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세에 아들 히데요리를 얻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갓난쟁이 재롱에 반 미치광이가 되어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던 양아들을 자결하게 만든 것 조차도 불안해서 그의 가족과 친인척들 모두 죽여버렸다.
히데요시는 이런 살육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누군가 오사카 성에 불을 질러 자신의 아들이 죽을 까봐 노심초사 하며 성 주변에 보초병들을 순찰 시키며 밤 낮으로 어린 아들의 안위만 걱정한다.
1590년 자신이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한 히데요시는 어린 히데요리를 보좌할 체제를 구축하는데 그동안 1인 독재 체제에서 5대로(돈과 정치력이 있는 5명의 다이묘), 5봉행(중앙 행정 처리) 체제를 도입해서 이들이 어린 히데요리에게 충성하겠다는 각서를 쓰게한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그가 애지 중지 했던 후계자인 4살 짜리 아들이 다이묘(10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일본 각 지방의 영토를 다스리며 권력을 누렸던 영주,지위는 막부의 수장인 쇼군아래) 자리에 오르고 어린 히데요리의 후견인인 마에다 토시마저 죽자 후견인 중에서 가장 부하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순식간에 군사조직을 장악해버린다.
이에 크게 반발한 5인 체제의 우두머리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에야스가 집을 비운 사이 다른 이들과 규합해서 폭동을 일으킨다.

폭동은 세키가하라 대전투로 이어져서 1600년 전투가 벌어 질 당시 7살짜리 히데요리는 자신의 방안 이불 속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마침내 이에야스가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7살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그의 호위무사처럼 행동한다.
3년 후 1603년 이에야스가 에도에 새로운 막부를 세우고 쇼군이 되고 1614년 겨울, 때를 기다렸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동안 난공 불락이였던 오사카 성에 여자 사무라이들을 잠입 시켜서 히데요리의 어머니 차차(요도노노)를 설득해 휴전을 맺게 한다.
이 휴전은 교묘한 속임수로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의 모든 해자를 메워버리고 성 안으로 들어가 대 학살극을 벌인다.
목이 없는 10만 명의 시신들이 성 안에 가득 쌓이자 이에야스는 불을 지르고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22살의 히데요리는 자신의 엄마를 원망하며 불길 속에서 할복 자결한다.

육손이로 태어나 일본 남자 평균 신장 150센티보다 10센티 작은 140센티에 원숭이처럼 생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영원한 권력을 쥐고 천하를 뒤 흔들 욕망으로 조선 땅을 침략해서 무수히 많은 조선인들을 강제로 납치했다.
최고 권력 자리에 올라 자자손손 영원한 권력을 유지 하기 위해 세운 오사카 성은 납치된 조선인들의 피 땀 눈물로 세워졌고 성이 완공 되자 마자 코와 귀가 난도질 당한 채 생 매장을 당했다.
잔혹한 방법으로 납치 당한 조선의 기술자와 도공들이 일본 땅에 이룩한 문화와 예술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러서 이 문화적 융숭함을 유럽 전역으로 퍼져서 19세기 유럽 예술계에 일본 문화를 퍼뜨리며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그 영향력은 몇 세기를 지나도 퇴색 되지 않아서 유튜브에 일본 전통 예술에 관한 영상들은 수 천에서 수 십만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에서 일본의 도자기에 관한 영상 해시태그는 수천개에 달하지만 한국 도자기에 관한 영상은 100개가 채 되지 않는다.
한국 문화를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서 유튜브 채널을 처음 시작 할 때 부터 모든 영상의 언어를 영어로 제작하고 있다.
1782년 정조가 강화도 행궁(行宮·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곳)에 창덕궁 규장각의 부속시설로 설치했던 왕실 자료실 외규장각(外奎章閣)은 1866년 철종 재임당시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귀중 도서 340여 권과 지도 갑옷 등을 약탈해갔다.
프랑스 군이 외규장각을 약탈 했을 당시 외규장각에는 당시 조선 역대 왕의 글과 글씨, 의궤와 주요 서적, 왕실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었고 도서는 대략 6000여 권 정도 보관 하고 있었지만 귀중한 보물의 상당수가 파괴되어 사라졌다.
1991년 서울대가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요청하면서 한국과 프랑스 간 반환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프랑스 측에서 지속적인 반환 거부로 협상이 결렬 되었지만 경제적 실무 협약을 맺으면서 협상을 이어가다가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정상회의에서 양국 정상이 ‘의궤 대여’(5년마다 다시 계약하는 대여 방식)에 합의해서 현재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관람 할 수 있게 되었다.세계인들은 중국의 회화 작품에 대해 알고 있어도 정작 산수화의 대가는 조선의 겸재 정선이라는 사실에 대해 알지 못한다.
우리 조상들이 이룩한 눈부신 문화 예술이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