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퇴근 20분 전, 명절 연휴가 시작되기 전 날이었다. 남자 목소리, 빈정되는 말투의 전화 한 통으로 내 마음은 흐트러졌다. 그는 도서관 홈페이지에 가족 독서탐방을 신청했고 확인차 전화했단다. 담당 사서는 독서회 끝나는 시간이라 강의실에 올라 갔다.
나: 네. 아이가 초등 독서회 회원이세요?
그: 독서회원? 그건 모르겠고 도서관에 가끔 다녀요.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라고 되어 있어 신청서랑 다 보냈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4명 신청했어요. 가능합니까?
나: 초등 대상 계층별독서회원에 한해서 신청 가능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회원 1명,보호자 1명만 신청 가능합니다. 가족 전체가 하셨네요.
그: 아이가 2명(초1, 초5)인데 당연히 보호자 2명이 가야 되는거 아닙니까. 당연한걸 물어봅니까?
나: 음.....일단 확인하니 죄송한데 아이가 독서회원이 아니시네요. 4명은 더욱 어렵습니다. 홈페이지에 대상이 계층별독서회원으로 되어 있네요.
그: 담당자 맞아요? 처음엔 될것처럼 하다가 안된다 하고. 내가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정확한 답변도 안해주고...홈페이지 보고 신청했는데 무슨 소립니까...지금 전화 받는 분 이름이 뭐죠? 일단 전화 끊어요. 도서관에 전화 한 통 하고.....
아....그는 도서관 직원이 홈쇼핑이나 은행 카드 당당자처럼 마냥 친절하고, 마냥 '예스, 예스' 하기를 원하는걸까?
나는 왜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는거지.
이용자는 전화해서 따지고 강압적으로 나오면 무조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직원 목소리가 조금만 격양되면 갑질한다고 생각한다. 본인 목소리는 세배는 더 크면서...
결국 해결하지 못하고 약속시간에 쫓겨 도서관을 나오면서 심난했다. 마음 한켠에 남겨진 묵직함으로 연휴내내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내일 출근하기 싫다.
마음이 어수선해 가벼운 소설을 골랐다. 오래전 이외수의 소설 '벽오금학도'를 읽었을때의 몰입감이다.
주인공 달문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매설가(소설가)가 꿈인 인삼가게 주인 '나'가 소설을 이끌어간다.
청계천 수표교 거지패 왕초이며 광대인 달문은 영조때 실존했던 인물이다. 연암 박지원의 '광문자전'에 등장했다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달문의 외모를 평가한 내용이 인상적이다.
광문은 외모가 추악하고, 말솜씨도 남을 감동시킬 만하지 못하며, 입이 커서 두 주먹이 들락날락했다.
만석중놀이를 잘하고, 철괴무를 잘 추었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서로 욕을 할때면 "니 형은 달문이다." 라고 놀려댔는데, '달문'이란 광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반면에 달문을 평생 사모했던 기생 운심은 달문을 이 나라 최고의 미남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바위처럼 불변하는 게 아니라 움직이며 채워 나가는 거랍니다. 잘리거나 뽑힌 나무보다 잎을 피우고 가지를 뻗는 나무가 훨씬 아름다운 법이죠. 달문 오라버니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아름다움을 채워나가는 사내는 없어요. 분명히 더럽고 추한 자리였는데 순간순간 뜻밖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채우니 놀라고 탄복하죠. 달문 오라버니도 자신이 그런 재주를 지녔다는 걸 알아요. 아름다움이 무엇이란 걸 아는 사내는 만 명에 한 명 될까 말까 하고, 그 아름다움을 솜씨 좋게 만드는 사내는 그걸 아는 만 명 중에서 또 한두 명이랍니다. 모독 오라버니는 이런 게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 적 없죠?"
달문은 비루한 거지이며 광대였지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제목을 '이토록 고고한 연애'로 읽었던 나를 일깨워준 딸내미 덕분에 '연예'와 '연애'의 차이도 상기했다. 달문은 진정한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평생 한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바람처럼 떠돌기를 원하는 사람이었지만, 어디선가 도움이 필요할때 나타나는 '홍길동' 이었다.
소설에는 간헐적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곁들인 '열하일기'와 활빈당의 활약도, '구운몽'을 들려준다. 저자의 고전문학 전공이 빛나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이나 고전 문학을 좀 더 다루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안나 카레니나' 처럼 유난히 많았던 정치 이야기는 소설의 품격을 한층 올려주니까.
달문은 누군가 생판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도용해 자칫 죽음을 당할수도 있었지만 용서하는 넓은 아량을 베풀었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 믿음을 중요시하는 삶 자체였다.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인간적인 모습에,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에 반했다.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모습이 멋지네. 닮고 싶은 달문이다. 외모는 말고, 성격만!
미운 적 없나? 평생 잘해 줬지만 또 평생 자네를 괴롭힌 악인이 아닌가?
착한 사람은 홀로 스스로 착할 수 있지만 악한 사람은 그 악행을 부릴 누군가가 필요한 법입니다. 제가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에게 저질렀겠지요. 그래도 저는 친구니까, 악행을 하더라도 조금은 여지를 뒀습니다. 미웠던 적은......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단 한번도 없습니다. 다만 그 마음과 태도를 고치거나 버리지 못하는 걸 볼때마다 가엾단 생각은 했습죠. 망둥이가 하루아침에 달문이 되지는 않습니다. 망둥이는 망둥이답게 살아가되, 그래도 곁에 달문이 있었으니 천천히 조금씩 달라졌겠죠. 달라지지만 완전히 달라지진 않고 죽는 게 사람입니다. 그건 망둥이도 달문도 또 세상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죠.
연휴에 읽은 또 다른 책.
˝그동안 가난했으나 행복한 가정이었는데, 널 보내니 가난만 남았구나.˝
진도 팽목항에 걸린 세월호 유가족의 표어란다.
이 부분을 읽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연휴에 잘한 일은 은유 작가의 발견.
휴전이 되고 집에서 결혼을 재촉했다. 나는 선을 보고 조건도 보고 마땅한 남자를 만나 약혼을 하고 청첩장을 찍었다. 마치 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처럼 나에게 그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 남자에게는 청첩장을 건네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나서 별안간 격렬하게 흐느껴 울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박완서의 단편 '그 남자네 집'에 나오는 대목이다. 감탄사가 나왔다. 있는 그대로 사실 묘사만 정확해도 진실은 드러난다. 거짓으로 우는 건 아니지만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것도 아니라니. 눈물의 이중성에 관한 탁월한 보고다.
마음의 일들을 밝혀 낸 글에 끌린다. 내 마음 나도 몰라 울다가 이런 글을 만나면 웃는다. 문장을 낱낱이 뜯어 본다. 동사부터 동그라미 친다. 재촉했다, 찍었다, 알렸다. 울었다, 주어와 술어의 호응이 명료하다. 하나의 문장에 하나의 사실이 완강하다. 최소의 문장이 짧게, 길게, 길게, 짧게 리듬을 탄다. 사건과 감정을 끝까지 응시하는 힘까지. 좋은 글의 요소를 모두 갖췄다.
그녀가 노트에 적어 놓은 기억하고 싶었던 글이 에세이 소재가 되었다. 글쓰기의 기본을 알려 준다.
부제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 이 책 읽으면 지금보다 조금은 잘 써질까?
그녀가 추천한 책
연휴가 거의 끝나간다. 내일 참으로 출근하기 싫.다.
해결되지 않은 민원인은 아침부터 전화할까? 관장 바꾸라고 하려나?
나도 한때는 관장이었는데...
지나고보면 별거 아닐텐데 어쩔 수 없는 소심쟁이다.
여우꼬리)
도서관 야간 프로그램 핸드드립 강의를 듣고 있다. 그동안 시들했던 커피 내리는 일이 다시 재미있어졌다.
세번째 시간에는 가장 맛있게 커피 내리는 사람에게 남은 원두를 주는 미션에서 1등을 했다. 잡 맛이 조금 나긴 하지만 맛있는 커피란다.
원두 24g의 커피를 내릴때 커피 뜸 들이는 시간 30초, 전체 커피 내리는 시간 2분 30초 이내.
강사도 타이머를 재면서 한다. 물의 양은 100cc. 진하기에 따라 물을 섞을 것.
커피 내림도 정성이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