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영국 런던 테이트 브리튼 전시장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며 수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트레이시 에민의 <잠>은 이듬해 터너 상을 수상하며 설치 미술계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1980년대 후반 런던 왕립 예술 학교를 졸업한 트레이시 에민(1963-)은 지극히 사적이면서 자기 고백적인 작품으로 전시 되는 순간 부터 숱한 논란을 불러 일으키며 주요 일간지 예술 파트에 문제가 되었던 작품에 대한 기사가 실릴 정도로 유명세를 몰고 다녔다.

1990년대 영국의 거부 찰스 사치가 소유한 사치 갤러리 소속 아티스트로 선정  되면서 단독 전시를 열게 된다.

(c)Sleep, Tracey Emin,1998

  방에 있던 침대, 텐트를 전시장으로 옮겨온 트레이시 에민은  지난 시절에 함께 살았던 애인들의 이름, 생일, 전화 번호, 중절 수술 당시 입원했던 병실 호수 그리고 낙태한 아이의 성별까지 낱낱이 새겨 넣어 엄청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벗어던진 스타킹, 애완견 물품들, 담배꽁초, 콘돔, 먹다 남긴 음식, 깡통 같은 쓰레기물까지 고스란히 전시된 <잠>은 1999년 터너 상을 수상 하자 과연 이 설치물이 이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는지 이런 걸 과연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는지를 놓고 여러 전문가들끼리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평론가들의 논쟁 틈에  영국의 권위 있는 법의학자들까지  끼여 들어  트레이시 에민이 텐트에서 살던 시절에  발생한 특정 사건을 유추 해 볼 수 있는 작품이라며 터너 상을 수상한 설치물 <잠>은 범죄 과학 수사대원들에게 훌륭한 교육 자료가 될 것이라는 의견까지 튀어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논란과 분쟁이 서로 충돌하는 사이에 트레이시 에민의 텐트 일명 <잠>이라는 설치물은 옥션에서 80만 파운드(대략 한화로 13억원)에 팔려서 10년 후에 이 작품은 누군가가  두 배의 가격을 지불하고 구입했다.

80만 파운드에 구입한 익명의 구매자는 텐트 안에 있었던 벗어던진 스타킹, 애완견 물품들, 담배꽁초, 콘돔, 먹다 남긴 음식, 깡통 같은 쓰레기물까지 고스란히 가져가 버리자 마침내 트레이시 에민이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과거에 내가 어떤 상태 였는지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고 되새기는 작업을 통해 하나의 작품을 완성 합니다.

어떤 이들은 손으로 구체적으로 그리고 구상하지만 저는 제 주변의 물건을 통해 과거의 나, 현재의 나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트레이시 에민

숱한 화재를 몰고 다니며 예술계에 논란의 중심에 섰던 트레이시 에민처럼 사치 갤러리 소속된  데미언 허스트는 1988년   <프리즈(Freeze)> 전시에서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oung British Artist, yBA) 상을 수상한 이래로  다이아몬드가 박힌 해골(For the Love of God), , 포름알데히드용액에 박제한 상어(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등 파격적인 개념미술로 세상을  끊임없이 놀라게 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작품으로 연일 미디어에 얼굴이 도배 되는 예술가가 된다.

1986년 지구상에 존재하는 약의 컬러를 원형으로 표현한 회화 '스팟 페인팅 시리즈(Spot Painting)’를 시작으로 데미언 허스트는    ‘비주얼 캔디(Visual Candy)’ ‘베일 페인팅(Veil Painting)’ 작품을 연이어 펼쳐 보이며 본격적으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등장한 예술사조를 깊이 탐구하기 시작하더니 2019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러 전시 일정이 취소되자 그는 두툼한 브러쉬 스트로크를 들고 높이 5.5미터, 너비 7.3미터(18피트 x 24피트)에 물감을 찍어 나갔다.

자극적인 오브제로 섬뜩 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이지” 라는 원론적 질문을 하게 만드는 데미언 허스트는   대중과 평단의  비판과 찬사를 몰고 다니며 대중 문화의 흐름을 영리하게 읽어내는 재주를 갖고 있다. 자신의 브랜드 이미지를 깊이 각인 시키는 뛰어난 데미언 허스트의 상어는 미술 교과서에 등장 하고 심오한 철학을 품고 있는 다이아몬드를 박은 해골은 다양한 상품의 굿즈나 의상 도안으로 도용 될 정도로 공공재 같은 이미지가 되었다.

1863년  ‘올랭피아’로 명암이나 원근을 최소화하고, 평면적인 색과 대담한 구도를 통해 회화를 현실의 창이 아닌, '회화 그 자체'로 바라보게 했던 마네는 19세기 프랑스 정통 화단의 주류 세력과 비평가들로 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작품을 살롱에 꾸준히 출품하며 누구보다 과감하게 기존 예술의 규범을 깨뜨려나갔다.

 사실주의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많은 데생을 하며  낭만주의 화풍에도 많은 영향을 받은 드가는 마네처럼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사물을 관찰하며 시류에 편승하거나 기존의 고루한 예술 기법을 모방 하지 않고 스스로 예술의 길을 개척했다.

전 세계인들 중에서 예술에 전혀 관심이 없다 해도 마네와 드가의 이름은 알고 있고 설령 이름은 알지 못해도 광고나 잡지, 여러 매체에서 작품을 마주 할 기회가 아주 많다.

마네와 드가보다 1세기 전에 한반도에서 태어난 겸재 정선의 작품은 교과서와 1000원권 지폐 등 일상 곳곳에서 만날 수 있지만 거기까지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천원 지폐에 등장하는 수묵 풍경화 외에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 평생 동안 겸재 정선은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우리를 올라가서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등 금강산의  주요 명승을 둘러보며 산세를 따라 대각선과 원형 구도를 사용해 그렸고, 산봉우리 명칭을 적거나 길을 표시해나갔다.

1751년 76세에 접어든 겸재 정선은 인곡정사 너머로 비 안개 걷히며 환히 드러나는 인왕산의 준수한 자태는 몇 겹으로 붓질을 가하면서 그 붓질은 각도만 달리해서 농묵으로 폭포와 바위에 슬쩍 강약의 리듬을 주어 인왕산 바위 봉우리의 양감과 질감 그리고 음영까지 실감나게 묘사했다. 

겸재 정선은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한양(서울)의 풍경과 자신이 부임한 전국 각지의 명승지를 그리며 그림 실력을 끝없이 다듬으며 장르를 가리지 않고 새로운 필법과 화풍을 그리는데 주저 하지 않았다.

중국 화풍을 모방하는데 만 몰두 했던 조선의 화가들은 모조리 겸재 정선의 화풍을 교본으로 배워서 한반도의 지형을 펼쳐 보이는 지도에 비로소 한반도에서 자생하는 나무와 산의 형태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일 평생 동안 금강산을 세 번 올라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린 겸재 정선은 평생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1000점 넘게 그리며 도전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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