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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현실정치인인 유시민의 글로 채워졌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유시민'이 아니라 '현실정치인'이라는 부분인데, 이는 두가지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이 책이 학문적 엄밀성을 전제로하고 있지 않다는 한계를 의미하고, 다른 것은 정치적 의도가 분명히 관철되는 논의의 전개라는 점에서 그렇다. 대개 이런 책에 대해 리뷰를 할 때는 '뭐 새로운 이야기도 없네'하고 냉소하게 되거나, '오오오, 이것이야 말로 진리'라는 두가지 편향을 보이는데 양자가 사는데 도움되는 일은 별로 없다는 것이 솔직한 경험이다. 

1. 

이 책은, 공교롭게도 리뷰를 쓰는 이가 정치학 석사 나부랭이, 게다가 세부 전공이 정치이론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함량 미달이다. 개론서로 쓸만한 책은 못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을 '주장'으로서가 아니라 '사실'로서 인용할 경우 곤란을 겪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예를 들면, 36쪽의 " 홉스의 국가론과 마키아벨리의 통치술은 잘 어울리는 이론서와 매뉴얼이다. 홉스의 국가론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마키아벨리의 통치기술을 당연히 받아들인다."라는 표현을 보자. 우선 홉스의 국가론에서 신학적 국가론, 즉 국가를 유기체로 바라보는 시각과 기본적으로 공화주의적 시각에서 현실적 권력기술을 논했던 차이를 제거한다면, 즉 보이는 '이미지'에 집중한다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위 마키아벨리즘이라 불리는 현실주의적 권력관은 '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 기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히려 실천지를 강조한다는 입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관과 닿아 있다. 

그런 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근거해서 그의 국가론을 '목적론적 국가론'이라는 단정하는 것은 약간 헐겁다. 물론 국가가 선이라는 목적을 추구한다고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개개인의 덕성을 실현하는 방식으로서 그렇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군주정을 가장 훌륭한 국가형태로 보았다. 왜냐하면 국가의 '선'이라는 것은 합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탁월함'에 의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족정치는 타락할 수 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귀족정과 민주정이 결합된 폴리테이아(혼합정)을 가장 현실적인 국가의 모습으로 상정했다. 

마지막으로는 소소한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288쪽의 각주 6에는 '조선왕조실록에 인민이라는 단어가 백성이나 국민보다 많이 쓰였고, 국가라 해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지칭하는데 인민(유진오)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나서 "인민이 민주주의, 민권과 관련하여 뿌리 깊고 소중한 우리말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한림대에서 나온 <국민 인민 시민>(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103667)이라는 개념사 연구서를 보면, 조선시대에 사용된 인민 개념은 백성보다도 하위 개념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다른 나라를 침략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인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시민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인민이라는 개념은 일본을 경유해서 들어온 근대적 개념만을 의미한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 이 책은 정치적 개론서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2. 

그렇다면 정치 판플렛으로서 이 책은 어떤가. 소위 진보적 자유주의의 견지에서 '선'을 추구하는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관철된다. 글쓴이의 국가관은 "이제 자유주의 국가론의 토대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세울 때가 되었다"(207쪽)고 말한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자유로운 개개인의 연합체인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여야 하며 개개인의 더욱 큰 목적을 실현하는 -여기서는 정의가 되겠다- 수단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유시민의 정의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샌델의 것'이다. 실제로 몇 쪽 안되는 미주를 보면 유독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대한 인용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직하게 보자면, 유시민의 국가론은 샌델의 정의론에 입각한 국가론이라고 부름직하다. 

여기선 당연히 샌델의 정의론이 쟁점은 아니다. 문제는 현실정치인으로서 유시민의 선택 문제인데, 만약 작년에 히트를 친 <정의는 무엇인가>를 전제로 한 국가론의 소개가 곧 전략적인 판단, 즉 최소한 샌델을 읽은 사람은 자신의 진보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국가론에 거부감이 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쓰여졌다면 참으로 영리한 생각이다.  

게다가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니, 화룡점정이라 할 만하다(21세기에 베버가 한국사회에 회자되는 맥락이란, 정치적 현실주의를 책임윤리라는 이름으로 강요해야 하는 현재의 정치수준 밖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다).  

 문제는 이 책을 대중교양서가 아니라 정치판플렛으로 읽어야 됨에도, 그렇게 읽을 만한 내용이 사실상 별로 없다는 것이다. 각각의 주장은 권위있는 인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정확하게 어디까지가 해당 이론가의 주장인지, 혹은 저자 자신의 주장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아마 서론과 맺음말이 유일하게 정치 판플렛으로서의 솔직함이 보이는 공간이다.  

3. 

과거의 <거꾸로 보는 세계사>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골랐다면 실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시민이 말하는 진보적 자유주의가 왜 '국가'를 말하는가에 주목해서 본다면 나름 가치가 있다. 국가와 정부를 명확하게 구분하자고 주장하면서도 결국 정부를 세워 국가의 '선'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애국론인 이 책은, 어쩌면 현실추수주의의 넓은 길로 인도하는 이정표라는 생각도 든다. 

더군다나, 그는 이미 국가의 왼손으로서 참여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문제는 국가의 '선'이 수평적으로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올록볼록한 현실지형내에서 3차원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며, 그래서 결국 그 '선의 목록'에서 우선순위를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이 관건이 된다. 아무래도 그 점을 보여면, 유시민의 과거나 혹은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려야 될지도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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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돌베개, 2011] 


그가 내놓은 책은 몇 권있다. 최근까지 근거리 책장을 지키고 있는 책은 <고뇌의 원근법>과 <만남>이다. <고뇌의 원근법>을 통해서는 숨이 막혔다. 그런 비극적인 감정이라니, 마치 전쟁 중에 탈영한 병사와 같지 않은가하며 읽는 과정에서 수차례 책장을 덮었다. 솔직히 공감도 공감이거니와 명증하게 날라와 꽂히는 그의 감상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만남>에서는 트랜스네셔널한 재일조선인의 민족주의와 토종 철학자의 보편주의가 마치 역이 바뀐 배우들처럼 보여 부조리하게 보였다. 이중, 삼중의 정체성이 더욱 사유 사이의 좁은 길로 이끌었을 터이지만 이상하게도 김상봉 교수의 측에서 그들의 대화를 읽게 되었다.


아직도 방황하는 정체성, 재일조선인 
 


<언어의 감옥에서>는 그가 2005년 이후에 발표한 평론들이 모여있다. 특히 이 책에서 제일 관심을 끄는 부분은 재일조선인 학자인 그가 한국에 교환교수로 재직한 경험이 벼려놓은 그의 정체성에 대한 심화된 고민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렌즈로 바라본 일본과 한국의 '사이비 평화주의자'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그의 글은 괴로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 그 좁은 길은 울퉁불퉁했으며 많은 '평화주의자'들이 그려주는 네모반듯한 대로에 비해 다니기 불편했으나, 오히려 그래서 그가 보여주는 길이 더욱 리얼했음을 인정한다. 이는 나 스스로 쉽게 과거로 떠내려보낸 깊지 않은 고민들을 다시금 꺼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태면, "나에게 모어는 일본어다."(35쪽)라고 시작하는 글을 보자. 피해자의 상황을 가해자의 언어로 밖에는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모순이란, 그리고 그가 가해자의 언어를 통해서 형성되는 피해자의 정체성이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을 만틈 아득하다.

그래서 그는 모어와 모국어가 같은 언어 다수자에서 벗어나 비모어인 조선어를 아무리 잘해도 끝내 마음이 편해질 수 없는 상황(41쪽)에 처한다. 이런 상황은 독일계 유대인으로 자신의 민족을 학살한 가해자의 언어로 밖에는 시를 쓸 수 밖에 없었던 첼란, 아메리, 그리고 이탈리어어가 모어였던 레비의 사례와 오버랩 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서경식이 예를 든 이 세명의 이방인은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문명의 힘이 커질 수록 안에서 터질 수 밖에 없는 이방인의 고통이라는 것이 도대체 이해할 수가 있는가? 그는 해법으로 모국어의 권리와 함께 모어의 권리를 인정하자는 주장을 한다. "본래 모국어의 권리와 모어의 권리는 서로 간에 배제하는 개념이 아니라 양립 가능한 개념인 것이다."(73쪽)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경험을 가진 우리의 역사에서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더 이상 낯선 경험이 아니다. 즉, 앙상한 국어 내셔널리즘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600만명이 넘는, 한국어가 아닌 모어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을 포괄하자는 주장이다. 
 


피해자라는 좁은 길로 안내하는 이정표

이 정도라면, 서경식이 단순히 언어 다원주의를 새롭게 만들어져야 할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제안한 것에서 끝난 것이라면 가볍게 지나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이는 특수의 문턱에 선 보편자의 일면에 불과하다.

<언어의 감옥에서>에 쓰인 윤동주의 '서시' 번역을 둘러싼 갈등(1장), 가해자인 일본에서 오히려 상찬되는 재일 조선인의 소설에 대한 복잡한 감정(3장)과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이라는 문제(11, 12, 13장)와 어설픈 한국 평화주의자의 과거해석에 대한 불편한 심정(14장)으로 나아가면 서경식이 제기하는 분절된 정체성의 모습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목전으로 치고 나온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윤동주의 '서시' 중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에 대한 소위 일본 정전의 번역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로 번역되었다. 서경식은 이런 번역의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없애고 윤동주를 공평무사한 평화주의자이자 박애주의자로 만들어 버리는 '의도'를 따지고 든다. 이에 대한 논란에서 번역자가 근거로 내세우는 이가 바로 문익환 목사이다. "그것을 그의 저항정신이라 부르는 거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결코 원수를 미워하는 것일 수는 없었다."(26쪽)이라는 말이 그렇다.

피해자의 말을 가해자가 가져와 정당화하는 이런 아찔한 보편주의는 서경식이라는 이방인이 없다면 도저히 문제시 될 수 없는 날 것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조국으로 불려들여진 재일조선인 작가 이양지의 글에 대한 서경식의 반발을 보자. 이양지는 '광주사건'이 한창일 때(81쪽) 한국에 있었으며 이 때 그녀는 가야금과 판소리를 배웠다. 일본에서는 국내 민주화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재일조선인 그룹에 대한 냉소를 보였던 그이다. 그녀의 비판은 이렇다.

   
  "한국어를 읽고 쓰지도 못하고 모국인 한국 사람들의 생활 실태도 모르면서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 '연대'를 말하고 '반체제'를 호소할 수 있는가."(80쪽)  
   

 

이에 대한 서경식의 대꾸는 이렇다.

   
  "입으로만 우리나라를 논하고 혁명을 부르짓는 사람들에 대한 이양자의 비판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그녀 자신이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목표로 살겠다는 방향성이 있을 때일 것이다."(85쪽)
 
   


무슨 차이일까. 나는 이 점에서 비판의 윤리성을 발견한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윤리학의 유물론일 것이다. 맥락에서 보면 이양지의 비판은 그리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서경식의 존재로 인하여 이양지의 비판은 힘을 잃는다. 그것은 글의 물질성을 보여주는 비판의 '육화'이다.

좀더 비근한 예로는, 일군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강화된 근대화론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박정희의 독재에 대해 경제발전과 질식된 민주주의를 면도칼로 도려내는 일군의 지식인도 그렇다.

여기서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인의 책임 문제로 나가보자. 서경식은 1997년에 있었던 일본 내 양심적 지식인들에 의해 조직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심포지엄을 평가하면서, 두 가지 논점을 정리한다. 즉, 위안부문제를 식민지 지배의 틀로 보면 조선인 '위안부'가 아닌 일본인 '위안부'는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게는가라는 것이 첫번째다. 그리고 현재의 양심적인 일본들이 가해자의 자식으로서 피해자의 자매로서 보이는 이중성에 대한 것이다(247쪽).

이 중에서 서경식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두번재 태도다. 서경식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의 자손들이 피해 당사자에게 느끼는 연대의 '수평성'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렌트를 끌어와 구분하는 '죄'와 '책임'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250쪽).

서경식은 죄는 당대의 가해자 개인이 지는 것이지만, 책임은 집단이 지고 그것은 그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후손들까지 포괄한다. 이런 불편함은, 평소 동경하던 프랑스에 방문하면서 들른 한 베트남 음식점 주인이 '일본인이냐'고 묻는 말에 답을 못하는 서경식의 민감함과 닿아 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음식점 주인은 의례적인 미소를 띠고 있지만, 내가 '코레안'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의 눈은 어떤 빛을 띠게 될까?"(184쪽)
 
   


현재 우리나라의 전근대적인 기업이 베트남에서 경제성장에 도움을 준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제2의 식민지'를 강요하고 있는 우리는, 과연 베트남인들에게 이런 예민함을 보인 적이 있던가. 외화 획득이라는 명목으로 파병된 우리 국군에 대해서는 영웅으로 칭하면서도, 우리의 삶과는 무관했던 수많은 베트남인의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우리는, 정말 일본인들의 극우주의를 비판할 자격이나 있는 것인지 자문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어이없음은 사실 우리나라의 사이비 평화주의자들에게도 발견된다. 
 


누가 용서하는가

사실 개인적으로 <언어의 감옥에서> 중, 가장 중요하게 다가온 글은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이라는 장이다. 특히 일본의 '아사히 신문'이 주최하는 오사라기 지로논단상을 받기까지한, 박유하의 <화해를 위해서>가 그렇다. 내가 서경식을 알기 전에 박유하의 책을 알았더라면, 그의 유려한 논변에 넘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일본을 만들려는 사람들, 소위 '양심적 지식인'들과 시민들을 낳은 것 역시 다름 아닌 전후 일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한, 그리고 그들이 아직 다수인 것은 분명한 이상, 일본이 전후에 지향했던 '새로운' 일본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는 '반성없는 일본'이라는 대전제는 재고될 필요가 있다."(335쪽)

아마도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은 전후 한일간의 새로운 관계 모색이라는 대전제에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최초의 민주정부로 등장한 김대중 정부가 '화해의 역사'를 청할 때 느낀 것은 일종의 역사적 진보였을 것이며 소란스러운 일본의 한류열풍은 일말의 문화적 열등감을 완전히 극복시킨 사례로 느껴 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서경식은 박유하가 <화해를 위해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우리'라는 논법을 명확하게 도려낸다. 이는 일본어 번역이 '한국'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가능하다.

   
  "원래 우리와 한국은 등식으로 이을 수 없는 것인데, 일본을 잘 알고 일본어도 잘한다고 자임하는 저자이니 이 번역어는 충분한 숙고를 거쳐 사용한 것이이라. 그러나 이 점에 박유하식 레토릭의 비밀이 숨어 있다."(339쪽)
 
   


이를 테면 박유하는 불평등하긴 했어도 한일합방이 '법적으로 유효하다'고 강조하고 불완전한 한일협정 역시 '우리의 잘못'이니 이를 재개정하자는 것은 우리의 '자기 비판과 책임의식'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식이다. 이런 입장바꿔보기는 그가 상정하는 '우리' 안에서는 충분히 경청할 만하지만 이를 가해자의 언어로 번역 출간할 때는 전혀 다르게 읽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다시 말해, 그런 박유하의 논법을 쫒아가게 되면 우리는 식민지 가해자인 일본이나 일본 국민에게 비판을 가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단계론은 결과적으로 가해자의 책임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박유하와 같은 평화주의는 그가 원하지 않다 하더라도 가해자의 감성과 연대를 하게 되고, 오히려 정신대 할머니와 같은 피해자를 적대시하게 된다.  

 

언어의 감옥에서
 

서경식의 글에서 볼 수 있는 선명함은 재일조선인 일반이 공유하는 공통의 감정이 아닐 수 도 있겠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민감한 글쓰기가 우리 스스로 둘러쌓여 있는 언어의 감옥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그에 비추어 보면 우리 모두 언어라는 감옥의 '수인'인 셈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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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트 러셀, 비아북, 2011] 



이 사람은 노벨상 수상자로, 논리를 표상하는 수단에 불과했던 수학과 기호를 바탕으로 오히려 논리학을 철학으로부터 분리시킨 수리논리학자이며 캠브리지대학의 교수였고, 양차 세계대전의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파격적인 성윤리관을 피력했다는 이유로 미국에서의 강연이 취소되는 것을 물론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쓰고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는 이유로 벌금과 수감형을 받기도 했으며, 불확정성의 세계로 자신이 구축한 논리학이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과 미소 양 강대국에 의한 핵경쟁으로 우리 인류의 삶 자체도 그렇게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한 '비관론자'이기도 하다.

인생은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것은 앞서 언급한 단 하나의 사항만으로도 충분하다. 즉, 노벨상 하나로도 평범한 사람에겐 하나의 세계이며, 앞서가는 성윤리관으로 전국적인 논란에 휩싸였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세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러셀은 그렇게 다양한 삶들로 콜라주된 삶을 살았으며, 결국 그가 구축한 것은 노벨상을 받은 이도, 선구적인 성윤리관을 지닌 이도 아닌 '러셀이라는 개인'이었으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 세계를 구축하는데 하나의 위성에 불과하게 만들었다. 장황하지만 러셀을 짧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그의 대표작을 한 두권 권해줌으로서 그의 생각을 보여줄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보편성을 지닌 문장의 힘 
 


개인적으로 잠언격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글은 하나의 단어나 의미소로 분해될 수 없는 총체적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맥락을 무시한 인용은 원저작자와 무관한 하나의 '리믹스'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러셀의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비아북, 2011) 역시 한계는 명백하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가지는 미덕은 분명히 있는데 그것은 비아북이라는 출판사가 러셀의 다른 책인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를 내놓은 곳이며, 더우기 원 저자인 러셀에 의해 감수가 진행된 발췌본이라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러셀의 글이 보여주는 보편성 자체가 발췌본의 한계를 충분히 뛰어 넘고 있다. 어쩌면 평생 분야를 한정하지 않고 70여권의 책을 내놓은 이의 종합적인 시각을 살펴보는데 유일한 방법이면서도, 러셀이라는 개인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데도 유일한 방법은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와 같은 발췌 밖에는 없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정치, 심리, 종교, 교육, 성과 결혼, 윤리라는 6가지 영역에 대한 글을 그의 전체 저작에서 가려 뽑아놓은 이 책은, "지금 이 세계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온정과 너그러움이고,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은 대다수의 인류를 부도덕하다고 규탄하는 가혹하고 독단적인 도덕이다."(5쪽)라는 러셀의 서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다수의 복잡한 현실을 보는데 하나의 나침반'들을' 무수히 꺼내놓는다.

이를테면,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이고 정의로운 결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현실의 때를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길인지와 같은 것따위 말이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여성의 투표권을 막기 위해서 흔히 동원되던 반론 중 하나가 여성은 평화주의적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세계대전 중에 여성들은 이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대대적으로 입증했으며, 피비린내 나는 활동에 참여한 대가로 투표권을 인정받았다."(40쪽)  
   

 

러셀은 당대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여성의 참정권 보장을 주장했던 이다. 따라서 그는 참정권 부여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발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정의한 타협의 산물인지 지적한다. 이를 확장하면, 제한적인 투표권이 전체 남성 국민으로 확장된 때도 전국민적인 동원이 필요해진 1차세계 대전 직전이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영국의 여성참정론자, 팽크허스트. 그녀의 여성참정권 운동은 1차세계대전의 찬성과 군수물자 제조에의 노력동원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우리가 구축한 현대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 세계 자체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도록 만드는 모순을 지적한다. 다음의 사례를 보라.

미국의 고위급 핵 전문가가 말했다. '방사능이 없는' 폭탄 제조법을 발견했으며 이는 인도주의적 동기에 의한 것이라고. 러셀은 이에 소련에도 알려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는 그런 행위가 불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러셀은 개탄한다.(50쪽) 결론적으로 그는 소련인들의 목숨만 구하고 싶어하고 미국인들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다고 말이다.

사용되지 않고 단순히 억지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무기가 실상 적국보다는 자국민에게 더욱 위험이 된다는 모순을 단적으로 꼬집는다.

이를테면 다음의 구절은 일본 핵발전소 붕괴 이후에도 끊임없이 '안전'만을 외치고 있는 우리나라 핵물리학자에게 던져줄 법한 말이다. 새로운 국면이 발생하면 의견이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인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내 의견이 바뀌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1900년에 활동을 시작한 물리학자가 50년 동안 한 번도 자기 의견이 바뀌지 않은 것을 자랑할 수 있을까?"(135쪽)

 
   

 

대화의 방식으로서 유머, 확실성을 향한 풍자 
 


사실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를 각각의 문장이 놓인 시대적 배경과 떼어 놓고 이해하기 힘들고, 무엇보다 러셀의 유머가 전체적으로 다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유효한 어떤 문제에 대한 글을 보면, 당대에 그의 글이 가진 불편함을 가늠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젊은 교수들에게는 첫 번쩨 저술은 몇몇 박학한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도록 어렵게 쓸 것을 권한다. 한 번 그렇게 하고 나면 그 후에는 언제나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투로 쓸 수 있다."(156쪽)
 
   


는 경우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굉장히 실용적인 제안일텐데, 역설적으로 지금도 어렵게 '밖에' 글을 쓰지 못하는 학자들의 한계를 꼬집는다. 즉, 여전히 몇몇 박학한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도록은 쓰지 못하는 주제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를 보자.

"언젠가 신문에 내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나는 증거를 세심히 검토해본 후에 그것은 잘못된 기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주장이 먼저 나오고 증거가 나중에 나올 때는 주장과 증거를 대조하는 등의 '확인' 과정이 따른다."(83쪽)

이런 상황은 "선교사들은 버트런트 러셀 씨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라도 용사받을 수 있을 것이다."(125쪽)라는 어느 선교회 신문에 실린 러셀의 부고문과 함께 읽을 때 그 유머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그것은 확실성에 대한 신념이다. 러셀은 자신이 즉각적으로 오류를 밝혀 낼 수 있는 '그의 부고'를 앞에 두고도 '확인' 작업을 했다는 말이다.

   
  "어렵고 희귀하다는 이유로 명확성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입장에 대한 거부감이 바로 내가 하는 모든 철학적 활동의 가장 근본적인 충동이다."(206쪽)

 
   

이와 같이 러셀의 유머와 재치는 그의 삶을 밀고 가는 하나의 원칙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확실함과 명확함이다. 유머는 그가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악세사리가 아니라 그와 같은 부조리를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맨얼굴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마지막을 제시하지 않았다. 마치 원천적인 질문에 붕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수학을 통한 논리학의 성채를 구축했듯이 말이다. 러셀의 책을 마무리하면서, 어떤 사상이나 이념도 그 자체로 완결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의 일화를 던져놓고 같이 고민하길 청한다.

   
  "... 이 책을 "러셀 최고의 재치, 최고의 지혜, 최고의 풍자를 모은 결정판"이라고 소개하면 어떻겠느냐 ... "결정판이라는 말이 좀 꺼림직합니다. 나는 아직 죽은 게 아니잖아요." 당시 그는 97세였다. "(6쪽)
 
   


죽음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오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완결을 짓는 것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제나 종착점은 다음 세대에 의해 밀려나야 하며, 러셀이 보여주는 것은 그런 삶의 방식이다. 이 책의 미덕은, 마치 매직아이처럼, 각각의 문장이 희미해질 수도록 러셀이라는 개인이 뚜렷이 떠오른다는 점일 수도 있겠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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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벌써 5월이다.  

때 늦은 봄비에도 멀쩡하던 벚꽃도 봄이 지나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떨어졌고, 몇 차례의 비와 황사, 매년 그래왔던 것처럼 봄의 신고신은 호되기만 하다.  

지난 달엔 유난히 정신이 없어서, 새책을 들여다 보지 못했다가 어제부터 쭉 살펴보니 심난한 마음에도 불끈불끈 책에 대한 욕심이 솟아난다. 

 

 이번의 첫 책은 <행복할 권리>다. 행복할 권리라니? 행복은 파랑새처럼 자신에게 이미 찾아온 행복의 찌꺼기를 모아서 만드는 것이 아니었나?  

 모두다 행복을 말할 요량으로 다른 말을 한다. 집, 대학, 돈, 결혼. 왠지 이런 것들은 권리라기 보다는 쟁취해야 할 것에 가깝고, 그래서 행복은 결핍을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만약 이 책이 그런 저런 자가발전적 교양서였다면 눈길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마이클 폴리는 이 책에서 행복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라는 구절이 없었다면 말이다. 어쩌면 행복의 파랑새를 찾는 일따윈 그만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는 파랑새를 찾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 그들과의 대화와 나의 고민들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니. 아무래도 이 책을, 봐야겠다.

 

두번째 책은 문학평론가이자 정치경제학자인 조정환의 신간이다. 우리나라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운영되는 몇 안되는 자율적인 학문공동체인 '다중지성 정원'의 대표이기도 한 저자는, 가장 최신의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변형된 자본주의의 속살을 해부한다. 

우리에게 노동은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는 작업장을 나온지 오래고, 일과 여가의 구분이 사라진지도 오래다. SNS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전통적인 공적-사적 경계의 무너짐은 무채색의 그것이라기 보다는 다양한 촉수를 가지고 있는 히드라와 같다. 

조정환은 많은 이들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려 하지 않는 변화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이 곧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는 혁명의 말이다. 

 

  

돈은 그저 대리자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알량한 지폐 뒤에는 보이지 않는 가치가 올라타 있고, 그것은 우리 부모와 나의 친구들이 흘린 땀으로 표상되는 노동의 결과라 믿었다. 

 하지만 돈이 그런 것이라면, 어떻게 그런 돈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는 걸까. 2008년 금융위기에서 반토막이 난 펀드 투자금은 어떻게 내가 열심히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질 수 있을까. 

  <돈의 본성>은 그간 돈에 대해 쓰여졌던 감상을 일거에 흔든다. 돈은 사회관계의 표상이며, 더 나아가 권력투쟁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돈은 상당히 엉성한 모래 위에 터잡고 있는 궁전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돈의 본성을 알려준다면, 돈에 대한 오해를 접고 냉정한 시선을 가져볼 수도 있겠다.

   

 

유시민이라는 '저자'는 참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가 국가를 들고 나섰다. 아무래도 현실정치인으로서 유시민이 오버랩 될 수 밖에 없다. 

이 책의 구성을 보면,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이라는 스테디셀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대학 초학년 용 교양서라면 실망이다. 하지만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다. 특히 장절의 구성을 보면 어디로 수렴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국가관의 변화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동의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별개로 칸트와 베버, 베른슈타인을 거쳐서 연합정치와 책임윤리로 귀결되는 그의 여정이 궁금하다. 과연 그는 '국가'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무엇이 보고싶었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지난 몇년간 혹독하게 모든 국민의 과학화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과학의 오염을 보았다. 가치중립적이고, 절대 진리를 추구한다는 그 과학이 얼마나 편파적일 수 있으며 어떨때에는 거짓말을 하는지도 말이다. 

<법정에 선 과학>은 과학을 우리 삶 가운데 옮겨 놓자고 주장하는 듯 하다. 과학이란 무균질의 실험실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소하게 내리는 판단에서 부터, 생사가 갈리는 법정에서까지 우리 삶의 깊숙히 들어와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과학은 과학자들에 의해서만 지켜지는 성배가 아니라, 그에 영향을 받는 이들의 참여를 통해서 더욱 풍성해질 수 있음을 말한다. 실제로 과학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어떤 '상식'을 만들어 왔을까?

 

 

이렇게 정리를 해놓고 보니, 세상엔 참 읽을 책도 읽고 싶은 책도 많구나라는 실없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아침나절 내리쬐던 봄볕이 어느덧 구름 뒤로 사라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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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서재 활동도 잘 못해온 나를 덜컥 신간평가단에 넣어준 걸 보니, 알라딘 담당자의 마음이 너그럽기도 하다^^;;몇 가지 눈에 띄는 신간을 주섬 주섬 담아본다. 이름하여, [4월의 낚시]~~!!  

참 나름대로 정한 나의 책 선정 기준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책의 맥락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책이라는 것은 사적인 대화보다는 공적인 대화를 위한 도구라는 생각이 강하고, 그런면에서 나에게 책은 그것을 선택한 출판사와 역자, 혹은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대화의 제의에 내가 기꺼이 응할 만한 책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책의 내용을 보기도 전에 고르는 신간추천은 올 곧이 내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라는 이끌림의 정도를 드러내는데 적절한 공간이다. 그렇게 해서 고른 다섯권의 책은 이렇다. 

  

1. 고진을 탐독하다  

 

가라티니 고진의 '문자와 국가'는 아마도 3월에 발간된 책들 중 단연코 눈에 띄는 책이다. '트랜스크리틱'의 후속작 격인 '세계사의 구조'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컷지만, 이 책이라도 어디냐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고진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이들 중 한명이라는 점과, 이번에 번역된 문자와 국가 역시 그런 질문이 던져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응대하고 싶은 대화의 주제는, 근대와 국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국민이 되었나, 그리고 우리는 왜 그 '주어진 것'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나라는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다. 더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느냐가 될 것이다. 

 

2. 도시에 대한 권리를 말하다 

 도시 개발을 둘러싼 욕망의 지도는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다. 때때로 우리 모두 길을 잃기도 하는 그 욕망의 길 모퉁이에 '도시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이가 있다. 앙리 르페브르의 수십년전 속삭임을, 현재의 도시 풍경에서 불러내는 이는 바로 돈 미첼이다. 

 이 책은 2003년 '도시에 대한 권리' 바로 이전에 저자가 심화시켜온 문화지리학의 단층을 보여준다. 지리학자인 그에게 도시는, 그리고 공간은 문화로 표상되는 다양한 이해관계의 경연장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사회과부도로 표상되는 교과서적인 지리학에서 벗어나 궁극적인 삶의 배경으로서 공간을 마주하게 하는 중요한 시도로 여겨진다.  

특히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과 젠더화 된 공간의 맥락을 풀어내고 있는 책의 내용은, 과연 일상의 우리 공간을 어떻게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호기심을 가지게 한다. 

 

 

3. 러셀, 혹은 '로지코믹스'의 외전?  

 러셀의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는 이미 많이 소개된 러셀의 책에 한 권을 추가하는 의미 이상이 있다. 특히 최근 일본에서 발생한 재앙과도 같은 공포는, 마찬가지로 핵에 의해 멸망할지도 모르는 문명의 위험에 맞선 러셀의 회의적 합리주의가 일종의 처방제일 수도 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로지코믹스'가 러셀의 논리학자적인 측면에 비중을 두었다면(책의 주요한 플롯은 2차세계대전 시기이지만), 이 책은 분야별로 러셀이 썼던 글들을 선변해서 뽑아놓은 선집에 해당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러셀이라는 공적인 인간의 기승전결을 보여주는 중요한 것이다. 

과연 러셀의 글은, 절망과 어찌할 수 없는 무능력에 빠진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가. 이 책의 출간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4. 책은 사회에 어떻게 책임지는가?  

책을 공적인 대화의 제안으로 볼 때, 이미 출간 책에 대한 최대한의 책임은 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앞선 책의 공과를 다시금 살펴보는 후속작의 출간일 것이다.  

박용남의 '꾸리찌바 에필로그'는 책의 책임성을 웅변하는 책이다. 알다시피 저자가 21세기 초반에 내놓은 꾸리찌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서울에서 하고 있는 버스 준공영제와 중앙차로제가 바로 꾸리찌바에서 영감을 얻는 도시교통정책의 산물임을 고려한다면, 저자의 꾸리찌바 소개는 영향력있는 사회적 제안이었다. 

그리고 다시 꾸리찌바다. 물론 꾸리찌바로 한정되어 있진 않지만, 그럼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꾸리찌바 그후 10년의 이야기다. 과연 꿈의 도시 꾸리찌바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단순히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게 그 변화를 지속시키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 책을 통해서 차분히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5. 밖에서 보는 중국을 넘어서 

우리에게 중국은 경제의 위협대상이자, 남북관계의 불편한 중재자 일 뿐이다. 그래서 그럴까. 주변에서 중국과 관련된 언론보도나 이야기들이 부쩍 많아졌으나, 왠지 있는 그대로의 중국이 아니라 보고싶은 중국만을 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장리자의 '중국만세!!'는 분명, 미국적 삶에 익숙해진 중국인의 눈으로 그려진 중국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쿠바에 망명한 구체제 집단의 글에서 볼 수 있는 맹목적인 비하나 자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중국을 볼 수 있겠다고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바로 '제목' 때문이다. 

출판사는 이를 역설이라고 했고, 실제로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중국식 사회주의를 조롱하거나 혹은 일방적인 호의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내부자였던 시기에 개인의 삶과 국가의 삶의 교차하면서 벌어지는 과정들을 늘어놓는 방식은 나름 기대를 갖게 하는 매력이다. 

과연, 중국은 어떤 속살을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이 책이라면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든다. 

 자, 난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 어떤 책이 정말 내게 말을 걸어 줄 것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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