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호반의 도시 제네바에 살았던 시절, 이 도시를 거쳐 갔던 명사들이 살았던 방을 찾아 다녔다.

어떤 호기심이 발동해서 인지 몰라도 명사가 살았거나 머물렀던 그 방의 분위기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1920년 독일 베를린에서 시린이라는 필명으로 시인과 번역가로 활동 했던 나보코프는 1923년 부유한 유대계 러시아 출신의 베라를 만나 2년 후 결혼한다.

 나치의 압박과 추적을 피해 다녔던 나보코프 부부는  1937년 독일에서 프랑스로 건너가 <마법사>라는 책을 출간 하며 작품 활동을 펼친다. 

3년 동안 프랑스 시인처럼 활동 했던 나보코프는 1940년 독일 나치가 프랑스 땅을 점령 하자 아내 베라와 아들 드미트리와 함께 미국행 난민선에 겨우 탑승해서 탈출에 성공한다.

미국에서 영어로 발표한 <롤리타>는 20세기 초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만큼 사회적으로 윤리적 논쟁을 일으킨 문제적 작품이 되었지만 대중들의 지대한 관심을 일으키는데 큰 성공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롤리타는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어서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드높아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인쇄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부를 축적하게 된 나보코프는 미국 삶을 청산하고 유럽에서 가장 살기 좋은 스위스 몽트뢰에 있는  페어몬트 르 몽트뢰 팰리스(Fairmont Le Montreux Palace) 호텔 6층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

나보코프는 페어몬트 르 몽트뢰 팔라스(Fairmont Le Montreux Palace)호텔에서 1961년부터 생을 마감한 1977년까지 머물렀다.

호텔에서 가장 멋진 전망이 보이는 6층에 있는 일명 나보코프의 방은 1년 내내  예약 대기자들이 꽉 차 있는 가장 인기 좋은 방이다.

전망 좋은 호텔 방에서 이른 아침에 눈을 뜬 나보코프는 정오까지  영어로 작품을 썼고 오후에는 아내와 점심 식사를  마치면 호텔 주변을 산책하며 나비를 채집했다.

그리고 하루 해가 저무는 시간에 호텔 방의 테라스에 앉아 아내와  여유로운 저녁 식사를 하고 난 후  늦은 시간까지  체스를 두었다.

나보코프는 이 호텔에 머무는 동안 3편의 장편 소설을 발표 했고 초기 창작 시절에 러시아어로 쓴  작품을 다듬어서 자신이 영어로 다시 써서 출간 했다.

생애 마지막 시기에 접어든 나보코프는  가족들과 러시아에서 살았던 시절을 추억 하는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Speak, Memory)'를 완성했다.








[기억 할 수 있는 가장 먼 과거부터 나는 (찬미하거나 혐오하기보다는 흥미로워하고 즐거워하며) 가벼운 환각들에 사로잡히곤 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중에서 

나보코프가 4살이던 1903년부터 1940년까지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형식의 회고록 <말하라, 기억이여>는 작가가 불연듯 떠오르는 기억을 구술 하듯 각각 다른 시기에 쓰였고, 다른 매체에 게재됐다.

[요람은 심연 위에서 흔들거린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건대 우리의 존재는 두 영원의 어둠 사이 갈라진 틈으로 잠시 새어 나온 빛에 불과 하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 중에서

암실의 문을 열면 빛이 들이닥치듯 독자들은 <말하라, 기억이여>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나보코프가 펼쳐 보이는 가족, 영어 교육, 첫사랑, 시 창작, 가정교사, 망명의 순간을 마치 환등기에 비춰 보듯 그 빛을 따라가게 된다.

1903년 8월부터 1940년 5월까지 37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나보코프의 기억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은 차르 체제 하에 가족과 함께 살았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대 저택과 시골 별장을 오가며 보냈던 소년 시절이다.

나보코프가 펼쳐 보인 기억 속에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자유주의적인 기운과 가부장적인 흔적, 치명적인 가난과 대를 물려 받은 막대한 부를 가진 계층이 서서히 분열하고 충돌하며 무너지고 붕괴 하는 비극의 현장을 목도 하게 된다.

1914년 7월 사라예보에서 터져 나온 총탄의 비극은 3년 후 1917년 2월 러시아의 피의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 한지 단 몇 일 만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아버지 드미트리는 페테르부르크 임시 정부의 수장이 되지만 이듬해 10월에 발발한 피의 혁명으로 숙청의 칼날이 다가 오자 가족을 데리고 크리미아 반도로 이주 한다.

1918년 혁명군이 나보코프의 아버지에게 현상금을 걸고 추격하자 가족들은 우크라이나 르비우 지역으로 넘어가 지인 소유의 영지에 숨어 살게 된다.

혁명은 곧 끝이 날 것 이라 믿었던 나보코프의 아버지는 크리미아 반도의 법무부 장관 자리에 앉지만 1919년 황제가 이끄는 백군이 혁명군에 대패 하면서 나보코프 가족은 영원히 러시아 땅을 밟지 못한 채 유럽 전역을 떠도는 망명자가 된다.

1920년 독일 베를린에서 시린이라는 필명으로 시인과 번역가로 활동 했던 나보코프는 1923년 부유한 유대계 러시아 출신의 베라를 만나 2년 후 결혼한다.

나보코프는 나치의 압박과 추적을 피해 다니며 번역과 작품 활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가 던 중 1937년 독일에서 프랑스로 건너가 <마법사>라는 책을 출간 하며 작품 활동을 펼친다.

1940년 독일 나치가 프랑스 땅을 점령 하자 나보코프는 아내 베라와 아들 드미트리와 함께 미국행 난민선에 겨우 탑승해서 탈출에 성공한다.

1940년 미국 맨해튼에 정착한 나보코프는 자연사 박물관 나비 보존실 자원봉사로 활동하면서 지난 시절에 틈틈이 쓰고 번역했던 원고 뭉치를 정리해 나가기 시작한다.













' 다행히도 러시아 문학에 대한 총 2천 페이지에 달하는 1백 개의 강의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웰즐리 대학과 코넬 대학에서 강의하며 보낸 20년 세월은 행복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1940년 5월 나보코프는 미국에 도착한 이후 부터 1941년 스탠퍼드 대학 여름 학기 첫 강의에서 이전 미국 대학 러시아 문학 부에서 어느 누구도 시도 한 적 없는 강의를 펼치기 시작한다.

1941년 웰즐리 대학 러시아어학과 가을 학기 부터 전임 교수로 부임한 나보코프는 러시아 언어와 문법을 가르치며 '번역으로 읽는 러시아 문학 고찰'이라는 과목을 개설 했다.

1948년 부터 나보코프는 코넬 대학 슬라브학과 부교수로 재직 하면서 자신이 직접 손으로 쓴 강의 노트를 들고 '유럽 산문의 거장들', '번역으로 읽는 러시아 문학' 과목을 가르치며 1950년대 미국 대학에 러시아 문학 열풍을 일으킨다.

강의와 번역, 저술을 병행 했던 나보코프는 미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문예지인 <뉴요커>에 틈틈이 단편과 에세이를 기고 하고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자 유럽에서 출판 했던 작품을 다듬어 영어로 작품을 발표 하기 시작한다.

1955년 어린 여성의 사랑을 갈구 하는 남자의 욕망을 그린 장편 소설 <롤리타>가 발표 되자 마자 영미권에 찬반 논란을 거세게 불러 일으켰고 이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하게 된다.

영화로 제작 되면서 막대한 저작권 수입을 받게 되어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나보코프는 대학 강의를 차츰 줄이고 집필과 나비 채집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나보코프는 <말하라, 기억이여> 작품을 15년의 시간에 걸쳐 쓰는 동안 자신의 지나온 삶을 한 뭉치의 원고로 쏟아내기에 부족할 정도로 방대하면서도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동전 몇 닙을 넣을 정도의 작은 호주머니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부활절 달걀에서 스며나오던 따스함과 불그스레함, 버섯을 따오는 어머니의 초록빛 감도는 갈색 모직 외투 위에 맺힌 물방울, 가정교사가 앉던 의자에 덧씌워진 천의 무늬까지 새겨 놓은 <말하라, 기억이여>는 독자들에게 형형색색의 감각을 일깨워 준다.


인생의 여정을 한 편의 소설처럼 살다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모든 것이 풍요롭고 풍족했던 유년기와  청년기 시절을 지나 혁명과 망명으로 세상을 유랑하다 마지막 전망이 탁 트인 호텔 방에서 생을 마쳤다.

호텔 창 밖 너머 풍경을 바라 보며 오래 전 아내 베라와 함께 저 곳 어딘가를 거닐었던 나보코프를 떠 올려 본다.

길과 나무, 텅 빈 거리, 상점들 그리고 청명한 하늘 위로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들..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고 보이지 않는 시간의 이어짐을 눈으로 바라 본다. 

무엇이든 빠르게 찾고 검색 할 수 있는 시대에  눈꺼풀을 깜빡일 때 마다 지나쳐 버린 수 많은 찰나의 시간들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고 있다.

그동안  하고 싶은 것을 오랫동안 심사 숙고해서 완전히 몸과 마음에 익혀져야 비로소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일개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디지털화, 매개, 초연결, 감시, 알고리즘에 의한 통제가 점점 심각해지는 세상에서 오래도록 한 자리에 머물면서 꾸준히 무언가에 몰두 하는 사람들이 드물어졌다.

각자만의 내면 세계로 들어가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면 시간, 인내, 지루함을 견뎌내고 이따금씩 망상을 꿈꾸며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발견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

인간에게  이런 것들 조차  없다면 우리는 그저 생의 소중한 시간을 빅테크 기업에게 고스란히 갖다 받치는 노예일 뿐이다.

인류는 매 세기마다 과학 발전의 힘으로 하늘과 바다 땅 속 부터 우주까지 뻗어나가면서 무엇이든 더 빨리 더 많은 양을 생산하는 동안 생태계를 지탱 시켜 주고 있는 생명의 줄을 갉아 먹고 있다.

자는 동안 꿈을 꾸며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을 상상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영장류인 인간에게 모든 만물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 속에서 인간은 먹고 마시고 즐기고 활동하며 기억을 축적해 나가고 있고 그 축적된 기억은  세월이 흐를 수록 시간의 그늘에 서서히 잠식 되어 간다.

시간의 그늘은 사는 동안 어떤 틈새를 비집고 불쑥 모습을 드러내며 아쉬움, 갈망, 회환과 후회라는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그렇게 온전하게 보이지 않는 기억의 그늘은 인공지능의 기술로 끄집어 낸다 해도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인간이 창조한 활자의 아름다움과 비교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창작의 의미는 인간의 기억의 그늘에서 순간을 포착하는 데 있다.

나비 채집을 사랑했던 나보코프는 돌아 갈 수 없는 고국의 언어를 낯선 미국 땅에서 채집 하듯 기억 저편 속에 잠재 되어 있는 회상을 통해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 냈다.

“나는 문학 창작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즉 평범한 대상을 미래 시간의 너그러운 거울에 비칠 모습으로 그리는 것, 아득히 먼 미래의 후손들만이 알아보고 가치를 인정해줄 그 향기로운 유연함을 우리 주위의 대상 속에서 찾아내는 것. 아득히 먼 미래에는 지금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이루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저절로 절묘하고 흥미진진한 것이 될 거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베를린 안내’ 중에서


인공지능의 영향으로 활자보다 영상에 의존하는 이 시대에 말의 가치는 추락할대로 추락해 버렸고 뜻도 괴상한 문자 조합으로 서로 다른 성별과 세대를 조롱하는 시대에 문학은 영양제를 삼키듯 한 번에 섭취 하면 안된다.

한 장 한 장 음미 하며 작가가 새겨 놓은 활자의 지도를 따라 손으로 잘게 쪼개고 으깨고 빻아서 아삭아삭 씹어서 조각난 상태로 혀 속에서 굴려야 한다.

손바닥의 오목 하게 파인 가운데서 스마트 폰이 아닌 책을 올려 놓고 활자에서 풍겨 나오는 문학의 향을 음미 하는 동안 비로소 위대한 작가가 창조하는 최고의 등장 인물이 독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저런 전쟁터에서 우리 어린 아들(두 살에서 여섯 살 사이 어느 때든)과 함께 그 밑으로 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며 몇 시간이고 서 있던 다리들을 당신과 나는 그 기억을 영원히 지켜낼 것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