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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일기
이승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평점 :
처음 이승우를 알게 된 건 <생의 이면>으로였다. 고요한 일상의 이면에 감춰진 비극적인 가족사에 공포스럽고 그 암울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그만큼 훌륭하고 멋진 작품이었다. 그래서 이승우는 내게 범접하기 힘든 작가였다. 미리 심호흡을 해야 읽을 수 있는 작가였다. 그러다 아홉 편의 단편으로 엮인 이 작품을 만났다. 읽으면서 느낀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여전히 훌륭한 작품들에 고마움을 느끼고 또 다른 하나는 전작처럼 그토록 치열한 비극적인 작품들은 아니라는 면에서 안도감을 느낀 것이었다.
작품마다 일상적인 이야기들이었지만 또 일상적이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왜냐하면 삶에는 예기치 않은 일들이 내가 원하지 않아도 일어나고 그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를 꿈꾼 적 없건만 어느 날 작가가 되어 있고, 작가가 꿈이었던 사촌 규는 작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진정한 작가는 누구이고 진정한 독자는 누구였을까. 과연 말이다.
<규는 자기가 이해할 수 없고, 자기를 이해해주지 않는 세계에서 살았다. 자기를 이해해줄 수 없는 세계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존재방식이 부유였다는 것이 어렴풋하게 깨달아졌다. 존재의 최소한의 방식, 유령이 되지 않기 위해 그는 부유하는 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오래된 일기
집도 잃고 직장도 잃은 나는 찜질방을 전전하다가 어느 날 옛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그런데 그녀는 의외로 자신이 외국에 가 있을 동안 집을 봐달라고 한다. 일석이조 아니냐면서. 이를 받아들인 나는 그 집으로 가 머문다. 그러다 알게 된 아래층 노인이 하는 그녀에 대한 얘기는 내가 그녀에게 들은 것과 다르다. 그리고 잠긴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들꽃 향기가 이상하다.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나 다를지 모른다.
<자신의 생명을 조금씩 떼어내서 하루씩 삶을 연명하는 거랍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삶을 내놓아야 하는 거지요. 그것이 인생이에요. 떼어낼 것이 없으면 삶도 멈추는 것이겠지요. 아마 그런 말을 해줬을 거예요.> -타인의 집
<타인의 집>에서 상상으로만 던졌던 이런 현실 괴리의 이야기는 곧바로 이어지는 <전기수 이야기>에서 결말에 멋진 반전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작품마다 다 읽고 나서 맨 앞으로 돌아가 서두를 다시 읽어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던 작가는 다시 우리의 일상성으로 돌아온다. 개인적이다 못해 이기적인 내가 왜 정남진엘 갔을까. 결국 시간 때우기로 하는 감정싸움이나 바보들의 사랑에 대한 착각이 어쩌면 우리 삶에 존재하는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한번 돌아보게 한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이승우만의 그 무엇이다. 이처럼 일상적인 이야기들이었지만 일상적이지만은 않았던 멋진 작품집이었다.
<내 눈에는 순전히 시간 때우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런 짓을 하면서 그 바보들은 자기들이 사랑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보통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다. 감정과 책임의 최소화, 그것이 내가 우정이든 애정이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독립성을 잃지 않는 길이라고 내세우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이라고 비난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남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