸준하게 저자가 언급한 사상가는 아마도 이반 일리히일 것이다. 저자가 추구한 교육의 가치와 아니키즘적인 사회사상은 일리히의 가치관과 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이반 일리히에 대한 평전이 나온다면 당연히 박홍규일 것이라 생각했고, 당연히 그 이기에 이 평전이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전환의 세기에 이반 일리히를 불러낸 저자가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낼 것인가. 벌써 부터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제국주의와 국제정치경제] 

 

이 사람은 꽤나 한국 방문이 잦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함께 하는 국제 사회운동 조직의 한국지부가 매년 행사를 주최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의 방문에 맞춰 신간이 소개되었다. 

국제사회주의자이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원이기도 하고 영국 요크대 교수였다가 지금은 킹스칼리지로 옮긴 사회학자이기도 한 캘리니코스가 그 사람이다. 통상 맑스주의 학자라고 하면, 맑스의 인용에서 시작해서 맑스의 인용으로 끝을 낼 것 같은 훈고학자 이미지이지만, 캘리니코스는 우파 전통에도 해박할 뿐만 아니라 앤소니 기든스와 같은 중도파 학자들과도 교분을 과시하는 전방위적 학자다. 

또한 영국적 전통에서 네그리류의 자율주의적 사회운동에 대항하는 정통파 운동가이기도 하다. 이 사람의 해법이 어떤 것이든 고루할 것이라거나 근거없이 편향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안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저작 중 대다수가 국내에 번역되어 왔다는 것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5. 

이제 다음 달 신간 소개를 쓰면, 가을 바람이 소솔하게 불어올 것이다. 한 계절의 중간에 다음 계절에 대한 기대를 품게 된다는 것.. 왠지 나이들었다는 뜻인것 같아 쓸쓸하다. 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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