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시 평론이 더 그렇다. 시를 쪼개고 나누기를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피 흘리며 그 자리에 스러진다. 그렇게 된 이상 우리는 그 시인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해야한다. 그런데 아마도 기형도와 초면인 사람들은 대개,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이라는 유고시집 끝 부분에 있는 김현 씨의 해설이라든지, 시를 쪼갠 다음에 어느 한 구절을 예로 들며 그는 죽음에 살며 절망을 노래하는 시인이었다든지 하는 비평들을 통해 그를 만날 채비를 할 것이다. 이미 '기형도론'이 생겨났을 정도로 그가 남긴 작품 수에 비해 그 작품들에 대한 평론이 무척 많으니까. 그렇지만, 마지막 1초까지도 철저하게 시인이었던 기형도에 대해 내가 쓰는 이 글은 다분히 감상적인 글이 될 거라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사랑에 빠졌던 고등학교 시절, 내가 읽은 모든 시는 사랑의 시로 해석되었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내가 평론을 좋아한다 한들 시 평론을 쓰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니까 고백하건데, 이 글은 연애편지에 가까운 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를 열렬히 사모하는 내 마음에 비해 너무 짧았던 그의 생애는(그는 서른이 되던 89년, 어느 극장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채 발견되었다) 나에게 살아있는 그의 육신을 만날 기회는 주지 않았다. 다행히 그의 젊음이 길고 치열했던 덕분으로 나는 기형도를 산채로 만날 수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를 만난 후로 나는, 기형도를 곁에 두고 추억하는 무수한 사람들에 대한 훨훨 타오르는 질투에 휩싸여야 했다. '시 평론 같은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말하면서도 기형도론이 가득한 곳을 내가 기웃거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내 것만으로는 그와의 추억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내가 기형도 시와 공유하는 그에 대한 맨 처음 추억은, "위험한 가계. 1969"이다.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데는 "그래, 맞아. 나도!"하는 노골적인 맞장구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단숨에 기형도에게 사로잡힌 이유였을 거다. 1969년 어느 봄 위험했던 그 가계는 1995년의 어느 여중생의 가계에, 그 누군가의 위험한 마음에 재현될 수도 있다는 것을 시가 증명해주지 않는가! 말하지만,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있다. 그 후에도 나는 기형도를 통해 그러한 경험들을 수백 번은 더 하게 되었다. 수백, 수천 번을 그의 추억들과 재회한 것이다.
으레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빠르고 강렬하듯이, 나는 미친 듯이 그가 쓴 시를 읽었고, 그의 여행의 기록을 뒤졌으며, 그의 습작의 흔적까지 놓치지 않고 싶어했다. 그러한 점에서 그가 요절한 시인이며, 다작하는 작가가 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은 오히려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열정이 지나치면 그의 심장까지 통째로 가지고 말겠다고 마음먹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니까 말이다.
그 당시만 해도 기형도의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베스트셀러는 아니었다. 그런데 미디어의 힘은 실로 엄청나다는 것을 나는 또 한 번 경험했다. 그에 대한 기억을 수집하려고 그렇게 물어물어 찾아갈 때는 누구하나 선뜻 나서지 않더니, 이제는 베스트셀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돈 되는 시집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그의 이름을 말한다. 어느 정도는 은밀한 무언가를 강탈당한 기분이다. 대신, 기형도와 자주 함께 가던 찻집 이름이 무엇인지, 그가 어느 자리에 자주 앉았으며, 그 찻집의 어떤 점을 좋아했는지 까지도 소상하게 일러주는 그의 후배를 만나는 일도 어렵지 않게 되었다.
이 정도로 유명해지고 보니, 이제 기형도 만의 특별한 세계가 더 이상 낯선 것만은 아니게 된 것이다. 어렵지 않게 그에 대한 얘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얘기할 때에는 "죽음", "절망", "부재", 주로 이런 느낌들의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는 걸 발견했다. 그런데 나는 그를 읽을수록 무엇인가 석연치 않게 느껴졌다. 그러한 느낌은 단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이 순간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말없이 앉아있는 때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가 많았고, 이런 저런 모임에서 재치와 유머로 사회를 보곤 했었다는 단면에 속아넘어간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절망과 희망의 분명한 경계 속에서 어느 한 곳에만 머무는 삶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안이 엄습하고, 우리는 살아있으면서도 생명의 부재를 경험한다. 심리학자인 융은 모든 사람은 무의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 무의식의 세계에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된 이면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의식하건 하지 못하건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어떤 부분을 드러내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그 일부분은 그가 경험한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시에서 극도의 불안감과 깊은 절망을 노래했다한들, 감히 누구도 그를 절망의 시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의 시가 결코 죽음의 이미지만으로 가득 채워질 수도 없다. 적어도 나는 기형도가 죽음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절망을 가르쳐주기 위해 시를 쓴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기형도는 자신이 경험한 지독한 고독과 절망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평온한 가운데의 희망보다는 끝이 없는 두려움 속에서 찾은 한줄기 빛이 더 절절함을 아는 까닭이다. 만약 그가 1969년의 그 위험했던 가계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저 동지의 불빛 불빛 불빛"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95년의 그 여중생은 그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민이 없는 사람도 없거니와, 만약 고민이 없다해도 고민이 없다는 것으로 고민하는 것이 바로 우리 사람이다. 무상무념은 사실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형도는 무상무념의 경지를 연습하기보다는, 기꺼이 혼란과 갈등, 죽음에 대한 두려움, 절망 그 모든 것을 경험하였다. 오히려 그러한 작업을 통해 구원받은 것은 누구보다도 그 자신일지 모를 일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 그의 눈을 들여다볼 수는 없을지언정, 그를 뼈 속까지 느끼며 그가 살다간 시대를 또 다시 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기형도를 사랑하는 것은, 깊고 깊은 죽음과 절망과 고독과 심지어는 이 모든 것이 부재하는 그 막연한 곳에 찾아 들어가, 한 줄기의 희망을 건져내 오는 그의 용기 때문이다. 그 막막한 곳에 있어 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진짜배기 희망을 노래하겠는가. 나는 오늘도 그의 무용담을 전해줄 또 다른 그의 지인들을 만나려 그가 자주 갔던 정거장을 괜시리 한 번 서성대볼까 싶다.
2002. 늦은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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