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들은 실내를 빙 둘러보더니 발은 안 아프고 소리만 요란한 것들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쓰레기통이나 입구에 줄지어 선 링거 걸이 같은. 조폭? 입 모양만으로 김 간호사가 묻자 최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원장 안 나와? 이거 병원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외친 놈이 양복 윗도리와 쫄티를 순식간에 벗어던지며 앞으로 나섰다. 비늘 하나하나가 선명한 용의 목이 젖가슴을 향해 내려와 있고 나머지 부분은 등 쪽으로 넘어가도록 그려진 문신이었다. 초음파나 엑스레이 기사를 하다 보면 갖가지 모양의 문신을 보게 되고 어지간한 건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배꼽이나 젖꼭지의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문신을 한 사람이 와도 겁날 건 없었다. 촬영을 위해 불쾌한 액체를 삼킨 채 기계 위에 누운 인간처럼 겸손하고 무욕한 사람을 딴 곳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우니까.
침묵을 깬 건 최 간호사였다.
"어머, 컬러 문신이야." - p.24,「나릿빛 사진의 추억」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첫번째 수록인「나릿빛 사진의 추억」을 읽을 때였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이었는데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책장을 펼치고 예의 조근조근 차분하고 감성적인 문장들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고 말았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한 남자가 한 여자랑 연애를 했는데 이 남자가 정말정말 가난한 남자였던 거다. 얼마나 가난한가 하니 연애를 하는 동안 찍은 사진을 현상할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결국 여자랑 헤어지고 1년이 지나는 동안 현실을 받아들인 남자는 한 개인 병원에 엑스레이 사진사로 취직한다. 덕분에 헤어진 여자랑 찍은 사진도 현상할 수 있게 됐다. 근데 이게 문제의 시발점이 된다.
맥주 한 잔 하면서 현상한 (야한)사진들을 보니 취기도 오르고 아무래도 여자에게 돌려줘야겠다 싶다. 그래서 여자한테 전화를 하지만 1년 전에 헤어진 여자는 이미 예전의 그 여자가 아니다. 게다가 여자는 냉정하게도 사진은 남자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한다. 통화 직후에 남자는 사진과 필름을 모두 오려서 쓰레기 봉투에 넣어서 버린다.
그런데 이튿날, 갑자기 불쑥 찾아온 여자가 사진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여자는 제법 유명세를 가진 남자와 결혼을 목전에 앞두고 있었던 것. 문제는 남편 될 남자가 여자한테 사진과 필름을 찾아오라고 시킨 것이다. 남편 될 남자는 여자의 과거에는 관대하지만 여자의 옛애인이 사진을 가지고 협박하는 건 용납 못한다고 한다. 물론 남자는 협박할 생각도 없고, 사진과 필름도 모두 버렸다고 솔직하게 얘기하지만 그 날부터 남자의 직장에 무시무시한 문신을 한 남자들이 죽치고 앉아 사진과 필름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기 시작한다.
없는 사진과 필름을 내놓으라고 하니 남자는 난감해진다. 여자는 매일같이 징징대고, 어깨들은 매일같이 병원 로비를 차지하고 앉아서 남자를 겁준다.

숨넘어가게 웃다가 이쯤에서 M군에게 전화했다. 위의 줄거리를 들려줬더니 M군이 웃지도 않고 "그럼 사진을 다시 찍어야지" 했다. 물론 소설의 결론도 그러하다. 남자와 여자는 다시 한번 옛정을 불태우고 여자의 사진을 찍고 그리고 해피엔딩인 거지. 

보통 독서는 독서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정미경 작가는 온라인 서점에 신작 소개가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클릭했다가 거기에 달린 리뷰를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된 작가.
마침 우리 동네 도서관에 그녀의 소설이 있어서 읽어 보고 구매를 결정해야지 했는데 늘 그렇듯이 도서관에서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참 뜬금 없고 기약이 없는 일이라 에라, 모르겠다, 출간 소설 중 한 권을 제외하고 신작 소설을 포함한 그녀의 소설을 모두 주문했다. 빠진 한 권은『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인데 운동권 후일담 소설. 나는 공모 작가님의 영향으로 (특히 여성작가가 쓴)운동권 후일담 소설에 알러지가 있다.
이전에 접한 적이 없는 생소한 작가의 소설을 한번에 주문한다는 건 확실히 모험이지만 신작『내 아들의 연인』을 제외하고 내리 세 권을 차례로 읽은 소감은 일단 '만족'이다. 작가의 감각적인 정서가 감각적인 문체로 잘 정서된 느낌이 든다.
소설 속 상처를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체로 차분하고 조근조근하지만 무거운 내용에 비해 막상 읽히는 건 그다지 무겁지 않다. 깊긴 하되 바닥이 맑은 우물 같다고나 할까. 각양의 인물들이 간직한 상처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보듬어 안는 방식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작가의 기본 정서는 '가벼움'이 아닐까 추측하게 한다. 자기 안으로 파고들다 못해 침잠해버려서 나중엔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몰라 헤매는 작가들이 많은데 정미경 작가는 그들에 비하면 영리하구나 싶다. 
깊이와 무거움이 다르듯 가벼움과 경박 역시 다르다. 개인적 소감으로 정미경 작가는 그 차이를 구분할 줄 아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장밋빛 인생』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단편 소설집이고 남자와 여자의 얘기다. 작가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대부분 남자인 것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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