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쿨하지못해 미안했던 적이 있다. 헤어진지 1년이 지났는데도 마음이 그대로여서 이따금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새벽에 전화가 오면 받지도 못하곤 '너였지?'라고 이별한 연인에게 문자를 보낸다던가, 노래방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며 이별의 아픔에 질질 짜기도 했던 것은 약과다. 내가 깊이 짝사랑하던 이와 연애를 하고싶다 고백하는 친한친구에겐 쿨한척 하며 그러라고 해놓고서는 사랑과 우정에 관한 온갖 시를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전체공개'로 써두고는 일촌을 끊고 전화번호를 지워버리기도 했다.  

그 외 더 찌질한 기억들은 쪽팔리니까 자체 기억상실증이 발동하여 지워진듯 하지만 그렇게 찌질했던 나도 헉 소리 날 정도로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은 찌질한심 그 자체다. 보면서 내가 얼굴이 다 빨개질 정도로 진상이다. 아무리 봐도 별 의미 없는 남자들의 행동을 죽 읊고는 "그래도 우린 오해를 하면 안된다, 남자들은 '그냥'하는거다." 라고 뭔가 대단한 사실을 깨우쳤다는 양 진지하게 말하는 양미숙의 얼굴을 보면 한숨도 나오고 웃음도 나오고 얼핏 눈물도 난다. 왜 눈물이? 나 역시 내게 남자친구 있냐고 묻는 남자들이 나한테 관심있어서 묻는 것이라 확신하기에 남일 같지 않더라.   

좋아하는 여배우가 몇 있다. 그 중 하나가 공효진이고 그녀의 호감형 인상을 참 좋아했는데 [미쓰 홍당무]에서 비호감의 매력을 발견하곤 그 의외성에 놀라고 재미있고 신기했다. 어떻게 주체가 안되는 곱슬머리에 안면홍조증이라 좋아하는 사람이 말만 걸어도 귀까지 빨개져버리는 촌스러운 여자 양미숙. 외모도 마음도 비호감이긴 한데 짝사랑하는 서선생이 보낸 특수문자 하나에 혼자 오해하고 모텔 엘레베이터에 쭈그리고 앉아서 엉엉 울고있는 모습을 보면 미워할 수가 없다. 얼굴이 남들보다 심하게 빨개지는 것처럼 그녀의 마음의 막도 남들보다 과하게 얇을 뿐이었던건 아닐까.  

찌질하지 않기 위해서 그 동안 어찌나 많은 노력을 해왔던가. 쿨한 척만 하고 속으론 여전히 찌질해서 결국엔 그걸 드러내곤 더 찐따같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쿨한 여자가 되었다면 그 노력이 가상키나 하겠지. 난 모태찌질이다. 단지 지금은 찌질한 정도가 되기 전에 애초에 끊어버리자며 포기가 빨라졌고, 가끔 하는 부끄러운 행동들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 '제발 쿨해지자'라고 술만 마시면 외쳐대던 날들은 갔다. 지금은 '쿨하지 않은게 어때서! 쿨한 사람이 어딨냐?' 라며 오히려 당당해한다.   

그래서인지 배우가 가장 멍청해보이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고등학교 축제에서 밀가루와 오만 잡쓰레기들을 맞아가며 공연한 양미숙과 서종희가 공연을 끝내고 깔깔거리며 교문을 나서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어보일 수 없었다. 찌질함과 쿨함은 한끝차이인데 난 대체 뭘 위해 노력했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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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9-15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쉽게 얼굴이 붉어지는 타입이라서요, 그 사실만으로도 당황스러울때가 많아요.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 앞에서 붉어져서 좋아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구요. 이건 잘 치료가 안되더라구요. 전 제가 이렇다는 사실이 몹시 싫어서 이 영화를 끝까지 안 볼 생각이에요. 제 친구중에도 저랑 비슷한 타입의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랑 이 영화 얘기하면서, 우리는 절대 보지말자, 보면 감정이입 오만프로 되서 질질 짤거다, 이랬었어요. 이 영화는 얘기만 들어도 가슴이 너무 아파요. 어휴. 안봐 안봐 안볼거에요.

전 인간이 기본적으로 쿨해질 수 없는 동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쿨하다는 말을 멋지게 써먹는거겠죠. 쿨한 인간은 없어요. 다만 쿨한척 하는 인간이 있을뿐이지.

Forgettable. 2011-09-15 11:56   좋아요 0 | URL
이거 보고 은근히 울었다는 사람 많더라구요. 근데 전 의외로 괜찮았어요. ㅋㅋ 결말도 귀엽고 괜찮았어요. 그러니 봐도 나쁘지 않을거에요. 추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빨개져도 문제지만 안좋아하는데 빨개져도 문제겠네요. 아 짜증나..
근데 락방님 내 앞에선 안빨개지는거 보면 나 안좋아하나봐.. 좋아하는줄 알았는데.. 안좋아한다고하는거 뻥인줄 알았는데......

근데 쿨한 인간들이 있더라구요. [악의 교전]보니까 ㅋㅋ 인간의 범주에 넣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튼 이 리뷰도 곧 써야지.

다락방 2011-09-15 14:33   좋아요 0 | URL
하아-
나는 안좋아한다고 말하는데 왜 내 말을 듣지를 않아요, 뽀? 나는 뽀를 안좋아합니다. 네? 알아들었어요?

ㅋㅋㅋㅋㅋ

Forgettable. 2011-09-16 09:37   좋아요 0 | URL
안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빨개지는 얼굴이니,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안빨개지기도 하나보죠?

라로 2011-09-15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뽀님이 글을 참 맛깔나게 쓰신다는거 알지만 이 글은 또 뭐래요!!!^^
정말 좋은걸요!! 찌질한 인간이라 그런가, 제가 말이에요!!!
저에게 바치는 오마주로 혼자 착각하는 찌질한 중년 여성 다녀갑니다.ㅎㅎㅎㅎㅎㅎㅎ

Forgettable. 2011-09-15 11:59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합니다. ㅎㅎㅎㅎㅎㅎ 요즘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을 대폭 상실해서 억지로라도 낑낑거리며 쓰고 있는 중이에요 ㅋㅋ 쓰다보면 감을 찾겠지 싶어서 ^^
영화는 더 재미있어요. 웃음이 픽픽 나오다가 배우가 안쓰러웠다가 내가 안쓰럽기도 하고;; 그런 느낌을 잘 표현을 못하겠으니 영화 보세용 ㅋㅋ
찌질한 우리에게 격려와 박수를 보냅니다 ^^

비로그인 2011-09-15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이네요, Forgrttable님 :)

양미숙... 비호감인데 미워할 수가 없어요. 내가 뭐! 앙탈을 부려도 눈 부라리며 채팅을 해도 그저 귀여워 보이던 걸요. 사진 찍는 장면은 쉽게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왠지 예전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쿨하지 못한 나를 애써 괜찮다고 위로해줄 사람 어디 없나 주위를 살펴봐도, 딱히 위로 받을 구석을 찾지 못한 심정도 공감이 가고. [달의 제단]의 주인공도 찌질남이라면 찌질남인데... 그 책 생각도 나네요 ㅎㅎ

미지근한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되도록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현실은 찌질하지만 ㅠㅠ)

Forgettable. 2011-09-15 14:0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말없는수다쟁이님^^

전.. 피부과 의사에게 웃겨죽으려고 하면서 '커진다커진다커진다..'를 얘기하는 장면이 너무 부끄럽고 막 죽을것 같아요 제가 더ㅋㅋㅋㅋ 하지만 미워할 수 없더라구요. 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가 얼굴이 더 빨개져 ㅠㅠ

전 차갑게 보이는 여성이 너무너무 매력적으로 보여요. 그 속에 뜨거운 불을 감추고 있는 사람요. 아마 제가 그러질 못하니까 동경하는 거겠죠..

무스탕 2011-09-15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영화 포스터중에 공효진 얼굴이 이~~따만하게 나온거 있잖아요. 머리는 잔뜩 산발을 하고.
그거 보면서 아, 공효진이 제대로 망가졌구나.. 했었는데 결국 영화는 안봤어요. (못봤던가..? --a)
찌질하면 어때요? 적당한 찌질은 인간미를 옴팡 높여줘서 차라리 귀여울때도 있지요 ^^

Forgettable. 2011-09-15 14:03   좋아요 0 | URL
공효진이 이거 찍으면서 이거 하면 예쁜여배우로 남기는 글렀구나, 했었대요. ㅎㅎㅎ
하지만 '배우'인생에 한 점 찍었다고 생각했어요. 예쁘게 나오진 않아도 멋있었거든요.
적당히 찌질하고 어느정도 컨트롤이 되면 괜찮지만 ㅋㅋㅋㅋㅋㅋ 양미숙은 ㅋㅋㅋㅋ 아... 모르겠어요. 귀엽긴 한데... 찌질함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

poptrash 2011-09-1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드 [루이]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누구나 그런 순간이 있다. 쪽팔려서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밤중에 이불을 차게 만드는 그런 기억들이.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40%은 그런 순간들이었다." 뽀님 때문에 저도 이 대낮에 손발 오그라드는 온갖 기억들의 역습을... ㅜ_ㅜ

Forgettable. 2011-09-15 14:07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아까 이 글을 쓰기 전에 한참 제 찌질함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 샤워를 하지 않고서는 못배길 정도가 되어 얼른 씻었어요. 막 구질구질함이 온 몸에서 기어나오는 것만 같은 기분 아시나요?
팝님은 어쩐지 쿨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 똑같구나 ^^

Arch 2011-09-15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허지웅 책 봤는데 거기서도 미쓰 홍당무 얘기 나와요.
이 영화는 처음엔 그저 그랬는데 (박찬욱에, 대단한 신인 감독 입김이 셌죠) 곱씹어볼수록 좋더라구요.
나는 영화 보면서 낄낄대면서 웃었어요. 의사랑 면담할 때랑 채팅할 때. 이건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러면서.

양미숙의 뜨거움이 부끄럽고 멋쩍지만 거기서 나를 보니까 사랑스럽... 아니, 나도 얼굴이 빨개졌어요.

Forgettable. 2011-09-15 14:25   좋아요 0 | URL
전 박찬욱감독 각본이랬나 그래서 볼 생각도 안하고 있었거든요. 코믹을 가장한 잔혹? 외설? 뭐 이런 것들이 잔뜩 들어있을 줄 알구요. ㅎㅎㅎㅎㅎ
근데 첨부터 너무 빵빵터져서 ㅋㅋ 피부과의사랑 면담할때는 진짜 미치겠더라구요.

하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던게 아치님 말대로 그 안에 내가 있으니까.
아치는 책도 많이 읽네요~

pb 2011-09-15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모태 찌질이었는데
인생이 막장생활이 되면서부터 언젠가 찌질함이 사라져버렸어요..;
예전엔 속으로 끙끙 앓으며 뱉지 못한 말들이 이젠 진짜! 저는 속으로 말한 줄 알았는데 어느새 입 밖에 나와있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구남친들과 술마시는건 그냥 일상-_-

그나저나 저도 미쓰 홍당무 너무너무 좋아해요. 개봉날 영화관에서 이거 보다 뒤집어졌는데 감독 차기작이 진짜 궁금할 정도로. 이세상에 둘도 없는 캐릭터 양미숙ㅋㅋㅋㅋㅋ

Forgettable. 2011-09-16 09:40   좋아요 0 | URL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캐릭터이지만 또 보면 어딘가에서나 볼 법한 캐릭터이기도 해요. 그래서 더 매력적이고. 역시 찌질함과 쿨함은 한끝차이라고, 자기가 찌질하단걸 인정하고 당당해지기 시작하면 ㅋㅋㅋ 찌질한것도 쿨해지는거 아닌가? ㅋㅋㅋㅋㅋㅋㅋㅋ 몰라요 ㅋ

나도 구남친이랑 술먹고 싶다................ <-은근한 흑심 발동

mira 2011-09-15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영화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 때론 양미숙이 부럽더라구요 너무나 현실적이고 눈치가 빨라 피곤한 삶이라고 느낄때도 있는데 양미숙처럼 찌질하게 사는것도 나름 괜찮겠다는 생각이 ㅎㅎ

Forgettable. 2011-09-16 09:4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mira-da님 ^^
찌질한것도 이정도가 되면 부러울 정도이긴 하죠. ㅋㅋㅋ 이 영화 보신 분이 꽤 많네요. 이렇게 많이 댓글이 달릴 거라곤 상상도 못했;;

전 [고도를 기다리며]공연하는 장면이 너무 좋았어요.

turnleft 2011-09-16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최고의 장면은 "아빠 미워!" ㅋㅋㅋ

Forgettable. 2011-09-16 09:4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거기서 완전 빵 터졌지요. ㅋㅋ 아 댓글 달다보니 명장면들이 수도 없이 생각나요!

무해한모리군 2011-09-16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실생활에서 양미숙 찜쪄먹게 찌질한 행동을 많이 해봐서 이 영화를 보면서 어찌나 동감이 되던지요.
나는 정이 많고 마음이 따뜻해서 찌질한거라고 스스로 위로를 해봐요~
뽀님의 찌질한 모습은 상상도 안가는군요.

Forgettable. 2011-09-16 09:45   좋아요 0 | URL
전 휘모리님의 찌질한 모습이 상상도 안가는데.. 휘모리님이라면 아무리 찌질한 행동을 해도 멋있어보일것 같아>.<

그나저나 축하합니다. ㅎㅎ 축하할 일 맞죠? 전 기분이 이상해요;

Mephistopheles 2011-09-23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만 그런가요. 남자도 연애하다 헤어졌을 때 충분히 찌질해져요.^^ 그리고 전 저 쿨하다란 표현이 참 별로에요. 온혈동물 인간이 변온동물 파충류가 아닌 이상 어떠케 쿨할 수가 있다고...ㅋㅋㅋ 그리고 저 영화 찍고 나서 평소 공효진씨와 친분있는 감독이 이랬데요. "넌 이미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영화를 찍었기에 이제 영화 그만찍고 죽을 일만 남았다." 라고.. 그만큼 이 영화에서 공효진씨는 최고였어요. 물론 재 개인적인 사심이 가득한 평가이긴하지만 객관적이더라도 이는 충분히 공감하리라 보고 싶어요.

Forgettable. 2011-09-23 10:53   좋아요 0 | URL
전 영화 보면서 '이거슨 분명 공효진의 진짜 모습인게 분명해..'라고 거듭거듭 생각했죠.
연기가 아니잖아요? 이미??!!!

쿨해질 수 없는 찌질함을 인정하고 당당해질 때 우린 진정 멋있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ㅋㅋ 그래도 우리가 온혈동물이기 때문에 진정 차가워질 순 없겠지만요?! ㅎㅎㅎ 그렇다고 제가 멋있다는 건 아니고 ( '') 맞나?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