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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심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13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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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심장]은 러시아의 대문호로 칭송 받는, 그러나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에 비해서는 대중적으로 덜 알려진 작가 미하일 불가꼬프의 중편 소설입니다. 미하일 불가꼬프는 오래 전 읽은 [거장과 마르가리따]를 통해 처음 알게 됐습니다. [거장과 마르가리따]는 굉장히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상세한 내용들이 다 떠오르진 않지만, 러시아나 공산주의 역사,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읽었다면 훨씬 더 재미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전에도 풍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쓰여진 작품은 많았겠지만 미하일 불가꼬프의 상상력은 남달랐습니다. 영화 장르로 말하자면 흡사 컬트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은 재미와 긴장감과 어이없음과 발상들을 맛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다, 사회 비판이나 지나간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비틀기를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두 편의 중편 <개의 심장>, <악마의 서사시>가 실려 있는 [개의 심장]도 그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대했던 <개의 심장>보다 <악마의 서사시>가 더 읽기에 즐거웠는데, 그 이유는 이 글을 쓰면서 차차 정리해볼까 합니다.

<개의 심장>은 이 책에 관심을 갖고 소개글을 읽어보셨다면 다들 아시다시피, 떠돌이개에게 사람의 뇌하수체와 생식선을 이식한 의사와 그의 조수, 그리고 그 의사의 이웃을 둘러싼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이 풍자소설, 사회비판소설로서의 명확한 꼴을 갖고 있다 보니 많은 부분들이 풍자와 은유의 대상입니다. 각 인물들과 그 이름들 역시 그 시대의 사회상과 특정 계급의 대표성을 지니죠(러시아어를 잘 안다면 훨씬 더 많은 함의를 읽어내고 언어유희의 참맛을 느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함께 남는 이유입니다).

먼저 개 샤릭을 사람 샤리꼬프로 변신시키는 의사 필립 필리뽀비치 쁘레오브라젠스키는 '변형시키다'라는 러시아어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샤릭이 샤리꼬프로 변신한 후에 이웃인 쉬본제르가 지어준 이름은 뽈리그라프 뽈리그라포비치입니다. 이는 '복사기'에서 따온 말이라고 하고요. 잘은 모르지만 젊은 의사이자 필리뽀비치의 충실한 조수인 보르멘딸리라는 이름이나 쁘롤레따리아의 대표격으로 등장하는 쉬본제르라는 이름 역시 아마도 그냥 지은 이름은 아닐 겁니다.

이는 <악마의 서사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하나 나름 인뗄리로서 성냥 공장 사무직에서 일하던 주인공의 이름은 까로뜨꼬프입니다. 까로뜨꼬프는 어느 날 회사에 불어닥친 경영난과 정리해고(?)의 위험에 맞서 소장에게 항의를 하려고 하다가 바뀐 소장의 이름 '깔리소네르'를 '깔리손(속바지)'으로 오인하는 바람에 결국 해고를 당하고 맙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동안 깔리소네르는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까로뜨꼬프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나타납니다. 까로뜨꼬프는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까로브꼬프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게 되지만, 까로브꼬프를 고용한 사람들이나 그의 동료들조차도 까로뜨꼬프와 까로브꼬프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결국 까로뜨꼬프는 '나는 까르보꼬프가 아니야'라고 절규하고 맙니다. 단순히 등장인물들의 이름 외에도 제가 미처 알 수 없는 언어유희들이 가득할 텐데 그것을 다 읽어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개의 심장> 같은 경우는 1925년에 집필을 마쳐서 1987년에 발표됐으니 무려 52년이라는 시간이나 묵혀져 있던 작품입니다. 192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의 러시아 정세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스딸린 체제와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와 의구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습니다. 실제로 이 작품이 쓰여졌던 1920년대 러시아에서는 생식 기관의 이식에 의한 인간 본성의 교정 및 우생학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의사 출신의 작가는 자신이 잘 아는 이 소재를 당시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데 아주 적절히 사용합니다. 그리고 작품을 통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그리고 웬만한 해답은 직접 주기도 하죠).

필리뽀비치는 처음부터 샤릭을 사람으로 변신시키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더 젊게 만들 수 있을지를 보려던 것이죠. 미하일 불가꼬프는 동물에게 인간의 뇌하수체와 생식선을 이식하면 더 젊고 더 건강하고 더 똑똑하게 만들 수 있는가, 동물이 본성을 버리고 인간과 같아질 수 있는가,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면 평범한 엄마들도 천재 아이들을 낳을 수가 있는데 이런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현명한가, 급진적인 변화와 무조건적인 분배가 타당한가 등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혹은 작가의 생각)은 작품 속에서 대부분 드러납니다. 이것이 스딸린 정부 이후 오랫동안 러시아에서 이 책이 출간되지 못한 이유입니다.

사람의 꼴은 갖추었으나 아직 사람으로서의 사회성을 다 익히지 못한 샤리꼬프가, 책 속에서는 비판의 대상인 쁘롤레따리아 간부 쉬본제르의 조종을 받으며, 결국은 길거리의 고양이 등을 잡는 청소과 과장으로 취직을 하게 되는 장면은 흥미롭습니다. 이 때 샤릭은 이미 샤리꼬프이지만, 왠지 경찰복을 입고 있는 개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이 역시 작가가 의도한 바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사람의 형상은 갖추었지만 하는 행동은 여전히 완전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게 묘사해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를 사람 몸에 개의 얼굴을 한 모습으로 상상하게 되니까요(저만 그런가요?=_=).

<개의 심장>이 발랄한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각각의 인물이나 상황 묘사가 현실에서의 무엇을 은유하는지가 비교적 명확하게 대입되는 작품이었다면 <악마의 서사시>는 작가의 좀 더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도드라지는 작품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월급을 불도 붙지 않는 불량 성냥으로 주던 성냥 공장에서 해고 당하고, 지갑까지 잃어버려 신분조차 증명하기 어려워진 까로뜨꼬프가 처한 혼란스러움을 주로 다룹니다. 수염이 있는 깔리소네르를 금방 여기서 봤는데 또 금방 저기서 수염이 없는 깔리소네르가 나타난다던가, 불만처리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서랍 속에서 등장한다던가, 뜬금 없이 자기를 바치겠다고 하는 여자가 나타나 까로뜨고플를 당황하게 한다던가 하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패닉입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들과 <지구를 지켜라> 같은 한국의 컬트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들이 마구 뒤섞여있는 것 같은 작품이랄까요.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등장인물들이 등장해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는데, 그 상황을 까로뜨꼬프와 함께 따라가다 보면 저도 같이 정신이 없어집니다. 숨이 차고 마음이 급해지고 빨리 이 상황을 해결하고 벗어나고 싶어집니다. 그러는 동시에 웃기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말이죠. 미하일 불가꼬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거장과 마르가리따]와 비교하자면 <개의 심장>보다는 오히려 <악마의 서사시>가 더 [거장과 마르가리따]의 뿌리처럼 느껴집니다.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까로뜨꼬프가 정작 자신이 잘못한 것 없이 이상한 상황 속에서 이상하게 시달리다가 결국은 정신병자로 오인 받고 그러한 결말을 맞게 되는 것 역시 명확하게 그 당시 사회에 대한 불가꼬프의 비판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은 곳에 올라가 스스로 투신하고 마는 까로뜨꼬프가, 실제로는 땅으로 떨어지고 있지만 머리가 바닥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건물들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끼는 장면은 굉장히 짠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개의 심장>에서 주는 인상과는 달리, 작가는 쁘롤레따리아 계급에 특별한 비판을 한다기보다, 러시아 사회를 그러한 분위기로 몰고간 정부에 더 큰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까로뜨꼬프가 불만처리사무소(?)에 가기 위해 찾아간 건물은 흡사 배명훈 작가의 <타워>와 비슷한 인상을 주는데 배명훈 작가가 비판하고자 하는 바와 미하일 불가꼬프가 보여주고자 하는 당대의 분위기나 현실이 비슷하기도 합니다.

 

원래 시기가 흉흉하고 검열이 심할수록 문학에서는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하지만, 1920년대에 이같은 상상력의 작품들을 써낼 수 있었다는 점은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하일 불가꼬프에 견주어 비슷하거나 이를 능가하는 작가나 작풍은 흔치 않으니 말입니다. 굉장한 개성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현대의 많은 컬트무비나 B급무비 감독들이 미하일 불가꼬프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감독들을 만나면 한 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혹시 미하일 불가꼬프의 작품을 좋아하냐고 말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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