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의 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통제되지 않는 지성만큼 공포스러운 것이 있을까. 고국에서 버려져 스위스-프랑스-영국을 오갔던 루소의 행적을 보면, 흡사 예수의 고난이 떠오를 정도다. 그런데 이 책은 루소의 고난을 정조준한 책은 아니다. 이 책을 보면 루소의 처지가 참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 책을 탄생하게 만든 배경은 아니다.


이 책의 리뷰에 앞서 필요한 것은, 왜 지금 '루소와 흄'이냐는 질문일텐데 아무래도 해답은 이 책의 저자들이 보여준 전작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왜?>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그들의 전작 역시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짧은 논쟁을 모티브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꽤나 흥미로운 책이었고, 이 책 <루소의 개>는 그런 전작과의 모티브와 유사하다. 


이야기로 들어가보면, 자기 신념이 강하고 결벽증이 강한 루소는 자신이 시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고향에서도 쫒겨나 스위스의 구석 지방에 정착한다. 하지만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시혜를 거부했던 그는, 스스로 고난을 자초한다. 이를테면, 흄과 루소가 최초로 갈등한 마차의 사례를 보자. 너무나 한적한 곳이어서 마차를 이용할 경우 왕복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곳인데 루소의 후원자가 그를 위해 마차를 보내며 그냥 보내면 분명 타지 않을 것이 확실하여, 편도값만 미리 내고 루소로부터 편도의 비용만 받도록 했다. 그런데 루소가 이 사실을 눈치챈다. 그러면서, 의심은 흄으로까지 확장되어, 흄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기만했다는 의심을 하게되는 상황에 처한다. 이쯤되면, 루소는 누구에게나 민폐를 끼치는 독특한 인간형이라 할 만하다. 


이 책 <루소의 개>는 사실 어떻게 영미권의 합리주의가 루소류의 자연주의를 가두는데 실패하는지를 보여주는 우화소설같기도 하다. 즉, 흄이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하는 합리주의와 교양은, 루소가 보여주는 기행과 고집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합의주의의 그물은 자연인인 루소를 가두기엔 역부족이었다는 말이다. 


철학적 담론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 두 사람은 종교, 인간 본성, 선한 삶, 정치, 경제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 했다. 하지만 진정 그들을 갈라놓고 떨어뜨려 놓은 것은 지식으로서 그들의 특성이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217쪽


이런 지식에 대한 태도를 보면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정명훈' 논쟁이 떠오른다. 서울시향의 지휘자인 정명훈은 20억원이 넘는 서울시 지원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온통 특혜성이었던 것이다. 논란이 되자, 진중권은 예술에 대한 투자에 대해 지원예산의 많고 적음으로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논평했다. 그 과정에서 지난 2008년 국립무용단 해체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다시 재론되었다. <뼈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의 저자 목수정은, 당시 파리에 있던 정명훈에게 무용단 조합원들의 의견을 담은 전단을 전달하기 위해 정명훈이 있던 공연장을 방문한다. 시간은 밤 10시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정명훈은 이를 거절했고 이에 대한 논란이 야기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논란이, 스스로도 파리 예술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았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국내 예술인들의 처지에 눈을 돌리지 못한 정명훈이 아니라 밤 10시라는 시간에 예의가 없게도 정명훈을 찾아간 행위와 예술가에게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주장으로 번졌다. 


재미있는 것은, 스스로 미학자라 말하는 진중권은, 스스로 보였던 정치적 당파성이 무색하게도 예술 지상주의로 숨어든 반면에, 스스로 운동권의 논리에 답답함을 느껴 진보정당의 연구원 자리를 벗어난 목수정은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당파성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예의없는 해고에 저항하는 싸움에 예의를 들먹이는 것은 전형적으로 루소를 공격했던 당시 프랑스 사교계의 특징과 닮았다. 이런 차이는 아무래도 진중권이 자신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상아탑에 머물고 있는 지식인의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목수정은 당파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터박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루소가 평생 함께했던, 그래서 연인이기도 했던 이의 매력은 원시성이었다. 세상이 잘난 시대에 가장 원시적인 행태는 자본과 권력의 공격 아래에서 나타난다. 진중권의 정명훈 옹호가 고까웠던 이유는 그가 그렇게 강조하고자 하는 예술의 자율성과는 별개로, 정명훈의 서울시향이 사실상 세종문화회관의 법인화를 위해 도입된 것이며, 환경파괴논란이 벌어진 한강예술섬 역시 정명훈의 서울시향을 위한 전용공간을 위해 구상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 때문이다. 


아무래도 루소에 대한 흄과 웰풀의 '공작'을 보면서, '뭐 이렇게까지 하나' 싶다. 하지만 이를 당시 지식계의 허영과 신분제가 이뤄놓은 서구 근대의 합리주의가 체계적으로 식민화한 자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이 책은 단순히 역사서를 넘어서는 시사점을 준다. 결국 루소에 비해 흄이 내상을 더 많이 입게된 결말은 흥미롭다. [끝]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시광선 2020-02-29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꼭 읽고 싶게 만드는 멋진 리뷰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