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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을 샀어
조경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평점 :
인간은 누구나 외롭고 고독하다. 혼자이건 누구와 함께건, 또는 어린 시절을 연장한 어른이건 가족을 이루고 있는 어른이건, 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건 아니건, 정신질환을 가진 환자이건 그 환자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든 말이다. 그래서 여기 조경란이 선사하는 위로의 책이 있다. 그건 간혹 사랑이 되기도 하고 우정이 되기도 하고 문학이나 철학 등의 책이 될 수도 있고 그 책의 작가나 또는 독자가 되기도 한다.
어찌 보면 그녀는 이미 우리에게 외로움과 고독의 치유를 <식빵 굽는 시간>부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고소한 빵 냄새로 우리를 위로하듯이 말이다. 또한 세련된 문체로 깔끔한 문학을 선사하던 조경란이 정열적이고 치명적인 사랑과 성애를 음식을 통해 최고로 지독한 복수를 하는 <혀>로 이어 놓았다. 그리고 이번엔 문학과 철학으로, 책과 글쓰기로 연결시켜 준다.
<풍선을 샀어>에서는 사람들과의 관계보다는 니체의 학문 속으로 들어갔던 여자와 공포증을 앓고 있는 젊은이의 권리가 스스로에 대한, 타인에 대한 위로이다. 따로따로 외롭고 고독하던 너와 내가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관습과 질서에 얽매여, 잊고 있던 우리의 권리가 바로 그 위로이다. 따로 홀로 떨어져있던 동안 잊고 있었던 권리를 되찾는 게 바로 그 위로인 것이다. 너와 나는 그럴 권리가 있는 것이다.
‘J, 너는 실수할 권리가 있고 도움을 청할 권리가 있고 분노를 느낄 권리가 있고 울 권리가 있고 놀랄 권리가 있고 마음이 변할 권리가 있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J, 너 자신을 즐겁게 할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타인을 미워할 권리가 있어. 마지막으로 나는 말했다. 그리고 J, 너는 운전을 할 권리가 있어. (...) 내가 가진 권리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에게는 아프다고 말할 권리가 있고 책을 읽을 권리가 있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그에게 의지할 권리가 있고 진실을 말할 권리가 있고 잠을 잘 권리가 있다. 나에게는 토마스의 위로와 충고에 저항할 권리가 있고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있고 J를 생각해도 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책이 있다. 철학과 문학이 있다. 그래서 <형란의 첫 번째 책>에선 ‘쓴다는 건 종이 위에 나를, 나의 표상 하나를 거기에 내려놓는다는 게 아닐까요.’라는 여자의 말이 마치 자신의 삶에 대한 책을 자신이 쓰는 듯한 느낌을 주며, 길을 잃고 헤매는 남편에게도 메시지를 전해준다.
‘시간이 흐른 후 나도 나의 삶을 살았다, 썼다, 그리고 사랑했다, 라고 짧게 요약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아주 실패한 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예요. 쓰야키 씨, 혹시 그를 만난다면 이렇게 전해주시겠어요? 그가 맨 처음 글을 쓰기로 했을 때, 그것은 삶을 위해서였다는 걸 부디 잊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위로를 만나기도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를 만났다>에서는 작가를 만나고 작가의 얘기를 듣는다. 마치 그녀를 보고 그녀의 말을 들으며 스스로 위로를 받듯이. 또한 ‘내가 만약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그냥 빈 종이로만 남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작가에게 이별을 고하고 스스로 안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2007, 여름의 환>에서 이 위로의 방법은 바로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변호하고 숨어버리고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하는 내 거짓말은 온전히 내 것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여덟 가지 분류 중 거의 모든 사항에 속할 만큼 다양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아무 이유가 없을 때가 많다. 나는 그것이 진정한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거짓말쟁이는 진정한 미식가처럼 혀로 음식을 맛보거나 말을 밖으로 뱉어낸 후 입술이 맞닿은 뒤에 탄성이 이어지는 정교한 소리에 큰 만족감과 기쁨을 느낀다.’<마흔에 대한 추측>에서는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변화를 느끼고 그에게도 위로가 되는 ‘나’가 있다. ‘닥터 현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귀를 열자, 이야기가 열렸다. 세상에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그것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그를 통해 나를 발견하고 세상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를 그 세상 속에 넣을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그에게도 나 자신 세상의 창구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조경란은 이렇게 말한다. ‘책 자체가 좋습니다. 위안과 힘이 되는 책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책을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서 저는 사랑의 가능성과 일상적인 것들 안에 감추어진 변화의 힘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꽃 피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말하고, 그것을 글로 쓸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풍선을 샀어>, 이 작품집으로 한편 고독해졌지만 또 한편 그 고독에 대한 위로를 배로 받았다. 외롭고 힘들 때,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장벽이 나타났을 때, 도무지 나를,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을 때, 어딘가로 숨어버리거나 홀로 우는 대신 풍선을 불어보자. “후후훕, 훕훕-” 그러고 나면 온 힘을 다해 풍선을 불었듯, 앞으로 나아갈, 변화를 가져올 어떤, ‘삶의 특별한 의지’가 생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