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채널을 빠른 속도로 돌리다 보면 거의 비슷한 주제, 배경, 상황 그리고 익숙한 얼굴의 예능인들, 배우들, 가수들, 스포츠 선수들의 여행-명사 초청 토크쇼-먹방-집 구하기-스포츠 게임-노래와 춤 오디션 방송 프로그램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스토리를 따라 갈 필요도 없고 깊이 있는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하지도 않고 극적인 재미나 눈물을 쏙 뺄 정도로 감동을 자아 내지 않지만 일단 틀어 놓기만 하면 그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고 장사하고 운동하고 산 속에서 생활하는 이야기에 중독되어 버린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예능 프로그램들이 한국 공중파 방송에서 보여주는 것 만큼 넘쳐 나지 않는다.
영국은 스릴러, 탐정, 서스펜스 물 드라마 시리즈 물이 큰 인기를 끌 정도로 BBC라디오 채널에선 항상 서스펜스와 스릴러 물의 라디오 드라마들이 매 시즌 청취율 상위권에 자리 잡고 있다.
반면 미국은 좀비와 공포물에 심취한 시청자들이 아주 많은데 서점에서도 공포물 장르 코너에는 다양한 작품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을 정도로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다.
영유아를 상대로 한 실험에서 아기를 웃게 만드는 것보다 공포감을 줘서 울리는 게 더 쉽다는 사실이 여러 차례 실험을 통해 증명 되었다.
그만큼 인간의 감각과 지각 능력엔 위험과 공포를 감지 하는 능력이 타고났다는 증거 일 것이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는 달콤한 멜로물 보다 스릴이 넘치거나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영상물에 시선이 고정된다.
하지만 이따금씩 공포물을 찾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조직 생활이 불러 일으킨 소통의 단절의 벽에 부딪쳤을 때 공포물을 찾아 본다.
가령 나는 어제 이런 스토리에 집중했다.

1994년, 18세기부터 사람들을 죽여온 초자연적 존재 블레어 위치에 대한 전설을 취재하러 갔다가 사라진 3명의 영화학과 학생들이 바로 그 신비의 블레어 위치가 있는 버키츠빌 숲에 들어간 후 실종된다. 그리고 1년 후 그들이 찍은 필름이 발견되고 사라진 젊은이들이 남긴 영상이 영화로 만들어진다.
스토리가 전개 되는 동안 영상은 심장 박동 보다 더 빠르게 흔들리면서 또렷하지 않은 사람의 형체가 공포심을 불러 일으킨다.
공포물의 대가 스티븐 킹은 공포의 차원을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구분했다.
-역겨움
잘린 목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볼 때,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 뭔가 끈적거리는 물질이 팔에 닿았을 때.
-무서움
초현실적 상황, 공룡 크기의 거미들이나 죽은 사람들이 주변을 돌아다닐 때,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 거대한 집게발 같은 것이 당신 팔을 잡아 당길 때
-두려움
집에 돌아와 보니 물건들이 모두 비슷한 물건으로 바뀌어 있음을 보았을 때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 누군가 등 뒤에 있는 것 같다.
스티븐 킹이 구분한 세 단계 공포 중에서 내가 느끼는 가장 큰 공포감은 '두려움'이다.
오늘 출근 길의 두려움, 업무에 대한 두려움, ....
여러 일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
까지 일일이 모두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내 안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 하고 있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달이 바뀔 때마다 모든 것들이 야금 야금 오르고 있다.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 할 때면 지난달 보다 몇 백 원 숫자가 더 찍혀 있다.
마트와 편의점에 들어가 늘 상 구입했던 물건의 가격표를 보고 놀란다.
몇 묶음, 몇 덩어리, 몇 상자들이 이제는 몇 개와 몇 알만 구입하게 되었다.
더 열심히 부지런히 성실하게 일하며 착실하게 세금을 내며 오늘은 무사히 버텨 냈다 해도 내일의 삶은 어떤 두려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세계 한 곳에서는 전쟁과 기근, 재난 상황으로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는 오늘 내가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에 비하지 못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이 세상은 초자연적인 세상에서 발생하는 어떤 공포물보다 더 공포스러울 때가 많다.
내가 죽어가던 아침 나절 벌떡 일어나
날계란 열 개와 우유 두 홉을 한꺼번에 먹어 댔다.
그리고 들로 나가 우물물을 짐승처럼 먹어 댔다.
얕은 지형지물들을 굽어보면서 천천히 날아갔다.
착하게 살다가 죽은 이의 죽음도 빌려 보자는
생각도 하면서 천천히
더욱 천천히
-김종삼의 <또 한 번 날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