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12월 31일 60세를 바로 코 앞에 둔 화가 폴 세잔은 허름한 창고에서 20대 시절에 습작 했던 스케치들을 전부 정리 하기 시작한다.

그는 한 장 한 장 스케치들을 유심히 살펴 보던 중에  지난 젊은  시절에 채색한 색들이 전부 검은 색이였다는 사실에 놀란다.


불과 4-5년 전 만에도 화가 세잔은 예술계 어디에서도 인정 받지도 못했고 그림들도 단 몇 점만 몇 몇 화상가들에게  팔렸을 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의 길을 가고 부터 그의 예술은 세상 어디에서도 인정 받지 못했다. 

법대를 자퇴하고 파리로 건너가 그림 공부를 시작했던 폴 세잔은 뛰어난 재능과 화술이 넘쳤던 천재들 사이에서 잔뜩 주눅이 들었었고 태생부터 부유한 신분과 세련된 매너를 갖춘 마네와 드가의 작품들을 볼  때 마다 자신이 그린 스케치를 갈갈이 찢어 버렸다.

번번히 출판사로 부터 퇴짜를 맞았던 절친한 고향 친구 졸라와 함께 낯설고 거칠고 거만한 파리 예술계에서 고군 분투 했던 세잔의 20대 시절, 그의  눈 앞에 보이는 사물은 전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회주의자 성향의 졸라가 작품으로 인정 받으며  출세 가도를 달리는 동안 세잔은 친구의 배신과 험담에 상처 받고 20년 만에  고향 엑상 프로방스로 내려가 불굴의 의지로 자신만의 예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한다.


주변인들 눈에 폴 세잔은 50세가 넘도록 무엇 하나 제대로 이뤄 낸 것이 없는 고집 불통의 화쟁이 였지만 그의 화폭은 서서히 어둠을 벗어나 푸른 빛이 감도는 색채로 나아가고 있었다.

 

1895년 당시 파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미술상 볼라르는 수 년 동안 고향에 틀어박힌채 오로지 사과와 산만 그려 대는 폴 세잔의 작품을 보자 마자 주변인들에게 수소문해서 은둔하고 있는 화가를 찾아 간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세잔이 그린 사과 정물화가 그저 테이블위에 올려진 사과 몇 개와 오렌지 몇 개 그리고  식기구 정도 밖에 보이지 않지만 화상 볼라르는 세잔의 그림에서  캔퍼스 전체를 구성하는 사과와 오렌지, 기타 식기구들이 오른쪽, 왼쪽, 위, 아래 방향으로  빛의 세기에 따라 사람의 시선이 움직이는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한 거의 신의 경지에 다다른 구도와 붓질, 색감으로 완성한 세기의 작품이라는 걸 감지 했다.

이 작품은 세잔의 사과 정물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그림 가장 왼쪽 낮은 접시에 사과가 담겨 있고 가운데  솟아 오른 그릇 안에는  오렌지가 담겨 있는데 접시의 위치에 따라 사과의 크기와 채색의 색채 빛의 음영에 따라 사과들 중 몇 개는 싱싱해 보이고 몇 개는 시들어 보이고 또 다른 몇 개는 이제 막 시들기 시작해 보인다.

가장 오른쪽에 자리 잡은 물병의 위치는 현재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옆으로  움직일 때 빛의 음영이 달라져 보인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정물화 이지만 세잔은 캔퍼스의 좌-우-위-아래에서 세심하게 관찰해서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본 피사체를 이 정물화 속에 전부 그려 넣었다.

그는 1889년 부터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 할 때  사과의 위치도 바꾸고 크기가 다른 것들로 바꾸며 봄-여름-가을-겨울의 시간을 무려 여섯 해를 보내며 완성했다.

1900년 1월 1일, 새해가 시작되자 마자 세잔은 검은 색 상자에서 그동안 모아 두었던 색들을 차례 차례 꺼내기 시작한다.

그가 꺼낸 색들은 원색이 아닌 지난 시절에 이런 저런 색을 혼합해 버린 색들로 거칠게 팔레트 칼로 이 색 저색 찔러 보아서 어떤 색도 온전한 빨간색이나 푸른색이 없었다.

세잔은 커다란 그릇을 가져와 이 물감들을 전부 짜내고 뒤섞어버린다.

1906년 폴 세잔은 눈을 감기 직전까지 그동안 추구 했던 형형색색의 색과 구도를 포기 하고 오로지 하나의 색으로만 캔퍼스를 채우거나 어떤 색도 칠하지 않은 채 그저 흰색 캔퍼스만 덩그러니 완성 해 버렸다.

오랜 세월 고향에서 은둔하며 고집스럽게 사물과 사람, 대상을 관찰하며 붓질을 했던 폴 세잔은 평생동안 빛의 변화와 각도, 구도를 찾아 다녔다.

어느 강가 잔디밭에 누워 있는 청년의 시선은  저 먼 곳을 바라 보고 있다.

스무 살 파리로 처음 상경한 폴 세잔은 사람의 피부색, 구름의 움직임, 바람에 일렁이는  풀밭의 모습까지 전부 화폭에 담고 싶었지만 그 시절엔  보여지는 사물과 사람의 색과 형태를 뜻대로 채색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느 누구라도 포기했을 법한 시련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꺾지 않았고 실패자라는 낙인에도 굴하지 않았다.

세상이 뭐라 하든 그는 자신 만의 검은색 상자를 열어 젖혀서 자연을 원 기둥, 구, 원 뿔과 같은  기하학적인 형태로 발전 시켜서 고전 미술에 담긴 질서와 균형의 아름다움을 새로운 구도와 형태, 색으로 완성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  7년 동안 그리고 또 그렸던 마지막 미완성 연작 작품 <대수욕도>에서 이목구비가 불분명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자연과 혼연 일채 되는 추상적 인간의 모습으로 그렸다.

1906년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급성 폐렴으로 눈을 감은 폴 세잔은 인간의 눈으로 지각하는 모든 대상이 어느 날 갑자기 보여지는  것이 아닌 자연이 인간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며 20세기 현대 미술의 문을 열었다. 















'색은 우리의 뇌와 우주가 만나는 곳이다.'

-폴 세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