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뉴욕 지하철과 거리 벽면에 마치 원시시대의 그림과 같이 다소 거칠고 공격적인 드로잉에 밝은 원색과 파스텔 색이 난무한 가운데 블랙으로 그림의 무게를 잡고 사회의 어둠을 낙서처럼 휘갈긴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는 1983년에 휘트니 비엔날레에 최연소 화가로 참가하고, 1984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는 앤디 워홀(Andy Warhol),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와 공동으로 전시를 열며 거리의 낙서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일명 검은 피카소로 불리며 세계 미술사에 최연소라는 타이틀을 갱신해 나갔던 바스키아는 부와 명예를 모두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약에 중독되어 생을 일찍 마감했다.
바스키아와 동시대 활동했던 키스 해링(Keith Haring)은 1980년 뉴욕의 지하철역에 있는 검정 광고판에 흰색 분필로 만화적인 인물들과 형상을, 그리고 역동적인 패턴들로 가득 찬 독특한 낙서 같은 그림을 그려서 경찰에 연행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키스 해링은 하트, 아기, 개 , 사람 형상의 피큐어등의 다양한 실루엣의 조합을 구상화 시켜서 자신만의 구상적인 언어 기호로 피부색이나 성차별 없이 모두가 하나가 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10대 때 그래피티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카우스(예명)는 새벽마다 공중전화 부스와 도로의 광고판을 뜯어 안에 있던 포스터를 꺼내 작업실로 가져가 밤새 그 위에 그림을 그린 뒤 몰래 제자리에 되돌려놨다.
정교하면서도 뛰어난 그림 솜씨에 사람들은 광고판 브랜드가 유명 작가와 협업해 만들었다고 착각했다.
그 착각은 현실이 되었고 카우스는 유명 브랜드들이 앞다퉈 협업하고 싶어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트레이드마크인 X자 눈에 얼굴을 가리거나 고개를 숙이며 수줍음 등을 표현하는 카우스의 작품들은
총감독(Director)'의 역할을 맡고 있는 카우스가 아이디어를 짜고,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리면 그의 스튜디오에 숙련된 화가와 기술자들로 구성된 조수팀이 원화 프린팅 작품과 대형 조형상을 완성하고 있다.
조수팀의 손으로 만들기 힘든 거대 조각이나 플라스틱 아트 토이는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하이테크 제조 공장 및 파트너사에 외주를 주어 제작하고 있다.
브루클린 미술관, 미국 국립예술학회(NGV) 등 유수의 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했으며, 뉴욕 현대미술관(MoMA) 큐레이터는 그를 "동시대 불안을 단순하고 직접적인 시각 언어로 번역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 받고 있는 카우스는 거리의 낙서를 예술로 끌어 올린 바스키아, 키스 해링이 이룩한 업적과 비교 할 수 없는 아티스트다.
그는 미술학적이나 기술적인 측면(유화 기법, 정교한 드로잉 솜씨)보다는, 기존의 대중적 캐릭터를 차용한 직관적인 시각 언어와 글로벌 기업 및 패션 브랜드와의 영리한 광고 협업을 통해 인지도를 폭발적으로 높여서 미술품은 소수의 특권층만 향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피규어, 의류, 포스터 등 다양한 가격대의 제품을 통해 대중이 쉽게 예술을 소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거리의 붕어빵도 국민 과일 바나나도 예술가와 협업 하면 세상이 평가하는 가치의 무게가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