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서른 다섯 살에 접어든 물리학자 앨런 라이트먼이 <뉴욕 타임즈>에 '지나간 기대'라는 에세이에서 이십 대 시절과 달리 자신의 뇌 기능이 점점 퇴보한다는 사실에 탄식하며 이런 글을 기고 했다.

'운동선수와 마찬가지로 과학자도 대개 젊을 때 유연하게 움직인다.

아이작 뉴턴은 20대 초반에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스물 여섯 살 때 특수 상대성 이론의 공식을 만들었으며,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서른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전자기 이론을 잘 다듬어 내놓고는 시골로 은퇴해버렸다.

나는 몇 달 전 서른 다섯 살을 맞아 물리학계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요약해보는 불쾌하지만 저항할 수 없는 작업을 해보았다. 지금 이 나이 또는 앞으로 몇 년 후에는  가장 창의적이고 눈에 띄는 작업이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이미 그런 성취를 이룩했거나, 하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다.'

-앨런 라이트먼

정규 교육 과정을 다 밟고 사회로 나와 서른 다섯 살 나이에 다다르면 다이아몬드나 금수저 출신을 제외하고 사회 조직에서 과장급과 사무관 정도의 위치에 올라 섰을 나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우수한 지성인 집단인 과학자들의 경우에는 서른 이전에 국제 학술계에 논문을 발표하거나 학술원의 회원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업적을 내며 국가나 기타 단체로 부터 연구 지원비를 받아 연구 활동에 매진해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과학을 전공한다 해도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가 되지 못하고 뉴턴처럼 만유 인력의 법칙으로 세상을 뒤흔들지 못한다.

그렇다면 누구는 그런 성취를 했고 누구는 그런 성취를 못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 것인가?

출처: 금강전도(국보). 개인 소장

조선 회화의 전성기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이 70세 무렵에 그렸다고 추정되는 <금강전도>는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그려진 전도(全圖) 형식의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본 선비들 중에서  금강산을 가본 사람은 여행의 추억을 회고할 수 있었고, 가보지 못한 사람은 봉우리와 골짜기 곳곳을 그림으로 감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다.

겸재 정선 이전에 그려진 산수화 풍경은 중국의 화풍을 그대로 모방해서 그렸기 때문에 한국에서 자생하는 풀과 나무 꽃의 형태가 아니였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 중국의 화풍을 기본으로 상상으로 그렸던 이전의 산수화와 달리 우리나라 산천을 사실적이고 개성적인 필치로 그린 겸재 정선의 금강산 전도는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금강산의 빼어난 절경이 붓과 먹으로  탁월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겸재 정선은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우리를 올라가서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등 금강산의  주요 명승을 둘러보며 산세를 따라 대각선과 원형 구도를 사용해 그렸고, 산봉우리 명칭을 적거나 길을 표시해나갔다. 

 76세에 접어든 겸재 정선은 인곡정사 너머로 비 안개 걷히며 환히 드러나는 인왕산의 준수한 자태는 몇 겹으로 붓질을 가하면서 그 붓질은 각도만 달리해서 농묵으로 폭포와 바위에 슬쩍 강약의 리듬을 주어 인왕산 바위 봉우리의 양감과 질감 그리고 음영까지 실감나게 묘사했다. 

겸재 정선 이전에도  한반도 풍경을 그린 화가는 있었지만 겸재와 같이 탁월한 수준과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해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준 화가는 없었다.

 증조할아버지부터 3대가 연속으로 과거에 낙방 해서 가족 모두 무너져 가는 흙집에서 겨우 끼니만 해결 할 정도로 빈궁한 환경 속에서 겸재 정선은 스스로 공부 머리가 뛰어나지 않다는 걸 깨닫고 과거 시험을 보러 갈 때마다 유명하다는 환쟁이들을 찾아 다니며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양반 사회에서 화가는  환쟁이로 손가락질 받았던 비천한 신분이였지만  겸재는  주변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그림 공부에 매진한다.

일찌감치 과거 시험에 합격한 양반 가문 친척들이 높은 관직에 올라가 손주 손녀를 볼 나이인 36세가 되던 1711년, 겸재는 금강산 근처의 고을에서 현감으로 재직하던 오랜 친구 이병연의 금강산 여행길에 동행 했고 그 여행길은 그의 인생 전체를 뒤바꾸는 운명의 길이 된다.

36세 ‘바다와 산의 정신을 담은 화첩’인 해악전신첩을 편찬하자마자 한반도를 넘어서 중국까지 이름을 알리는 스타 화가가 되었고 41세가 되던 1716년 봄, 마침내  종 6품(18품계 중 12등급)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관료 자리에서도 맡은 직무를 훌륭하게 해냈던 겸재는 영조 세자 시절부터 그림을 가르쳤고 영조 즉위 후 초 고속 승진을 거듭하면서도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겸재 정선이 70대에 이르러 필력이 무르익은 필법과 묵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남긴 불멸의 명화 ‘박연폭포'는  층층이 먹을 겹쳐 칠해 폭포 물살 주위 암벽의 거칠고 장대한 물성을 돋우고, 내리 쏟아지는 물살의 결들을 마른 먹붓질로 그어 소리의 울림을 시각적 이미지의 대비를 통해 절묘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그림으로  ‘인생 역전’을 이룩했지만 84세 나이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겸재 정선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조선시대 국가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 준비 과정과 의례절차, 내용 등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 <의궤>는 21세기 최첨단 시대의 기술을 뛰어넘는 사실적인 묘사와 입체적인 기록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 준비 과정과 의례절차, 내용 등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인 의궤에는  국가의 각종 제사, 어진(御眞·왕의 초상화) 제작 및 봉안, 왕실의 혼인, 왕세자와 왕비 책봉, 궁중 잔치, 왕실 장례, 국왕 행차, 궁궐 건축, 무기 제조, 실록 편찬 등 다양한 왕실 행사 내용이 담겨 있다.

 임금이 보는 의궤의 어람용(御覽用) 한 부를 포함해 춘추관이나 지방의 사고(史庫), 관련 부서에 보관 했던 분상용(分上用)은 5∼9부 정도 발행했다.

임금이 보는 어람용은 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놋쇠로 변철(邊鐵·책 등의 양쪽에 대는 길쭉한 철판)을 댄 뒤 5개의 박을못으로 고정했고 박을못 밑에는 둥근 국화무늬판을 대어 제본 해서 한 눈에 봐도 표지가 화려하고 속지의 종이질 품질이 뛰어나서 글씨와 그림이 분상용에 비해 훨씬 선명하고 정교하다.

현재 서울 국립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의궤는 1822년 세상을 떠난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현목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 내용을 기록한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는 상하권이 전시 되어 있다.

그동안 상권은 1993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반환한 뒤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왔고 마지막 하권이 반환됨으로써 전체 분량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세계의 반을 점령하며 제국으로 불렸던 페르시아-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영국-프랑스-러시아 -미국은 그리고 제국이 되고 싶어 한반도를 집어삼켰던 일본 조차도 조선의 실록 같은 기록 문화가 없었다.

의궤는 전 세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기록 형식의 역사서로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 된 546종, 2940권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87종, 490권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림으로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후대를 위해 국가 경영과 정책을 모두 기록하는데 동원되어 인류 문화의 자산으로 남긴 것과 달리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세계 최고의 기술자들이 있다.

도자기가 완제품에 이르려면 흙을 골라 반죽, 물레 성형, 건조, 무늬 조각, 유약 바르기, 가마 소성 등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은  고도의 숙련이 필요 했기 때문에 이른 나이에 도제 과정을 밟아야 했다.

고려 시대 남성 평균 수명은 39세로 부유하고 윤택한 환경의 남성들은 40에서 50세까지 살았지만 고려 시대 국민 중에서 60을 넘어서 까지 생존 하는 확률은 드물었다. 특히 흙을 만지는 도공들은 국가가 관리하는 특수 행정구역에 살면서 공장제 형식으로 도자기를 생산했던 기술자들이였지만 농민보다 신분이 낮았다.

험난한 작업 환경으로 고려 도공들의 평균 수명이 일반인보다 높지 않아서 도제로 들어 오는 기술자들의 평균 연령은 7세였고 이 도제들은 흙을 고르고 다듬는 기초 작업부터 시작해, 물레를 돌려 형태를 잡는 기술을 익히는 데만 최소 10년이 걸렸다.

도자기를 최종 완성하는 불과 가마를 다루기 까지도 10년이 걸리니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온전한 도공으로 자신의 작품을 제작 할 수 있지만 이 나이 대까지 모진 세월과 고난을 견디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미천한 신분 때문에 이름을 새길 수 없었던 고려 도공들은 외세 침략과 환란 그리고 몽골 침입으로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도자기를 빚었다.

외세 세력에 숱하게 짓밟히면서도  빛을 잃지 않은 우리 문화의 우수성에는 이름을 남기지 못한 천재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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