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일기
이승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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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승우를 알게 된 건 <생의 이면>으로였다. 고요한 일상의 이면에 감춰진 비극적인 가족사에 공포스럽고 그 암울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그만큼 훌륭하고 멋진 작품이었다. 그래서 이승우는 내게 범접하기 힘든 작가였다. 미리 심호흡을 해야 읽을 수 있는 작가였다. 그러다 아홉 편의 단편으로 엮인 이 작품을 만났다. 읽으면서 느낀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여전히 훌륭한 작품들에 고마움을 느끼고 또 다른 하나는 전작처럼 그토록 치열한 비극적인 작품들은 아니라는 면에서 안도감을 느낀 것이었다.

작품마다 일상적인 이야기들이었지만 또 일상적이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왜냐하면 삶에는 예기치 않은 일들이 내가 원하지 않아도 일어나고 그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를 꿈꾼 적 없건만 어느 날 작가가 되어 있고, 작가가 꿈이었던 사촌 규는 작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진정한 작가는 누구이고 진정한 독자는 누구였을까. 과연 말이다.    

<규는 자기가 이해할 수 없고, 자기를 이해해주지 않는 세계에서 살았다. 자기를 이해해줄 수 없는 세계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존재방식이 부유였다는 것이 어렴풋하게 깨달아졌다. 존재의 최소한의 방식, 유령이 되지 않기 위해 그는 부유하는 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오래된 일기

집도 잃고 직장도 잃은 나는 찜질방을 전전하다가 어느 날 옛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그런데 그녀는 의외로 자신이 외국에 가 있을 동안 집을 봐달라고 한다. 일석이조 아니냐면서. 이를 받아들인 나는 그 집으로 가 머문다. 그러다 알게 된 아래층 노인이 하는 그녀에 대한 얘기는 내가 그녀에게 들은 것과 다르다. 그리고 잠긴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들꽃 향기가 이상하다.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나 다를지 모른다.
   
<자신의 생명을 조금씩 떼어내서 하루씩 삶을 연명하는 거랍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삶을 내놓아야 하는 거지요. 그것이 인생이에요. 떼어낼 것이 없으면 삶도 멈추는 것이겠지요. 아마 그런 말을 해줬을 거예요.> -타인의 집

<타인의 집>에서 상상으로만 던졌던 이런 현실 괴리의 이야기는 곧바로 이어지는 <전기수 이야기>에서 결말에 멋진 반전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작품마다 다 읽고 나서 맨 앞으로 돌아가 서두를 다시 읽어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던 작가는 다시 우리의 일상성으로 돌아온다. 개인적이다 못해 이기적인 내가 왜 정남진엘 갔을까. 결국 시간 때우기로 하는 감정싸움이나 바보들의 사랑에 대한 착각이 어쩌면 우리 삶에 존재하는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한번 돌아보게 한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이승우만의 그 무엇이다. 이처럼 일상적인 이야기들이었지만 일상적이지만은 않았던 멋진 작품집이었다.    

<내 눈에는 순전히 시간 때우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런 짓을 하면서 그 바보들은 자기들이 사랑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보통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다. 감정과 책임의 최소화, 그것이 내가 우정이든 애정이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독립성을 잃지 않는 길이라고 내세우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이라고 비난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남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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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 비해 작년엔 많이 못 읽었지만 그냥 넘어가면 섭섭할 거 같아 2008년에 읽은 책 리스트를 올린다. 여기 저기 카페활동을 활발히 하고 취향이 아닌 책들도 많이 받아 읽었던 재작년에 비하면 작년엔 웬만한 카페활동은 전반기에 다 접어 리뷰어로 활동한 것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주로 내가 좋아하는 문학 책들을 많이 읽은 한 해였다. 여전히 선물 받는 책들, 새로 구입하는 책들이 내가 읽는 책들을 따라가지 못해 읽어야 할 책들은 책장에 쌓이기만 한다. 그래도 작년 한 해, 결과도 적었고 그나마 만족스러운 결과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열심히 일했던 터라 만족한다. 그러면서도 나름 열심히 책 읽었으니 기특하기도 하고. *^^* 자, 이제 새해엔 어떤 재밌는 책이 나올까... 
 

1. <호기심> 김리리 등저, 창비 ★
2. <버스 탈취 사건> 미사키 아키 저, 전새롬 역, 지니북스
3. <혀> 조경란, 문학동네 ★♥
4. <유쾌한 하녀 마리사> 천명관, 문학동네
5. <사랑하기 때문에> 기욤 뮈소 저, 전미연 역, 밝은세상
6. <왕의 투쟁> 함규진 저, 페이퍼로드
7.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 1> 랄프 이자우 저, 유혜자 역, 비룡소
8. <달을 먹다> 김진규 저, 문학동네 ★♥
9. <로맨스 약국> 박현주 저, 노석미 그림, 마음산책
10. <비> 마르탱 파주 저, 발레리 해밀 그림, 이상해 역, 열림원
11.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에쿠니 가오리 저, 김난주 역, 소담 ★♥
12. <냉정과 열정 사이 Blu> 츠치 히토나리 저, 양억관 역, 소담 
13. <Q&A> 비카스 스와루프 저, 강주헌 역, 문학동네 ★♥
14. <걸프렌즈> 이홍 저, 민음사 
15. <행복한 거짓말>, 기무라 유이치 저, 임희선 역, 지상사 
16. <개를 돌봐줘>, J.M. 에르 저, 이상해 역, 작가정신 ♥
17. <피티 이야기>, 벤 마이켈슨 저, 홍한별 역, 양철북 ★
18. <빌리 엘리어트>, 멜빈 버지스, 리홀 공저, 정해영 역, 박선영 그림, 프로메테우스  ★♥
19. <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창비 
20. <내 아내의 에로틱한 잠재력>, 다비드 포앙키노스 저, 김경태 역, 문학동네 
21. <조선이 버린 여인들>, 손경희 저, 글항아리 ★
22.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저, 김연수 역, 문학동네 
23. <하드보일드 에그>, 오기와라 히로시 저, 서혜영 역, 작가정신 ★♥
24. <구해줘>, 기욤 뮈소 저, 윤미연 역, 밝은 세상 ♥
25. <기다림>, 하진 저, 김연수 역, 시공사 
26. <샤갈이 그린 라퐁텐 우화집>, 장드 라퐁텐 저, 마르크 샤갈 그림, 최인경 역, 지엔씨미디어 ♥ 
27. <밥은 굶어도 스타일은 굶지 않는다>, 김예진 저, 콜로세움 ★
28. <간절하게 참 철없이>, 안도현, 창비 ♥
29. <플라스틱 물고기>, 김지현, 문학동네
30.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저, 김병욱 역, 여름언덕
31. <그래서 우리는 떠났어>, 지빌레 베르크 저, 구연정 역, 창비 
32. <런던 미술 수업>, 최선희 저, 아트북스 ★♥
33. <엄마에겐 남자가 필요해>, 한경혜 저, 랜덤하우스코리아 
34. <쿨하게 한 걸음>, 서유미, 창비 ★
35. <완득이>, 김려령, 창비 ★♥★♥★♥★♥★♥  
 

 

 

 

 

 

 

36.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맥카시 저, 임재서 역, 사피엔스21 ★♥
37. <연민>, 슈테판 츠바이크 저, 이온화 역, 지식의 숲 ★♥
38. <자살토끼>, 앤디 라일리 저, 거름 
39. <친절한 조선사>, 최형국 저, 미루나무 ★ 
40. <당신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니콜 드뷔롱 저, 박경혜 역, 푸른길  
41. <일곱 방울의 피>, 엘리에트 아베카시스 저, 홍은주 역, 문학동네
42. <책만 보는 바보>, 안소영 지음, 강남미 그림, 보림 ★♡
43.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 박주영 저, 문학동네
44. <막스 티볼리의 고백>, 앤드루 숀 그리어 저, 윤희기 옮김, 시공사 ★♡
45. <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저, 이선희 역, 바움
46. <조선의 영혼을 훔친 노래들>, 김용찬 저, 인물과사상사 ★
47. <레닌이 있는 풍경>, 이상엽 글, 사진, 산책자
48. <연애를 인터뷰하다>, 이동준 저, 웅진윙스
49.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 이지민 저, 문학동네
50. <사월의 마녀>, 마이굴 악셀손 저, 박현용 역, 문학동네
51. <애들이 이상해!>, 앙토넹 프와레, 아멜리 그로 글, 아멜리그로 그림, 이재원 옮김, 길벗어린이 ★
52. <거미와 파리>, 메리 호위트 글, 토니 디터리지 그림, 장경렬 역, 열린 어린이 ★
53. <장미마을의 초승달 빵집>, 모이치 구미코 글, 나카무라 에스코 그림, 한림출판사 ★♡
54.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 사토 와키코 글, 그림, 이영준 옮김, 한림출판사 ★
55. <개구리의 낮잠>, 미야니시 타츠야 글, 그림, 한수연 역, 시공주니어 ★
56. <고맙습니다, 선생님>, 패트리샤 폴라코 저, 서애경 역, 아이세움 ★
57. <봉섭이 가라사대>, 손홍규, 창비
58. <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 문학동네 ★♥  

 

 

 

 

 

 


59.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 이욱연, 창비 ★♥★♥★♥★♥★♥
60. <두개의 눈을 가진 아일랜드>, 임진평 글과 사진, 위즈덤피플 ★♥
61. <에덴의 악녀>, 페이 웰던 저, 김석희 옮김, 쿠오레
62. <촐라체>, 박범신, 푸른숲 ★
63. <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저, 김관오 역, 아르테
64. <목신의 어떤 오후>, 정영문, 문학동네
65. <위험한 관계>, 드 라클로 저, 박인철 역, 문학사상사 ♥
66. <로드>, 코맥 매카시 저, 정영목 역, 문학동네 ★
67. <행복한 만찬>, 공선옥, 달 ♥
68. <단원 그림책>, 최석조 저, 아트북스 ★♥
69. <여행할 권리>, 김연수, 창비 ★
70. <몽실 언니>, 권정생, 창비 ★
71.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이지형, 문학동네 ♥
72. <꽃게 무덤>, 권지예, 문학동네 ★
73. <키다리 아저씨>, 진 웹스터, 민병덕 역, 정산 미디어 ♥
74. <꽃피는 고래>, 김형경, 창비
75.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안도현, 창비 ★
76. <레트 버틀러의 사람들>, 도널드 매케이그 저, 박아람 역, 레드박스
77.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 공선옥, 삼신각 ★♥
78.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공선옥, 창비 ★♥
79. <광기의 풍토>, 이스마엘 카다레 저, 이창실 역, 문학동네
80. <그것은 꿈이었을까>, 은희경, 문학동네
81. <우리 독도에서 온 편지>, 윤문영 글, 그림, 계수나무 ★
82. <박뛰엄이 노는 법>, 김기정 글, 허구 그림, 계수나무 ♥
83. <카페 여주인>, 레몽 장 저, 이재룡 역, 세계사
84. <엄마, 할 수 있다고 말해 주세요>, 이프 스타위바에르트 글, 위정현 역, 계수나무
85. <달팽이는 왜 집을 지고 다닐까요?>, 브리기테 라브 글, 송경희 역, 계수나무 ★♥
86. <곱게 늙은 절집>, 심인보 저, 지안출판사 ★♥
87. <침대와 책>, 정혜윤 저, 웅진지식하우스 ♥
88. <엄마의 집>, 전경린 저, 열림원 ♥
89. <굿바이 미스터 하필>, 김진경 저, 문학동네
90. <삼대>, 염상섭, 문학과 지성사 ★♥
91. <개밥바라기별>, 황석영, 문학동네 ★
92-93. <심청> 상, 하, 황석영, 문학동네
94.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모리미 토미히코, 서혜영역, 작가정신 ♥
95. <무중력증후군>, 윤고은, 한겨레출판
96. <어쩌면 후르츠 캔디>, 이근미, 달 ♥
97.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햇빛 출판사 ★♥
98. <오 나의 마나님>, 다비드 아비께르, 김윤진역, 창비 ★♥
99. <나의 도시 당신의 풍경>, 임재천사진/김경범디자인, 김연수 등저, 문학동네 ★♥
100. <그린 핑거>, 김윤영, 창비 ★
101. <야생초 편지>, 황대권 글, 그림, 도솔 ★♥
102.-103. <남쪽으로 튀어> 1, 2, 오쿠다 히데오, 양윤옥옮김, 은행나무
104. <서라벌 사람들>, 심윤경, 실천문학사 ♥
105. <즐거운 장난>, 전아리, 문학동네 ★
106. <청구회의 추억>, 신영복, 돌베개 ★♥
107. <위험한 독서>, 김경욱, 문학동네
108. <지금 행복해>, 성석제, 창비 ★♥
109.-110. <본격소설> 상, 하, 미즈무라 미나에, 김춘미역, 문학동네
111. <초정리 편지> 배유안, 창비 ★♥
112. <파란 섬의 아이>, 이네스 카냐티, 최정수역, 문학동네 
 

 

 

 

 

  

113.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창비 ★♥★♥★♥★♥★♥
114. <제주 걷기 여행>, 서명숙, 북하우스 ★♥★♥★♥★♥★♥
 

 

 

 

 

 

115. <영원한 것은 없기에>, 로랑스 타르디외, 이창실역, 문학동네
116. <거기, 당신>, 윤성희, 문학동네 ★♥
117. <귀뚜라미가 온다>, 백가흠, 문학동네 ★
118.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권상미역, 문학동네 ★
119. <풍선을 샀어>, 조경란, 문학과지성사 ★
120. <유령비행기>, 죠 메노, 김현섭역, 늘봄
121.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스티븐 갤러웨이, 우달임역, 문학동네 ★♥
122. <작은 거인>, 고정욱, 김담 그림, 가교 ★ 
123. <오래된 일기>, 이승우, 창비 ★
124. <열병의 계절>, 로리 할츠 앤더슨, 김영선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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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9-01-05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많이 읽으셨네요. 전 지난 해 감히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저조하게 읽었습니다.ㅜ.ㅜ
올해도 좋은 책 많이 읽으시고 내내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빌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진달래 2009-01-07 10:13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오랜만이에요. ^^
스텔라님은 책 읽는 대신에 공부도 많이 하시고 다른 내공 쌓으셨잖아요.
전 책만 봤는데도 많이 못 봤어요. ^^;;
올 한 해는 더 열심히 공부하고 책보고 해야겠어요.
스텔라님도 행복하고 즐거운 독서 하시는 한 해 되셔요~ ^^
 
유령비행기 - 팝아트 소설가 죠 메노 단편집
죠 메노 지음, 김현섭 옮김 / 늘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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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에는 태풍, 지진, 전쟁, 홍수 등 재난과 재앙이 끊이질 않는다. 자연적인 재앙도 있고 인간의 우둔함과 어리석음으로 만들어지는 재난도 많다. 인간사, 세상사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니 받아들이고 살아라 한다면 할 말 없다.
하지만 유령비행기의 이 작가, 죠메노는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독특하고 짧은 단편을 스무 편이나 우리에게 선사하면서 말이다. ‘대형 참사에서부터 일상적인 비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재난을 잠재우려는 의미를 갖고’ 이 단편들을 썼다고 한다. ‘재앙에 직면함으로써, 우리가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얼마나 서로 닮은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지 않느냐고 말이다. 어쩌면 그가 말하듯이 우리 모두 이 재앙에 속해 있으면서 일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우리 모두 닮아가듯이. 그러면서 우리 모두 어쩌면 위로를 받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보다 더 독특한 그림들은 보너스다.  
지독한 외로움이 느껴지는 <1973년 스톡홀름>에서 누군가는 은행을 털러가고 친구는 은행털이범에게 힘이 되기 위해 달려가고 인질을 잡고 며칠을 보낸다. 이게 바로 경찰보다 인질범을 더 신뢰하고 인질범에게 연민을 갖게 되는 ‘스톡홀름 신드롬’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되는 에피소드이다. 친구였던 사람들은 친구가 아니게 되고 적이었던 사람들은 연인이 되기도 하는 게 이 세상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건드리기만 하면 구름이 되어도 남자는 여자에게 키스를 한다. 구름이 되더라도 그게 이 세상 전체보다 더 가치 있는 거니까.
‘그러나 아마도 그녀에게 키스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권태와 맞먹을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구름이 되어간다>
<너는 놀라운 여학생이다>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정말 나쁜 짓을 하려던 소년은 놀라운 소녀를 만나 서로에게 상상도 못할 도움이 된다.  <나는 파티 걸의 고요한 순간을 원한다>에서 잡동사니를 수집하는 이유를 그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이 삶이란 하나의 연속적인 비극이란 것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나는 파티 걸의 고요한 순간을 원한다>
수많은 사람들처럼 역시 길을 잃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전화를 한다. ‘아니다. 나는 괜찮아. 그냥 너무 외로워서 전화한 거다. 라디오에서는 같은 노래만 흘러나오고 해서,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란다.’ -<달의 건축양식>
“그러니까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훌륭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찾아내야만 해.” -<유령비행기>
‘밖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이것이 둘이서 함께 바라보는 마지막 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모든 어리석은 일들이 의미를 가진다. 엘리자베스는 최후의 설탕 입힌 컵케이크를 먹을 것이다. 최후의 양말 한 켤레를 신을 것이다. 최후의 핫 초콜릿을 마실 것이다. 핫 초콜릿을 마시다가 혀를 데는 것도 마지막일 것이다. 혀를 덴 것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도 마지막을 것이다. 재채기를 하는 것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 머리를 적시는 것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 늙어가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 잠드는 것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 꿈을 꾸는 것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 -<빛의 에어포트>

마지막이란 건 그렇다. 모든 의미 없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거, 그래서 이 삶이 더 단단하게 우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거, 그래서 더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거, 그런 거 같다. 최초는 사람을 설레게 하고 최후는 사람을 애틋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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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스티븐 갤러웨이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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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모르지만, 전쟁은 여러분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이 말은 책의 서두에 작가가 소개하는 레온 트로츠키의 말이다. 전쟁이라는 단어처럼 사람을 참 난감하고 처참하게 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내가 원한 게 아닌데, 내 잘못이 아닌데, 도대체 왜 전쟁은 우리 한가운데로 들어와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가족을 산산조각내고 내 목숨까지도 노리는 것일까. 전쟁이 우리에게 진정 나쁜 건, 우리가 우리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가족과 사회, 세상에 쌓아온 사랑과 애정을 산산이 박살내고 먹고 자고 마셔야 하는 우리의 일차적인 본성을 날 것 그대로 되살려 내기 때문에 극한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동물이 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을 위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희망을 어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 전쟁 가운데에서 생존해야 하고 살아내야만 하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그래서 더 마음 아프고 뼈가 저릴 지경이었다. 

‘현대 전쟁사에서 가장 긴 도시 점령으로 기록된 ‘사라예보 점령’은 1992년 4월 5일부터 1996년 2월 29일까지 지속됐다. 유엔 추산에 따르면 만 명가량의 사람들이 죽었고 오만육천 명이 다쳤다. 하루 평균 329개의 포탄이 도시에 떨어졌고, 1993년 7월 22일의 3,777개가 하루 최고치였다. 약 50만 인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만 채의 아파트가 파괴됐고, 십만 채가 훼손됐다. 전체 건물의 23퍼센트가 심각하게 훼손됐고, 그보다 많은 64퍼센트가 일부 훼손됐다. 2007년 10월 현재, 보스니아 세르비아 군대의 지휘관인 라도반 카라지치와 라트코 믈라디치는 헤이그 국제유고전범재판소에 의해 전시범죄, 대량학살, 반인류범죄 등의 죄목으로 기소당한 상태지만 아직 잡히지 않았다.’

이는 작가가 말하는 사라예보의 실제 상황이었다. 실존 인물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이 작품에는 첼리스트와 애로라는 스나이퍼 그리고 평범한(!) 몇 사람이 등장한다. 이들 모두 평온한 때에는 각자의 삶을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사라예보가 전쟁에 휩싸이고 도시가 지형적으로 사면이 언덕으로 둘러싸인 긴 띠 모양의 편평한 땅이고, 그로 인해 언덕 위의 적들은 건물로 박격포탄을 날리고 언제 어디서 스나이퍼의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첼리스트는 사라예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리스트였다. 어느 날, 빵을 사려고 줄을 선 시민들에게 박격포탄이 떨어진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가운데 22명이 죽었다. 그래서 첼리스트는 이들을 애도하기 위해 박격포탄이 떨어져 구멍이 난 장소에서 22일 동안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연주하기로 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케난은 전쟁이 일어나도 사람들이 서로 도울 거라는 신념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가족을 위해, 손잡이도 없는 물병을 주는 이웃을 위해 물을 가지러 적들의 스나이퍼가 노리는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다. 전쟁 전에 사격선수였던 애로는 군대에 의해 스나이퍼로 차출되어 적들의 군인들을 죽이다 첼리스트를 사수하라는 명을 받는다. 아내와 아들을 간신히 외국으로 보낸 드라간은 빵집에서 잠깐씩 일하는데 그건 그나마 그가 먹고사는 최적의 일이다. 이들은 전쟁 중에서도 최소한의 원칙을 지키려고, 인간의 존엄성을 최대한 지키면서 생존하려고 애쓴다. 목숨을 걸고.     

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생존하는 것이다. 군인은 총을 쏘고 첼리스트는 첼로를 연주하고 길거리에 시체가 뒹굴게 내버려두지 않고 약이 필요한 환자가 있는데, 죄수처럼 집에만 머물고 싶지 않아 약을 들고 적의 총알이 날아드는 거리로 나서는 것이다. 

<“어떤 여자가 친구를 초대했어요. 친구가 돌아오자, 여자는 커피 한잔 줄까 하고 물어요. 아니, 괜찮아 하고 친구가 대답하죠. 그랬더니 여자가 말해요. 잘됐다, 그걸로 샤워를 할 수 있겠어, 라고요.” 전에 들어본 농담이지만, 그래도 드라간은 웃는다. 이 농담은 다섯 가지 정도의 변형된 버전이 있는데, 그때마다 주인공 여자는 말도 안 되는 적은 양의 물로 뭔가 엄청난 일을 해낸다. 이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드라간은 이제 물 반 리터로 몸 전체를 씻을 수 있다. 반은 씻는 데 쓰고, 반은 헹구는 데 쓴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할 만하다. 따뜻한 물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극한의 상황에서 이렇듯 씁쓸한 유머를 할 수밖에 없지만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보란 듯이(!),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생존하는 이들에게 한편 박수를 보냈고 또 한편 희망이 벅찼다. 최악의 것을 만들어내는 것도 인간이지만 최선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인간이다. 정말 감동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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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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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주위에 우표를 모으는 친구나 오빠 들이 있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우표 가운데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이라는, 이름도 특이한 나라의 우표들이 있었다. 그 우표들이 어땠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 세상 어딘가에 도미니카라는 자그마한 나라가 있고 그 안에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거라는 신비함 같은 건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자라면서 물론 그렇게 작은 나라에서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이 작은 책 한 권으로 그들의 삶 정치 사회 역사까지 단번에 어우르게 되었다. 오스카와 그의 가족 이야기 덕분에.   
남아메리카 어딘가에 존재하는 작은 나라 도미니카, 그 나라의 수도인 산토도밍고에 살았고 이후엔 미국에 이민자로 살았던 오스카와 그의 가족 이야기가 마치 현대 세계사 안에서 정말 전형적인 인간사, 가족사, 정치사를 겪은 것처럼 광대하게 펼쳐진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대를 살았던 한 가족의 이야기가 격변의 회오리에 휘몰아 들어가듯이 나도 이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어떤 여자라도 홀릴 정도의 몸매와 기술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고 여자라면 또 누구나 자신의 얼굴이나 몸매의 미를 한껏 자랑해도 되는 나라, 숨기는 것 없이 거침없는 사랑, 내숭 떨 필요 없는 연애, 들이대고 받아들이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관습과 습관 속에 녹아 있는 만남이 정상인, 어찌 보면 관능이 살아 숨 쉬는 나라에서 오스카는 예외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엔 마가 낀 것이다. 어릴 때부터 책만 보고 몸은 점점 뚱뚱해져 왕따가 될 정도고, 연애엔 꼴통이다 싶을 정도로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고, 필이 꽂히고 말이 좀 통한다 싶은 여자마다 그저 친구 관계로만 머물고, 어쩌다 정말 인연이다 싶은 여자에겐 이미 다른 남자가 있었다. 그래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그의 성미 때문에 끝 간  데까지 가는 그의 사랑 방식엔 집요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다.
게다가 그의 엄마 누나 심지어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독재자의 나라에서 자신을 지키기가, 가족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알게 되고, 그 시절에 난무하던 폭력과 잔인함에 치를 떨게 된다. 이성과 합리성은 필요 없는 것이다. 권력과 힘이 모든 걸 결정하고 좌지우지한다. 그에 휘둘리는 국민 개개인들은 언제 그 삶이, 그 일상이 파괴되고 짓이겨질지 모르는 것이다. ‘깜둥이는 꼭 저주가 아니더라도 허다하게 죽어나갈 만큼 세상은 비극으로 가득하다.’ 이런 세상이었으니까. 
그 와중에 사랑을 삶의 지표로 삼고 심지어 목숨까지 거는 사람들은 사랑이 관능과 달콤함만 선사하는 게 아니라 배신과 후회, 씁쓸함까지 동반한다는 걸 망각한다. 그것도 너무 어린 나이에 말이다. 그게 오스카 엄마의 삶이었다. 이에 가족의 관계까지 위협받는 일상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가족 간의 버팀목이나 위로가 되기보다 상처가 되고 치유할 수 없는 흉터가 되는 것이다.
오스카 와오는 짧지만 놀라운 삶을 살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변도 살피지 않는 사랑의 삶을.
문체가 무척 시원스럽고 인물들의 성격만큼이나 거침이 없고 읽기에 유쾌하고 즐겁다. 일상이 무료하고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이 작품으로 다시 활기를 찾게 되지 않을까. 인생은 굵고 짧게! (비록 길고 가느다란 인생을 살고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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