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것은 대학 도서관의 자료실에서였다.
뭘 볼까... 하다가 그냥 낯익은 제목이라는 이유로 참 심심하게 골랐던 영화. 하지만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블레이드 러너>는 더 이상 그냥 '영화'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많은 은유와 상징이 보석처럼 채워져있는 <블레이드 러너>는 지적인 충만감, 화면을 읽는 즐거움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TEXT적인 영화다.
지금은 너무 흔해져버린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사이보그'라는 사이버펑크 세계의 주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옥상 씬에서 로이(룻거 하우어)의 대사인 "Time to die"에서는 바보같이 울어버렸다. 이후 director's cut도 봤는데 나는 둘 다 좋았다.
- 편집본이 감독판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아이러니하지만 오히려 더 좋은 작품이 허다하다. 때로 객관적인 판단이 더 정확할 때도 있는 법. 

마지막 장면을 편집해 버림으로써 데커드의 정체가 애매해졌다고 하지만 사실 내용을 유심히 보면 이미 영화 전반에 걸쳐 데커드의 정체성에 대한 힌트를 충분히 주고 있다.
필립 K.딕의 원저의 제목인『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은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너무나 잘 대변한다. 전기양 꿈을 꾸는 안드로이드라니, 제목만으로 가슴이 설레었던 몇 안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덧붙여 반젤리스의 음악도 좋고,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연출도 흠잡을 데 없이 좋다.
이런 영화가 시대의 외면을 받았다니, 이런 작품을 만들고도 상 하나 못받다니... 참고로 당시 대세는 E.T였다고 한다. 

좋은 작품은 다음 작품에게 영감을 준다.《블레이드 러너》도 마찬가지.《블레이드 러너》는《공각기동대》로, 《공각기동대》는《매트릭스》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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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여자와 남자의 TV시청 패턴을 분석한 다큐를 봤는데, 여자는 드라마를, 남자는 스포츠를 볼 때 즐거움을 느낀다는 얘기였다. 그럼 왜 이런 성향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 여자는 과정을, 남자는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제니퍼 애니스톤 주연의 영화《브레이크 업》에서처럼, 연인들의 싸움은 대개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여자 : (사실) 레몬이 몇 개인가는 중요하지 않아.
남자 : 중요하지 않다면서 도대체 왜 화를 내는 거야?

 

레몬이 딸기잼으로 바뀌기는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의『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도 유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여자 : 고작 딸기잼이 없다고 열심히 준비한 내 아침을 망쳐? 니가 감히 내 성의를 무시해?
남자 : 난 그냥 딸기잼이 먹고 싶다는 것 뿐이라니까
 

 

실제로 서로 의견이 대립될 때 대개 여자는 미시적 전개를, 남자는 거시적 논리를 펴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여자 : 내 부탁을 잊었단 말이지? 넌 늘 그랬어. (과거가 주루룩 펼쳐진다. 여자가 필요로 할 때 여자의 기억력은 괴력을 발휘한다)
남자 :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 때의 남자는 정말로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여자 : 결국 넌 애정이 식은 거야! (말하자면 여자는 위로받고 싶다)
남자 : 그냥 잊어버렸을 뿐인데, 건망증이 애정하고 무슨 상관? (겨우 그런 걸로 유난을 떨었던 말이냐? 피곤하기만 한 남자)

이런 식으로 서로 동문서답을 반복하고 감정적 낭비를 거듭하며 끝없이 싸운다. 결국 그 차이를 극복 못한 연인들은 파국으로, 차이를 '일시적으로' 극복한 연인들은 위 장면의 네버엔딩월드로...
이렇게 보면 주로 여자는 과거지향적이고 남자는 현실순응적이라고 봐야 하나?

이 영화가 재미없게 느껴진다면, 같은 의미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영화 속 '함께 사는' 남녀의 모습이 너무 현실적이어서일 것이다. 

- 연애심리가 궁금하다면 읽어볼만한 몇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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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B의 질문에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답변하지 않았다. 오직 그를 침묵시키려고만 했을 뿐이다. 그의 책들을 찢고 금지하고 불태우고 압류했다. 정치적인 압력수단을 동원해 그가 다른 지역에 머물러 있어도 집필금지령을 내렸다. 그가 대답할 수 없고 보고도 할 수 없게 되자마자, A의 패거리는 그를 향해 온갖 험담을 퍼부어댔다. 그것은 더 이상 싸움이 아니라 방책 없는 자에 대한 유린이었을 뿐이다.
B는 말할 수도 쓸 수도 없게 되었고, 그의 저서들은 서랍 속으로 말없이 들어가야만 했다. A는 인쇄소, 설교단, 대학 강단, 종교국, 국가공권력 전부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 모든 기구를 거침없이 가동시켰다. B는 발걸음 하나까지 감시를 받았고, 그의 말 한마디까지 누군가 엿들었으며, 편지는 모두 누군가 가로챘다. 단 한 사람에 대해서 머리가 백 개나 달린 조직이 우세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도 없다. 다만 때 이른 죽음만이 B를 망명이나 화형대에서 구원해주었다.
그의 시체를 앞에 두고도 승리에 찬 교조주의자들은 눈이 뒤집힌 증오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갉아먹는 석회처럼 의심과 비방을 그의 무덤 속에까지 던져넣고, 그의 이름 위에도 재를 뿌렸다. oo의 독재뿐 아니라 모든 정신적 독재의 원칙 자체에 대항해 싸웠던 이 유일한 인물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잊어버리고 사라지게 만들려고 했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중

* A는 칼뱅, B는 카스텔리오.  

인명은 일부러 A와 B로 표기했다.
역자도 언급하듯이,

이 두 인물의 대립적 초상화에서 주인공들의 이름을 빼면 이런 전체적인 구도는 극히 보편적인 모습을 보인다. (중략) 등장인물의 이름과 구체적인 상황은 바뀌어도 근본적인 구조는 늘 비슷한 것 

이니까. 
어디서 본 듯 익숙한 본문의 내용은, 16세기 한 인문학자의 투쟁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현실과 중첩되어 수시로 책을 덮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5세기 전에 일어난 일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재와 놀랄만큼 닮아 있다. 

1월은 츠바이크와 함께 보낸 달이라고 해도 무색하지 않다. 지난 달 구입 목록에서 밀려난 츠바이크의 책을 월 초에 도서관에서 잔뜩 짊어지고 왔는데 결국 세 권은 읽지 못하고 반납했다. 이 중『어제의 세계』는 구입해서 읽을 생각. 

많은 양의 독서와 깊은 사유를 통해 인간의 심리와 타인의 삶을 통찰하는 것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츠바이크는 무엇보다도 인물에 접근하는 방식이 돋보인다. 인간 심리와 행동의 저변을 들여다보는 츠바이크의 통찰력은 언제나 놀랍고 신비하다.
나는 인물 평전을 좋아하지 않는데 어렸을 때 문학전집과 함께 재미나게 읽었던 위인전이 실은 미사여구 일색의 미화담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서부터 영- 재미가 없어졌다. 츠바이크의 소설은 그렇게나 좋아하면서도 그래서 늘 좋아하는 작가 목록에 이름을 올려 놓고도 그의 평전을 읽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 것도 그런 기억 탓이다. 혹시 나처럼 안 좋은 기억 때문에 평전을 멀리 해 온 사람이 있다면 한번쯤 츠바이크의 평전을 시도해봐도 괜찮을 듯 하다.

- 1월에 읽은 츠바이크의 인물 평전

『천재광기열정1』
1권은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니체' '클라이스트'를 다룬다. 2권에 등장하는 인물은 '발자크' '디킨스' '스탕달' '카사노바'.
첫번째 등장인물 '톨스토이'편에서부터 쏟아지는 관념적인 문장들의 소나기에 작가님 너무 하삼!!! 내내 칭얼칭얼 하면서 겨우 읽고 2권은 다음 기회로...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정치적, 종교적으로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로 타인을 유린하고 짓밟는 권력을 보면서 장면마다 구절마다 참 가슴 아프게 읽은 책. 우리는 모두 누구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고, 내 의견이 존중받길 원하듯 다른 이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헤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와 다르니까, 내 맘에 안 드니까, 라는 이유로 상대를 제거한다면 우라사와 나오키의『몬스터』에 등장하는 괴물처럼 결국 혼자 남게 되어 누구도 내 이름을 불러 줄 이가 없게 될 것이다.

『메리 스튜어트』
동 시대를 살았던 두 여왕, 엘리자베스와 메리는 원하는 것을 스스로 얻어야 하는 사람과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삶에 대처하는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실례(實例)다.
개인적으로 나는 메리보다 엘리자베스에게 끌린다. 츠바이크가 비열하고 저급하다고 비난하는, 엘리자베스가 메리를 감금하기로 한 선택은 (그녀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으로 보인다.

『아메리고』
신대륙의 최초 발견자는 콜럼버스인데 어쩌다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이 대륙을 차지하게 되었는가 하는 해프닝의 전말을 들려준다. 내용 중 심히 공감이 갔던 부분은, '당시의 아메리카를 오늘의 아메리카와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부분. 사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땅에 누구의 이름을 붙이든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 심리 묘사가 탁월한 츠바이크의 소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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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은 실내를 빙 둘러보더니 발은 안 아프고 소리만 요란한 것들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쓰레기통이나 입구에 줄지어 선 링거 걸이 같은. 조폭? 입 모양만으로 김 간호사가 묻자 최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원장 안 나와? 이거 병원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외친 놈이 양복 윗도리와 쫄티를 순식간에 벗어던지며 앞으로 나섰다. 비늘 하나하나가 선명한 용의 목이 젖가슴을 향해 내려와 있고 나머지 부분은 등 쪽으로 넘어가도록 그려진 문신이었다. 초음파나 엑스레이 기사를 하다 보면 갖가지 모양의 문신을 보게 되고 어지간한 건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배꼽이나 젖꼭지의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문신을 한 사람이 와도 겁날 건 없었다. 촬영을 위해 불쾌한 액체를 삼킨 채 기계 위에 누운 인간처럼 겸손하고 무욕한 사람을 딴 곳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우니까.
침묵을 깬 건 최 간호사였다.
"어머, 컬러 문신이야." - p.24,「나릿빛 사진의 추억」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첫번째 수록인「나릿빛 사진의 추억」을 읽을 때였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이었는데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책장을 펼치고 예의 조근조근 차분하고 감성적인 문장들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고 말았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한 남자가 한 여자랑 연애를 했는데 이 남자가 정말정말 가난한 남자였던 거다. 얼마나 가난한가 하니 연애를 하는 동안 찍은 사진을 현상할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결국 여자랑 헤어지고 1년이 지나는 동안 현실을 받아들인 남자는 한 개인 병원에 엑스레이 사진사로 취직한다. 덕분에 헤어진 여자랑 찍은 사진도 현상할 수 있게 됐다. 근데 이게 문제의 시발점이 된다.
맥주 한 잔 하면서 현상한 (야한)사진들을 보니 취기도 오르고 아무래도 여자에게 돌려줘야겠다 싶다. 그래서 여자한테 전화를 하지만 1년 전에 헤어진 여자는 이미 예전의 그 여자가 아니다. 게다가 여자는 냉정하게도 사진은 남자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한다. 통화 직후에 남자는 사진과 필름을 모두 오려서 쓰레기 봉투에 넣어서 버린다.
그런데 이튿날, 갑자기 불쑥 찾아온 여자가 사진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여자는 제법 유명세를 가진 남자와 결혼을 목전에 앞두고 있었던 것. 문제는 남편 될 남자가 여자한테 사진과 필름을 찾아오라고 시킨 것이다. 남편 될 남자는 여자의 과거에는 관대하지만 여자의 옛애인이 사진을 가지고 협박하는 건 용납 못한다고 한다. 물론 남자는 협박할 생각도 없고, 사진과 필름도 모두 버렸다고 솔직하게 얘기하지만 그 날부터 남자의 직장에 무시무시한 문신을 한 남자들이 죽치고 앉아 사진과 필름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기 시작한다.
없는 사진과 필름을 내놓으라고 하니 남자는 난감해진다. 여자는 매일같이 징징대고, 어깨들은 매일같이 병원 로비를 차지하고 앉아서 남자를 겁준다.

숨넘어가게 웃다가 이쯤에서 M군에게 전화했다. 위의 줄거리를 들려줬더니 M군이 웃지도 않고 "그럼 사진을 다시 찍어야지" 했다. 물론 소설의 결론도 그러하다. 남자와 여자는 다시 한번 옛정을 불태우고 여자의 사진을 찍고 그리고 해피엔딩인 거지. 

보통 독서는 독서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정미경 작가는 온라인 서점에 신작 소개가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클릭했다가 거기에 달린 리뷰를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된 작가.
마침 우리 동네 도서관에 그녀의 소설이 있어서 읽어 보고 구매를 결정해야지 했는데 늘 그렇듯이 도서관에서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참 뜬금 없고 기약이 없는 일이라 에라, 모르겠다, 출간 소설 중 한 권을 제외하고 신작 소설을 포함한 그녀의 소설을 모두 주문했다. 빠진 한 권은『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인데 운동권 후일담 소설. 나는 공모 작가님의 영향으로 (특히 여성작가가 쓴)운동권 후일담 소설에 알러지가 있다.
이전에 접한 적이 없는 생소한 작가의 소설을 한번에 주문한다는 건 확실히 모험이지만 신작『내 아들의 연인』을 제외하고 내리 세 권을 차례로 읽은 소감은 일단 '만족'이다. 작가의 감각적인 정서가 감각적인 문체로 잘 정서된 느낌이 든다.
소설 속 상처를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체로 차분하고 조근조근하지만 무거운 내용에 비해 막상 읽히는 건 그다지 무겁지 않다. 깊긴 하되 바닥이 맑은 우물 같다고나 할까. 각양의 인물들이 간직한 상처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보듬어 안는 방식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작가의 기본 정서는 '가벼움'이 아닐까 추측하게 한다. 자기 안으로 파고들다 못해 침잠해버려서 나중엔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몰라 헤매는 작가들이 많은데 정미경 작가는 그들에 비하면 영리하구나 싶다. 
깊이와 무거움이 다르듯 가벼움과 경박 역시 다르다. 개인적 소감으로 정미경 작가는 그 차이를 구분할 줄 아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장밋빛 인생』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단편 소설집이고 남자와 여자의 얘기다. 작가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대부분 남자인 것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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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옛적 한 신앙이 돈독한 영주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파수병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홍수가 났다고 보고했다. 그 영주는 얼른 성당으로 가서 신에게 구원을 빌었다. 곧 물은 성당계단까지 밀려 왔다.
그때였다. 한 농노가 조그만 나뭇배를 저어오며 영주에게 타라고 재촉했다. 영주는 말했다. "고맙지만 괜찮네. 나는 신을 믿고 또한 정의를 믿네. 신이 나를 구원해 줄걸세." 그러는 사이 물은 점점 차올라 왔고 영주는 설교단 위로 몸을 옮겼다.
이때 갑자기 모터 보트 한 척이 물살을 가르며 나타났다. "영주님, 어서 뛰어 오르세요." 그러나 고결한 영주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말게. 난 신을 믿네. 내게 시끄러운 기계 따윈 필요치 않아." 마침내 물은 성당 전체를 삼켜버렸다.
영주가 가까스로 성당 꼭대기의 첨탑 하나를 거머쥐었을 때 세찬 바람에 물살이 갈라지더니 머리 위로 헬리콥터 한 대가 나타났다. 조종사가 외쳤다. "영주님, 제발 이 줄사다리를 잡고 올라오십시오." 영주는 외쳤다. "걱정말게. 난 아직도 신을 믿네. 그분이 나를 구해 주실 거야." 얼마 후 물은 불어나 영주는 익사했다.
영주는 천국에서 신을 만났다(그는 착한 영주였던 모양이다.) 영주는 항의했다. "신이시여, 저는 당신을 일생 동안 숭배했습니다. 성직자들의 말씀을 하나도 어기지 않았고, 다른 이들이 당신을 의심하여 기계에 의지할 때에도 저는 끝까지 당신의 구원을 확신했습니다. 어찌하여 저를 익사시키셨나이까?" 신이 되받았다. "이 멍청아! 너에게 나뭇배, 모터 보트, 헬리콥터를 보내 준 사람이 대체 누구라고 넌 생각하느냐?" - p.172,「격분한 현자 카를 마르크스」

사실, 나는 인용한 문장, '신앙심 깊은 영주' 에피소드를 작가의 의도와 전혀 다른 의도, 다른 목적으로 끌어다 인용하곤 한다.

지금도 심심하면 가끔 아무 챕터나 펼쳐서 읽는 토드 부크홀츠의『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는 학부생 때 리포트를 쓸 때 참고하려고 읽었던 책으로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비유와 만담등을 섞어가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 경제(사)학 분야의 교양 입문서다.   

전공이 전공이니만큼 이 부문에 신간이 나오면 의무적으로라도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임감 같은 게 있는데, 읽어야 할 책 목록의 상위에 늘 올라가 있는 마르크스의『자본론』은 그의 유물론의 핵심 내용인 '잉여 가치'를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로 안 읽는다기보다는 못 읽고 있는 고전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K.마르크스 역시 생전 그의 개인적인 행적을 보면 "아니, 이런 인물이 경제사적, 철학사적 분야에 그토록 크고 방대한 영향을 끼쳤단 말인가" 놀라게 된다. 하지만 다행히 역사는 인간을 심판하지 않고 그 인간의 업적을 심판하는 너그러운 잣대를 가지고 있다.  

중요한 건, 4대 성인에서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재능인데 마르크스 역시 그 재능이 있었으니 타고난 달변, 문장력, 그것을 이용한 대중적 설득력이 바로 그 것이다.

히틀러 얘기가 나온 김에, 언젠가 M군과 "지구에 멸망이 온다면 어떤 형태로 올까?" 라는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종교 분쟁이 원인이 되지 않을까" 라고 했고, M군은 "어설픈 영웅 한 사람 때문일 것 같다" 고 했다. 생각해보면 꽤 타당성이 있는 숫자다. '1'이라는 숫자 말이다. 

*『자본론』을 읽기 전, 가볍게 읽기 좋은 몇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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