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이야기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수첩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출판사가 어떤 책을 낼 때는 그 책과 저자와 독자 모두에게 한 가지 책임이 있다. 
제대로 된 책을 만들어내는 것.  

물론 책이 만들어지는 일련의 긴 과정에서는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항상 일어난다. 출판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이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럼에도 문제는 항상 일어난다. 그럴 때 가장 속이 상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그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다. 출판과 관련된 일을 십수 년째 해 온 바, 인쇄되어 나온 책의 어느 한 구석에서 오자라도 하나 발견하면 순간 땀이 삐직,하고 난다. 왜 이걸 못 봤을까, 못내 속이 상한다. 하지만 따끈따끈하게-실제로 갓 나온 책은 따끈따끈하다-쌓여 있는 책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했을 때는 땀 차원이 아니라 바로 시간과 절차와 돈의 문제로 바뀌게 된다. 다시 찍느냐 마느냐.

예전에 학원교재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진행과 교정을 맡았다. 책이 기일에 맞게 인쇄되어 나왔고 납품을 하기 위해 학원에 싣고 갔다. 표지에서 문제가 발견되었다. 제목에 알파벳 e가 하나 빠져 있었다. 학원담당자는 난감해 했고 그나마 하루 정도 시간 여유가 있어 인쇄를 다시 걸었다. 많다면 많을 수도 있는 제작비를 고스란히 부담했다.

문학수첩에서 나온 <여우이야기>를 구입했다. 주문하고 얼마 안 있어 그 한 권만 배송시기가 늦춰졌다. 일시품절이라는 거다. (아마도 이때 문제가 발견된 모양이다.) 며칠 만에 책을 받았다. 책 중간에 낱장 하나가 1밀리 정도 삐죽 나와 있었다. 파본이라 생각하고 교환 신청을 했다. 교환한 책을 이틀 만에 다시 받았다. 책을 펼쳐보지 않아도 같은 부분에 문제가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책을 펼쳐 자세히 봤다. 두 장이 잘려나간 흔적이 보이고 그 뒤쪽 몇 장의 제본이 엉성하다. 이때쯤 짐작이 갔다. 초판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던 거다. 그리고 출판사는 시간과 절차와 돈의 문제를 결정했을 테다. 다시 찍지 않기로. 부분 제본 수정을 하기로.

출판사에 문의 메일을 보내고 알라딘에 문의한 결과 알라딘 쪽에서 답변이 왔다. 지금 현재 있는 그 책은 다 그 모양이니 반품을 원하시면 반품할 수 있다고. 출판사에서는 그 책을 다시 새로 찍을 계획은 아직 없다고 했다. 출판사 측에서는 메일을 확인은 했으나 아직 답변이 없다.

이제 나는 결정을 해야 한다. 애초부터 언제 낱장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제본상의 문제를 가진 이 책을 소장하느냐, 읽고 싶은 마음을 잠시 포기하고 언제 소진될지 모르는 초판본이 다 팔릴 때까지 기다렸다 제본의 문제가 없는 책을 구입하느냐.

하지만 뭔가 껄끄럽다. 뭔가 불합리하다. 아직 새로 찍을 계획은 없으니 맘에 들지 않는다면 반품하라니, 너무 무책임한 태도 아닌가. 문학계간지에, 돈 되는 유아물에, 결정적으로 ‘해리포터’ 시리즈를 낸 출판사에서 고작 초판 (아마도) 몇 천 부 찍은 이 책의 제작비를 포기하지 못 해 얼기설기 수정해서 다시 팔기로 결정하다니, 제대로 된 책을 만들어야 하는 출판사의 너무도 당연한 책임의 방기를 모두 독자에게 떠맡기는 꼴이다.

세상에 돌아다닐 모리미 도미히코의 <여우이야기>가 대부분 114쪽과 115쪽이 벌어지는 불량 책일 거라는 생각에, 좋아하는 작가라 더 속이 상하는 독자의 마음을 출판사쪽에서 만분의 일이라도 이해했다면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 27일에 담당편집자님의 회신을 받았습니다.  
 
촉박하게 수정을 하게 된 연유와 함께 진심이 담긴 사과 말씀을 보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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