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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알바트로스
보들레르
자주 뱃사람들은 장난삼아
거대한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
바다 위를 지치는 배를 시름없는
항해의 동행자인 양 뒤쫓는 해조를.
바닥 위에 내려놓자, 이 창공의 왕자들
어색하고 창피스런 몸짓으로
커다란 흰 날개를 놋대처럼
가소 가련하게도 질질 끄는구나.
이 날개 달린 항해자가 그 어색하고 나약함이여!
한때 그토록 멋지던 그가 얼마나 가소롭고 추악한가!
이떤 이는 담뱃대로 부리를 들볶고,
어떤 이는 절뚝절뚝, 날던 불구자 흉내낸다!
시인도 폭풍 속을 드나들고 사수를 비웃는
이 구름 위의 왕자 같아라.
야유의 소용돌이 속에 지상에 유배되니
그 거인의 날개가 걷기조차 방해하네.
이 시에서 알바트로스는 속세에 사는 저주받은 시인의 상징이다.
너무 큰 날개를 가진 탓에, 육지에 내린 알바트로스는 뒤뚱뒤뚱 우스운 몸짓으로 걸어
육지 사람들에게 조롱을 산다.
하지만 그 커다란 날개를 펴고 유유히 창공을 날 적에는,
그를 비웃던 육지 사람들이 수많은 작은 점들에 불과할 것이다.
창공에서 더 지고한 체험을 하는 그를,
창공의 비행이 어떠한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범속한 육지인들은 비웃는다.
이 시는 예술가가 왜 생활인이 되지 못하는지에 대해 시사하고 있다.
그들의 재능은 지상이 아니라 천상의 것이기에, 지상의 범인들은
쉽게 그 높은 음역을 듣지 못한다.
예술가들의 일상속 모습은 종종 어색하고 나약하게 비쳐질 때가 있다.
그들은 한 직장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며,
남들이 모두 옳다는 일에 홀로 반발하여 조직생활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며,
모두들 쉽게 해내는 일상속 잡무가 그에게는 까다로운 일들일 것이다.
지상의 사람들이 높이 사는 결혼, 축재, 법규 준수, 규칙적인 생활, 안정된 노년은
그에게는 하잘 것 없는 것들이거나, 영위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것들이다.
<달과 6펜스>에서 언뜻 과묵하고 둔하고 몰취미해 보였던 스트릭랜드는 돌연
가정과 직업을 내팽개치고 자신을 부르는 무엇인가(예술)를 따라간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인간적이라 비판하지만,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 물밖을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가정을 버리고 예술에 투신하는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것은 `운명'과 `기질'이 부르는 것이었으므로, 천형이었다.
뭇사람들이 보기에 스트릭랜드는 괴팍하고, 원초적이고, 동물같다.
그는 사회적 규범과 인간사의 도리를 우습게 여긴다.
하지만 그는 인간사의 원리보다 더욱 큰 `원리'에 복속돼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예술은
얼핏 종교와 사회의 코드들을 배반하고 있는 듯하다.
어떤 그림들은 신성모독적이기까지 할 것이다.
하지만 종교..
그것은 국가적 사회적 역사적 풍토를 반영하는 것 뿐이지,
어떤 종교도 절대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그림 속에 어떤 `영성'을 표현해냈고, 그 그림을 통해
감상자가 잠시나마 영적 초월을 경험할 수 있었다면
그것이 곧 종교인 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이 필수불가결하고 위반 불가능한 것들이라 여기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돌이켜보자.
일부일처제,
철밥통같은 안정된 직장,
각종 의복 코드(아직도 여자가 젖가슴을 조금만 드러내는 옷을 입으면 어른들은 무슨 큰 재앙이 닥친 듯 바라보고, 남자들은 눈길로 성추행한다),
결혼 후 10년 안에 내 집 마련을 위해 모든 흥미들은 잠시 미루어두기 등..
한국사회를 진부하게 만들고 있는 이 모든 코드들은 결국
시대와 국가에 한정된 것들에 불과하다.
수차례 예술에 대한 생득적 관심을 스스로 짓밟고
생활인으로 복귀하고자 했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술이 삶의 반영이 아니라
삶이 예술을 반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를 단지 진부한 프레이즈로 여기고 있었던 나..
점점
저 말이 진리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