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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불평등 - 시간의 자유는 어떻게 특권이 되었나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 창비 / 2024년 12월
평점 :
가이 스탠딩은 다작이면서도 한국에 신속하게 소개되는 저자다. 통상 이런 저자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해당 저자의 입장이나 주장이 소개되는 특수한 경로나 맥락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이 스탠딩의 경우에는 '기본소득'이라는, 이제는 특정한 정치인의 브랜드 정책이라는 측면에서 회자된 탓에,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정책 프로그램의 연속이라는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론에 대한 윤리적 접근이 판 파레이스와 같은 학자들의 경향성이라면 가이 스탠딩은 좀 더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보인다. 그의 <프레카리아트>(2014, 박종철출판사)가 왜 정규고용에 의한 임금노동에 의존하는 기존 복지체제가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는지를 보여주면서 새로운 정치적 대상이나 주체가 새롭게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뒤이은 <불로소득 자본주의>(2019, 여문책)와 <공유지의 약탈>(2021, 창비)은 새롭게 갱신하고자 하는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자산의 재분배'라는 측면에서 공유부라는 새로운 재원 구조를 모색하는 방향성을 보여준다.
최근에 번역된 <시간불평등>(2025, 창비)은 코로나19라는 위기를 경유하면서 더 급진적으로 기존 임금노동 체제를 해체하기 위한 시도다. 1장 고대의 시간에서 4장 제3의 시간은 사실 임금노동의 주류화를 시간통제의 관점에서 정리한 역사적 문헌에 가깝다면, 6장은 코로나19의 조건이 견고하다고 가정했던 고용에 기반한 노동구조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가 되고 7장은 공유지에 근거한 기본소득론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8장에서는 가상의 미래소설을 통해서 저성장과 돌봄이 기본적인 테마가 되는 영국 사회를 그린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미덕은 두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시간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노동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인류학적 접근들이다. 고대 그리스의 일-활동의 구분과 휴식과 여가의 구분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윤리가 어떻게 활동의 시간을 격리하고 여가를 단지 재생산을 위한 휴식으로만 전유하게 되었는지를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둘째, 커먼즈에 기반한 공유부 기본소득론이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상상이다. 프레카리아트의 등장이나 자산기반의 자본주의의 등장이라는 상황에서 어떻게 공유부 방식의 기본소득과 이를 통하여 노동에서 벗어나 활동으로서의 삶으로 이어질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교양으로서의 미덕을 넘어서지 못한다. 우선 인류학적 접근의 타당성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의 자유시민들이 갖는 덕목을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 즉 현재의 노동주의에서 벗어나 추구해야 하는 어떤 지향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자유시민은 여성과 노예의 노동에 근거하고 있고 있는 단지 "성차별주의와 노예제 때문에 실패했다"(46쪽)고 말할 것이 아니다. 이런 특징은 고대의 시간에 대한 설명에서도 나타난다. 인류학적 사례는 현재 익숙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다른 과거를 보여줌으로서 강력한 환기성을 지니지만 그것이 현재에 어떤 모습으로 실현될 지는 새로운 구상의 영역일 뿐이다. 과거에도 가능했으니 현재에도 가능할 것이라는 논리는 과학적이지도 않고 실천적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저자는 일관되게 현대의 노동 구조를 노동주의라는 말로 포괄해서 설명한다. 그러다보니 자본가의 노동이나 이에 저항하는 노동운동의 노동이 모두 사실은 '노동주의에 기반한 협력자'라는 인식이 전제된다. 이런 입장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이 중심적인 정치 계급이 되는 것이 바로 생산과정에서의 노동 착취가 가장 핵심적이기 때문이라는 맥락을 지운다. 오히려 70년대를 지나 80년대에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재편이라는 것을 복합적으로 접근하는데 한계를 보인다. 저자의 입장에 따르면 현재의 불평등은 노동과 자본 간의 노동주의를 둘러싼 합의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된다. 그런데 이게 맞나?
마지막으로 정치적 대안으로서 말하는 공유부 중심의 기본소득론은 (기존의 노동구조를 지지하는 실업부조와 노동연계복지체계의 폐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맥락에 대한 논의를 별개로 하더라도) 한계가 뚜렷하다. 공유부는 기본적으로 토지 등 핵심적인 자산의 국가소유를 전제로 한다. 한국은 국유지가 25% 정도, 지방자치단체 소유의 공유지가 8% 수준인데, 이들 중 대다수는 국립공원이나 녹지 등과 같이 애당초 영리적 사용이 되지 않는 땅이다(국유지를 놓고 보면 임야가 66%, 도로, 하천 등이 24%에 달한다). 싱가포르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가용토지의 상당수는 이미 사유화되어 있다. 공유부 획득이 가능한 땅의 확보를 논외로 하더라도 그 공유부를 납부해야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해당 토지를 영리적으로 사용하는 기업 등일 것이다. 기업이 더 비싸게 공유지를 사용해야만 기본소득으로 분배할 수 있는 재원이 커진다. 저자는 이를 자산기반 자본주의에서 자산기반 사회주의라고 손쉽게 말하지만 애당초 '자산기반'이라는 것은 이윤을 추출하는 형식이다. 이걸 자본주의적으로 하는 것과 사회주의적으로 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오히려 자산기반의 잉여가치 축출을 없애는 것이 성장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포함해 저자의 지난 저작들은 모두 최초의 기본소득론을 다른 맥락에서 변주하는 하나의 앤솔로지에 가깝다. 시간이 갈수록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줄어들고 대신 현재의 '노동'을 손쉽게 버리면서 이미 비판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중 노동구조론'을 반복하는 것은 기본소득론이 과연 대안체제를 위한 수단으로 적절한 것인가라는 싶다. 분명 인간의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시작된 기본소득론이 수단의 지위에서 목적이라는 위치로 변화하면서 정치적 지향의 관점에서는 모호함이 커지고 있다(단지 가이 스탠딩이 반복적으로 주커버그 등의 실리콘 밸리 기업가들의 이야기로 기본소득론의 범용성을 강조하는 한계 뿐만 아니라, 한국의 기본소득 정치가 지난 총선에서 위성정당 방식의 연합을 형성한 것이나, 아니면 최근 대표적인 기본소득 정치인이 기본소득 정책을 포기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등의 현상을 보라.)
이 책의 미덕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답을 구한다는 측면에 있지 않다. 오히려 현실적인 측면에서 기본소득론에 대한 관심이 있고 그것의 논거를 찬 혹은 반의 관점에서 협력적/대결적으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상당히 긴장감 넘치는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는 미덕이 크다. 그외 시간에 대한 인류학 문헌의 체계적인 정리는 분명히 매력적인 서술이다. 즉 노동 시간의 계보학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공을 들여서 정리를 했다. 그 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상당한 레퍼런스의 목록을 확보할 수 있다.
이 다작의 작가는 올해 dunbed down이라는 책을 또 출간할 예정이다. '멍청해졌다'는 뉘앙스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인데, <프레카리아트>라는 책에서 고등교육의 수준이 단순히 학위를 따기 위한 과정으로 전락한 상황을 비판하기 위해 "멍청해진 노동자들을 위한 멍청한 학위"라는 말을 할 때 사용된 표현이다. 해당 책도 번역되길 기대한다. [끝]
*이 서평은 출판사 '창비'에서 서평단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것입니다.
말 그리고 말과 연관된 이미지는 둘 다 정치적 상상력을 규정하고 반영한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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