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1년 슐레이만은 헝가리를 공략해야만 유럽을 차지할수 있을거라고 판단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원정을 떠난다. 베오그라드의 주요 요새들을 단번에 점령하고 그다음 군사 세력을 로도스섬으로 집결시킨다.로도스섬은 이미1309년에 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이 이섬에 주둔하고나서 요새로 둔갑시켜서 막강한 해군들로 무장한 군사 요충지였다. 슐레이만은 이섬을 정복해야지만 안전하게 아프리카 대륙을 오갈수 있다고 판단하고 지중해 동부 해안을 완전히 장악할 필요성을 느낀다. 에에 로도스섬 기사단장인 리슐아담은 이정보를 재빨리 입수하고 프랑수와1세에게 함대를 보내달라고 요청을 한다. 함대를 보냈지만 에스파냐와 전쟁 중이기 때문에 이 함대가 꼭 필요해서 잠시 주둔하다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슐레이만은 이모든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장작 5개월간 로도스섬을 집중공격 하기 시작한다. 기사단(700천명)들은 함대가 떠나버린 절박한 상황에 지중해안을 떠도는 해적단들에게 까지 도움을 요청하며 오스만 군대(700대의 함대)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속수 무책으로 처참하게 밀리다가 섬주민들이 목숨을 내놓고 저항하는걸 목격한 슐레이만은 이에 경탄하며 전쟁의 공을 적들인 섬주민에게 돌리고 기사단장 리슬아담과 그 부하들은 섬밖으로 내쫒고 주민들을 포로 잡거나 추방하지 않고 예전처럼 살게 하고 로도스섬을 오스만제국의 섬으로 만든다.이로서 지중해는 오스만 제국안의 둥둥떠있는 호수가 되면서 유럽전역이 오스만 투르크에 벌벌 떨게 된다.
1536년 오스만 제국은 폴란드 국경 부터 드네프르강 하구 까지 영토를 확장시키며 그루지아와 흑해 동쪽 해안을 완전히 정복하고 아라비아 페르시안 항만 까지 접근해나가기 시작했다. 무역 상인들과 군사 첩자들을 아덴과 예멘에 대량으로 보내서 현지에서 눌러 살수 있게 도와 주면서 아프리카 북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 했다. 슐레이만의 통큰 지략과 전략으로 유럽 대륙의 주요 요충지를 봉쇄하면서 조금씩 오스트리아 제국의 왕 페르디난드의 목줄을 조여 가고 있었다. 폴란드가 오스만 제국에 착실한 정보제공과 어마어마한 조공품들을 알아서 갖다바치며 슐레이만의 비유를 마치자 그는 폴란드를 단순히 조공을 받치는 속국이 아닌 동맹관계를 맺어주면서 폴란드에 힘을 실어준다.폴란드는 오스만제국의 물류수송 담당을 하며 제국의 부에 상당한 밑받침이 되주면서 국가의 안정을 유지 시킨다.
1565년 슐레이만은 몰타섬을 놓고 또한번 기사단과 맞붙는데 30000군사들과 600명의 기사단들이 그야말로 피튀기는 혈전을 벌이며 4시간이면 끝장낼수 있을것 같은 전쟁이 장작 4개월을 끌면서 오스만 투르크 군대가 후퇴하고 만다.(기사단들은 대포와 창 칼이 없으면 부서진 나무 막대기라도 들고 완강하게 저항했다고 한다)
1570년,1571년 오스만 군대는 사이프러스와 파마거스타를 침공하는데 결과는 대승리로 끝난다. 그리고 1571년 다시한번 레판토로 함대를 몰고 가서 10월5일 새벽에 기습공격을 시도 한다.이에 돈후안은 208척의 오스만 선박들을 정렬시키는동안 대포를 실은 6척의 베네치아 선박들(노를젓던이들은 모두 죄수들,대승리후 자유의 몸이 된다)이 포위해서 집중 폭격을 가한다. 오스만 선박은 30척만 도주하고 나머지 선박들은 침몰하거나 생포되어서 포로로 잡혀간다. 이 해전은 20세기 세계1차대전 해전과 비교될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전쟁으로 소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전략적으로 공격을 가해서 대 승리를 이끈 전례없는 전투 였다. 폭격을 가한지 4시간만에 오스만 투르크의 선박들이 초토화 될 정도로 그들의 엄청난 규모의 함대와 선박들이 불에 탄 종이 처럼 가루가 되어버렸다.레판토 해전을 기점으로 오스만 제국은 술탄의 죽음과 함께 한발자국 후퇴하게 되고 유럽은 전 요새 무장(성지 탈환)이라는 구호아래 똘똘 뭉치게 된다.
16세기 지중해에서 일어난 문명의 격돌(기독교와 이슬람)이 얼마나 지정학적,종교적으로 중요하고 절실했는지 실감할수 있는 전쟁이였다. 레판토가 오스만 제국에 넘어갔다면 유럽은 지금과 상당히 달라졌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