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렌트읽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1.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은 1975년에 한나 아렌트가 사망한 이후 그에 대한 방대한 평전을 쓴 사람이고,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해에 또 다시 그에 대한 평전을 쓴 사람이다. 한 사람이 한 인물의 주요한 시기에 쓰여지는 평론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거의 유일한 일이 아닐까 싶다. 책의 내용에도 소개되지만, 영-브루엘은 아렌트의 수많은 제자 중 수제자로 꼽히는 2명 중 한명이다.  

2. 

흥미롭게도, 영-브루엘의 아렌트에 대한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2007년과 2011년이다. 원작은 20년 가까이 시차가 있지만, 90년대 후반부터 생기기 시작한 국내 아렌트 연구자들의 활동으로 인해 아렌트의 저작은 봇물 터지듯이 소개되었고, 그에 대한 2차 저작 역시 그렇다.  

3. 

이런 맥락에 놓인 이 책 <아렌트 읽기>는 'What X Matters'라는 총서의 한 권으로 출판된 것을, 독립된 책으로 번역한 것이다. 앞서의 전기가 아렌트의 생물학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책은 아렌트의 '정신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하는 그의 정신적 삶을 전기, 중기, 후기라는 대략적인 시기 구분을 통해서 살펴본다. (아쉬운 것은 통상 그가 '세계사랑'에 대한 개념을 사용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시작하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이 점은 분명한 이유가 있기에 넘어간다) 

전기, 중기, 후기 할 것없이 아렌트가 강조한 한 단어를 떠올리라면, 나는 '생각'이라는 단어가 적절할 것이라 본다. 그 만큼 아렌트는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다. 실제로 필화사건이 되어 버린, 나치전범 아이히만에 대해 그가 붙인 '악의 평범성'은 '생각없음'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의 어떤 정치체제와는 다르게 현대의 체제로서 존재하는 전체주의 역시 '생각없음'과 연결된다. 생각은 자신의 머리가 아니라 미디어나 언론, 혹은 정치지도자에게 맡기는 순간 생겨나는 정치체제가 바로 전체주의라는 것이다. 이는 극히 현대적인 정치체제인데(이에 대해 영-브루엘이 얼마나 강조하던지...), 그것은 '무지'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와는 다르게 문맹률도 낮고, 고전에 대한 교양도 높지만 생각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바로 전체주의를 특징짓기 때문이다.(전범 재판을 받던 아이히만이 칸트의 도덕률을 인용할 만큼 상식 수준은 높았다!!) 

4. 

<아렌트 읽기>를 읽으면, 난해하기 그지 없는 아렌트의 주요한 저작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를 제공받을 수 있다. 특히 <인간의 조건>과 같은 책에 대해서 그가 강조했던 '행위'가 사실상 예측불가능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해석은 꽤나 놀라웠다. 그렇게 해서 가능성의 영역으로서 정치에 대한 고민, 그리고 프랑스혁명에 대별되는 미국 혁명의 가치 등 그의 고유한 문제의식이 떠올랐다. 결국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그에 그치지 않는다. 아렌트의 현재화 혹은 '아렌트주의'라고 칭할 수 있는 방식 때문인데, 영-브루엘은 아렌트의 사상과 911테러, 그에 이은 전쟁행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과거청산과정, 동유럽의 민주화 등 아렌트 사후의 사건들을 연관시킨다. 이를 통해서 아렌트 사상에 대한 훈고학적 해석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에서의 비판적 독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영-브루엘이 한국판 서문에서 '진실과화해위원회'의 한계를 지적하고, 중동에서 일어난 잇단 혁명적 움직임에 대해 평가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동시대에 대한 관심이 이해된다(상아탑 속의 세상에서 진리를 찾는 수많은 아렌트 전문가가 아니라 이 사람이 평전을 쓴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영-브루엘은 아렌트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아렌트를 통해서 '아렌트주의'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며, 바로 이 책 <아렌트읽기>는 그 전범이 되는 책이다. 

5.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아렌트읽기>가 아니라 <아렌트를 통해 읽기>로 바뀌어야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된다. 책을 보는 과정에서 수십개의 책귀가 접혀나갔고, 많은 부분에 밑줄이 그어졌다. 최근에 본 어떤 책보다 많은 영감을 준 책이다(필멸성과 불멸성 사이에서 나타나는 행위의 영웅적 측면, 그리고 용서와 약속의 의미...). 더구나 아렌트 전문가가 번역한 책은 꽤나 잘 읽힌다. 모처럼, 짜릿했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