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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평점 :
술주정이 심한 사람은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여주면 고치거나 술을 끊게 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술에 취했을 때 내가 어땠는지 스스로 어렴풋이 기억하거나 동석했던 다른 사람의 증언을 통해 듣는 것과 그것을 직접 보는 것은 아마 천지차이일 겁니다. 녹음된 내 목소리를 처음 들을 때의 놀라움과도 아마 비교가 불가능하겠지요.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있다거나,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다는 인지를 통해서 나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은 그것을 아무리 성실하게 한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나를 관찰하는 것 또한 나의 의식이 나를 벗어나서 나를 관찰한다는 생각, 그 관찰이 남들의 관점과 비슷할 거라는 착각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 거라는 부정확한 짐작까지 개입합니다. 또 자신이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이미 스스로가 그간 해온 생각이나 행동, 자신에 대해 스스로 판단해온 것들이 어쩔 수 없이 전제돼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남들이 나에 대해 대체로 생각하는 바와는 일치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거기다 술을 마셔서 의식을 흩트리고, 주정까지 부리는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기란 더욱 불가능합니다. 멀쩡한 정신일 때도 인간이란 누구나 혐오스러운 면을 갖고 있는 법인데 그것이 술을 마시고 부리는 주정이라면 아마 그 혐오감, 무엇보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참아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김사과의 [천국에서]를 읽고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은 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케이와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대화나 묘사를 보면서 그 속에서 나 자신의 어떤 모습, 그 중에서도 혐오스러운 여러 면을 한꺼번에 많이 마주하게 됐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을 마구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수 없으니 불편했습니다. 그들과 다른 나만의 어떤 면을 필사적으로 찾아보기도 했습니다만 피곤할 뿐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배경과 상황을 제외하면 나는 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사과 작가의 이번 소설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마약을 하거나 술을 잔뜩 마신 상태에서 나누는 전혀 문학적이지 않은 대화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우리가 평소에 하는 대화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걸 또박또박 적힌 글자로 보자니 그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를 수가 없는데, 나 역시도 그렇겠구나 생각하면 씁쓸해집니다.
홍상수 영화 속의 그런 장면들을 극장에서 보면 저는 ‘하하하’ 하고 굉장히 많이 웃습니다. 웃는 지점이 남들과 어긋날 때가 많아 대체로 관객이 많지 않은 조용한 극장에서 제 웃음소리만 민망하게 울릴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사과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를 읽으면서는 피식 웃긴 했어도 ‘하하하’ 하고 웃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똑같이 우스꽝스러운데, 왜지? 생각해봤더니 극장에서의 저의 웃는 행위 역시 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고 착각하는 와중에 극장 안에 있는 다른 관객들을 의식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드는 겁니다(이봐요, 여기에서조차 저는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고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드는 겁니다’라는 어중간한 문장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장면에서 확실히 웃어줌으로써 나는 너무 평범하고 솔직해서 천박한 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내비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나’는 술은 취하지 않았으니 자신 있게 웃었겠지만, 실제로 제 안에는 그런 허영이 있습니다.
대화를 보여줄 뿐 생각은 들려줄 수 없는 영화와 달리 소설은 그 대화를 보여주기 전후의 상황 설명이 덧붙여져 있기 때문에 대화의 어떤 부분이 우습다 해도 실제로 소리 내어 웃기는 힘들다는 장르적인 차이도 물론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케이가 뉴욕에서 써머와 댄과 함께 지내는 1부, 한국에 돌아와서 주로 홍대 인근에서 재현과 연애하는 2부, 인천 사는 지원과 연애하고 이별하는 3부, 이 모든 것을 정리하는 짧은 4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김사과의 작품은 [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단편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밖에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김사과의 작풍에 대해서는 짐작하는 바가 있습니다. 워낙 ‘문제적 작가’라는 평가와 함께 그녀의 작품 경향을 논하는 글을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단편 한 편을 읽어본 저도 [천국에서]는 그간의 김사과 작품과 많이 다르(겠)다고 봤습니다.
달라진 김사과의 이번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 논평이 많이 등장합니다.
여행자가 된 도시에서는 사람들도 여행자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여행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을 일련의 풍경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풍경이 된 세상은 아름답다. 거리에 가득 찬 쓰레기에서 고급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인까지, 여행자의 시선 속에서 세상은 공평하게 아름답다. p.92
감수성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되었고, p.94
갈수록 세련되어지는 도시의 풍경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시한폭탄이 장착된 극장에서 상연되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화려한 영화와 같았다. 끔찍한 결말이 다가오고 있지만, 관객들은 여전히 화려한 이야기에 매혹되어 있었다. p.126
세계화되고 자본주의에 완전히 잠식당한 세계와 그 안에서 별다른 반성이나 상황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 없이 길들여진 개인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각 자체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지만 신랄해서 아픕니다. 저 역시 그런 여행자 중 한 명이고, 거대한 시장이 돼버린 ‘감수성’의 충실한 소비자이며, 세련되어지고 있는 도시의 풍경이 내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가끔은 내 것이라거나 내 것이 될 거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이러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세상이 그렇고 그 속을 사는 사람들도 다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래도 나는 아냐’라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면 아마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 뻔뻔함, 무조건 크고 새로운 것을 칭송하는 태도는 케이 윗세대 한국인들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케이는 그런 특징이 자신의 세대에서는 제발 멸종하기를 바랐다. 물론 그것은 심오한 통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그저 눈앞에 펼쳐진 촌스러운 광경이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윗세대도 정확히 그녀와 같은 이유에서 이 도시를 깨부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지 그들은 크고 눈에 띄는 변화를 선호하고 케이는 소박하지만 섬세한 변화를 선호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p.103
작가가 내세운 주인공 케이 역시 작가가 비판하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허영과 자기기만으로 가득 찬,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보통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 짓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이십대 초반의 여대생입니다.
‘허세 작렬’하는 사람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허세들은 대체로 자신이 타인 앞에 내세워져 있을 때 유독 작렬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의 작렬하는 허세에도 쉽게 넘어 갑니다. 그것이 허세인지 아닌지 쉽사리 구별하지 못할뿐더러, 그것을 알아챈다 해도 적지 않은 타인들이 그러한 허세의 근거들에 쉽게 매혹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적당히 그 허세에 묻어갈 수 있다면 적당히 모른척하고 그것을 긍정합니다.
J는 케이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홍대를 졸업하고 한예종에서 미디어 아트를 전공하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 영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어딘가 영국풍으로 세련되고 우수에 차 보이는 것이 근사하다고 일 년 전 처음 그를 봤을 때 케이는 생각했다. p.104
하지만 혼자 있을 때 굳이 ‘허세 작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 자신에게는 굳이 나를 포장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케이는 그러합니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자신을 포장합니다.
그저 한 가지, 인천에서 지냈던 시간만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니, 가능하면 없던 시기로 만들고 싶었다. 어차피 나쁜 꿈에 불과했지 않은가? 케이는 그 시간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고 믿었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멋져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펑크, 아나키즘, 아방가르드, 공산주의, 혁명, 마약, 히피, 섹스...... 물론 철저히 개념적인 차원에서였다. 서구의 청소년들과 달리 그 개념들을 실제로 현실에 적용해볼 자유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개인에게 허용된 유일한 표현 방식인 패션을 통해 케이는 그것들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p.142
[천국에서]는 이렇게 실제 천국은 등장하지 않고, ‘얼핏 천국으로 보이는 것’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장소로서의 천국’만 등장합니다. 진짜로 좋은 것은 하나도 나오지 않고 ‘겉으론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쁜 것’만 잔뜩 나옵니다. 그래서 작가가 만약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비관적인 관점 속에 집어넣고, 주인공만은 다르다는 식으로 자기만 혼자 쏙 빠져나왔다면 독자로서의 저는 ‘뭐야? 혼자 잘났어?’ 하며 작가에게 반감을 품는 것으로 책을 덮었겠지만, 주인공 케이가 작가가 비판하고자 하는 모든 상황과 사고방식의 정수이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자기반성을 하게 됩니다.
영국풍이니, 홍대풍이니, 중산층이니, 잠실 친구들이니 하는 구체적인 용어들은 이렇게 텍스트로 읽으면 반감이 생기지만, 이 중 어떤 것은 실제로 제가 동경했고 아직도 동경하고 있는 것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때 제가 편입되고 싶었던 세상이었고, 지금도 만약 그럴 기회가 생긴다면 거부하지 않고 들어갈 그런 세계.
만약, 그런 세계로 편입된다면 저는 앞으로 이런 텍스트들을 외면하게 될까요, 아니면 여전히 읽으면서 그래도 나는 아직 예민하게 자기반성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허세를 부릴까요.
그는 그렇게 한바탕 자신과 광주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은 뒤 공연장을 구경시켜주었다. 생각 외로 인테리어도 세련되었으며 싸운드 시스템도 훌륭했다. 하지만 뭐가 불안한지 그는 거듭 괜찮지요? 나쁘지 않지요? 서울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지요? 하고 물어댔고 그러면 케이의 일행은 반복해서 같은 칭찬을 늘어놓았다. 박씨는 이 생각 없는 젊은이들이 단지 서울에서 왔다는 이유로, 마치 서울에서 보낸 사절단이라도 되는 양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사실 진짜 멋을 아는 것은 광주 시민이고 서울은 잡탕 같은 도시라면서 폄하하기를 반복했다. p.164
또 김사과의 확언대로 그 세계는 원래부터 그 세계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면 절대 갈 수 없는 곳이라면, 저는 공연장 주인처럼 내가 속한 현재를 과도하게 긍정하면서도 여전히 그 도달할 수 없는 그 세계를 동경하게 될까요.
그럴 때마다 케이는 커다란 수족관을 떠올렸다. 수족관 속에서 열심히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 한 마리. 투명한 유리 너머로 내다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물고기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글쎄, 아무 생각도 없겠지. 하지만 생각을 한다면? 이해가 안 되겠지. 어, 나랑 같겠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해서 한번 생각을 시작한 물고기가 그걸 멈출 수가 있을까? p.331
[천국에서]를 읽으면 계속해서 책 읽기를 멈추고 ‘나’는 어떠한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은 대체로 확언보다는 질문의 형태로 발현됩니다. 괴롭습니다. 그런데 김사과는 또 한 번 좌절을 안겨줍니다. ‘한번 생각을 시작한 물고기가 그걸 멈출 수가 있을까?’라고 말하면서요.
그런 점에서 결말 부분은 의외였습니다. 케이가 수족관은 없다고 결론 내리며 그 까페에서 갑자기 일어나 가는 그곳이 어디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짐작 가는 대로라면 그건 또 좀 너무 갑작스럽달까요.
소설 속에서 원래 ‘인물’은 변하게 되어 있지만, 그러한 변화가 충분히 설득력 있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차라리 분노로 들끓는 주인공이 주변인이나 전혀 관계없는 타인을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죽이는 전작들이 오히려 더 그럴만해 보입니다. 그런 폭력적인 결말이 좋다는 게 아니라, 인물의 드라마틱한 행동이나 변화는 그만큼 충분한 계산을 가지고 그려내야 독자들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소설 전반에서 케이가 끊임없이 고뇌하고 있긴 하지만 그 고뇌의 내용 중에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를 짐작케 하는 실마리는 충분하지 않았다고 느껴집니다.
작가는 소설 전체에서 케이나 써머, 댄, 케이의 부모님, 써머의 부모님, 댄의 부모님, 재현, 지원과 지은과 그들의 아버지 등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간략하게 그들의 성장배경이나 살아온 환경 등을 꼭 서술하고 넘어갔습니다. 마치 브리핑처럼 간략하게. 그렇다보니 IMF라든지, 미국발 금융위기 같은 세계사적인 사건이나 뉴욕, 브룩클린, 잠실, 홍대, 상수동, 인천 남동공단, 광주와 같은, 각각만 가지고도 최소한 한 권의 책 분량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거대한 이슈들이 몇 줄의 문장만으로 간단히 처리됩니다. 인물들도 굉장히 단순화되죠. 어떤 특정한 세대나 상황을 표상하는 인물로 각인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그런 사람’으로 ‘그런 환경’ 속에 남겨놓고 케이만 막판에 싹 빠져나오는 듯한 결말은, 그래서 더 쉽게 납득이 가지 않고 배신감마저 느끼게 합니다.
더불어 [천국에서]를 읽으면서, 김사과가 젊은 작가이기 때문에 이토록 복잡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그토록 확고한 문장으로 쓸 수 있기도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직접 경험하지 않았거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다 경험했고 다 아는 것처럼 확언하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소위 ‘논술’이라는 것이 시험과목에 있는 직종에 취업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반은 억지로 신문을 읽고 관련 책을 찾아 읽은 시기가 있습니다. 마침 그때가 미국발 금융위기가 닥친 무렵이라 시험 문제로 많이 등장했죠. 물론 제가 아는 선에서 쓰기를 요구한 문제이긴 하지만 저만의 시각이 들어있어야만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개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논평까지 써야 했습니다. 그 논평이 우스꽝스럽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사실과 진실을 알고자 이것저것 읽고 공부했지만, 그 모든 것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큰 그림을 익히고 큰 줄기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는데, 김사과의 소설 속 논평 중에도 어떤 것들은 이런 방식을 통해 파악하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다 안다고 해서 소설 안에 구구절절 다 쓸 수 없었겠지만, 확실히 본인의 관점을 갖고 설명한 부분과 두루뭉술한 문장으로 넘어간 부분의 차이는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앞에서 이미 인용한 문장에서 케이가 그런 것처럼 ‘물론 그것은 심오한 통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고 쿨하게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역시 케이와 멀지 않은 세대이며 케이가 속한 어떤 집단과는 분명한 교집합을 갖고 있을 테니까요.
김사과가 2013년에 쓴, '모든 게 망가졌는 데 아무것도 무너져내리지 않는 세계'는 결국 이성복 시인이 1978~9년께 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그 세계와 다르지 않아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결국 모두 병들고 모든 게 망가져도 어떻게든 유지되는 곳인가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자체로 거대한 보균자이지만 결국 발병은 하지 않는, 발병은 해도 결코 죽지는 않는 거대한 질병덩어리인가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죠.
작가로서의 김사과가 독자로서의 저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그 질문들은 애초에 던진 사람조차 영원히 정답을 발견할 수 없는 난제들입니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 계속해서 질문을 잊지 않고 정답은 아니라도 자신만의 해답을 정리해나가느냐, 그냥 모른척하고 사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적어도 소설가는 살다 보니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자꾸 질문을 잊는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그리고 자기만의 이야기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앞에서 말한 이번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김사과의 다음 질문을 기다립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