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향귀주도(水鄕歸舟圖),나옹(懶翁) 이정(李禎 1578-1607)
강물의 수위가 커다란 바위 중턱까지 차 오를 정도로 불었고 키가 작은 수풀은 물에 잠겨서 가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좁다란 나룻배 한 척 위에 도롱이라는 비옷을 입은 사공이 노를 젓고 있다.
비가 더 내려서 강물이 범람하기 전에 어서 강을 건너 마을로 돌아 가야 한다.
조선 중기 화원(畵院) 화가 나옹 이정(李楨)이 그린 <수향귀주>는 여름 장마철에 내린 비로 무섭게 강물 수위가 올라갔던 한강에서 아슬아슬하게 나룻배를 저어 가는 사공의 모습이 담겨있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다섯 살 나이에 작은 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간 나옹 이정은 10살 때부터 산수·인물·불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서 1589년 13살 나이에 장안사(長安寺) 사찰 벽화(壁畫)를 보수 할 때 산수화와 천왕상(天王像)을 그렸을 정도로 천재로 인정 받았다.
나옹 이정이 사찰의 불화를 그렸던 시기인 1592년 조선반도에 왜구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해서 전국토가 약탈 당하며 엄청난 화마에 휩쓸렸다.
1592년 부터 시작된 전쟁은 1598년까지 7년 동안 이어져서 조선인들 모두 왜구 세력에 맞서 싸웠다.
조선 반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10여 명에서부터 수천 명에 이르기까지 그 규모에 차이가 있었지만,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서 왜군에 대항했고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에 의해 보급로가 끊기고 1598년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 간의 전쟁이 끝이 났다.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다음해인 1599년 화가 나옹 이정은 도솔원(兜率院) 미타전(彌陀殿)에 <백의대사도(白衣大士圖)>를 그렸다.

화가 이정의 어머니는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금빛의 광채를 내뿜는 나한의 나타나 '너희 집안은 3대가 계속해서 불화를 수천 폭이나 그렸다. 그 공덕으로 아들 하나를 내려 주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조상들의 공덕으로 태어났지만 일찍이 부모를 여윈 이정은 10살 때 부터 금강산과 설악산을 누비며 숱한 산수화와 불화를 그렸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문장가인 최립에게 시와 서예를 배웠고 허균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이정의 뛰어난 그림 솜씨에 반한 고관대작과 중국 사신들이 그림 한 점을 얻기 위해 그의 집에 소를 끌고 갔고 금화가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갔지만 강직한 성품에 의롭지 않은 돈과 뇌물을 멀리 했던 이정은 술을 잔뜩 마시고 비단이 가득 실려 있는 수레에 고꾸라져서 잠을 잘 정도로 권세 높은 이들을 위해 붓을 들지 않았다.

이정 <한강조주도(寒江釣舟圖)>
유유히 흘러가는 강 위에 배를 띄우고 낚시질에 열중하고 있는 선비의 뒤로 고목 나무 가지에 잎사귀가 몇 개 매달려 있다.
저 멀리 강 건너 산능성이를 따라 드문드문 들어선 마을이 보인다.
화폭의 절반만 채운 여백 속에 등장하는 물과 고목 나무 그리고 나룻배 위에서 여유롭게 낚시에 열중하는 선비의 모습이 서서히 시간과 공간 속을 유영하듯 번지듯 스며드는 붓질에 생동감이 느껴진다.
서른 살 나이에 요절한 화가 이정이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정유재란·병자호란 등의 전화와 가뭄·장마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고난의 시기로 인구의 절반 이상이 외세의 침략과 약탈에 죽거나 볼모로 끌려갔고 경작할 땅 조차 없어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했다.

7월 장마 전선의 영향으로 빗줄기가 주중 내내 쏟아지고 있다.
습한 열기로 인한 불쾌지수는 최고조로 상승하고 있고 전 세계 불어 닥친 기후 재앙과 전쟁, 그리고 원화 가치 하락까지 겹쳐서 실물경기 침체로 소비자들의 주머니는 가벼워졌는데, 생활물가는 '살인적'이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위험 수위에 차 올라 민심이 들끓어 오르고 있지만 국민의 혈세로 먹고 사는 권력자들은 포퓰리즘 정책만 남발하며 침수되고 범람해가는 앞 날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겠다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