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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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온다 리쿠는 <밤의 피크닉>을 집필하기 전, 보행제에 참가해봤던 게 분명하다. 안나의 동생처럼 몰래 흰 체육복을 구해 입고 걸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농밀하게 걷는 동안의 감정을 전달하지 못하리라. 머리로 체득한 철학보다 몸으로 체득한 철학이 더 절절하다는 게 평소의 지론이었는데, 나도 깊은 생각을 좀 해보기 위해 그들처럼 하루 낮과 밤을 꼬박 걸어봐야 할 일이다.

그리고.

밑줄을 긋다가 발견한 예상치 못했던 버릇 하나. 왠지 오른쪽 페이지, 그러니까 홀수 페이지에만 밑줄이 그어지더라. 나의 뇌는 왼쪽을 읽을 때보다 오른쪽을 읽을 때, 더 팽팽 돌아가나 보다. 혹은 오른쪽에 시선이 머무를 때 감성이 이성을 누르는지도... 다른 책에 비해 유독 밑줄긋기를 한 독자들이 많아 하나하나 다 살펴봤는데, 같은 곳에 밑줄 그은 사람들이 꽤 많은 것도 반가운 일. 역시 좋은 생각은 어디서나 통하는 법이다. 시간과 마음, 그리고 요즘 상처받은 '연애'에 대해서도 배울 것이 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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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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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처럼 했던 것들이 어느 날을 경계로 당연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행위와 두 번 다시 발을 딛지 않을 장소가, 어느 틈엔가 자신의 뒤에 쌓여가는 것이다. -19쪽

"그렇지만 너희들 뭔지 모르게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 이렇게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뭐 그런 분위기."-23쪽

수면이라는 것은 고양이 같은 것이다. 시험 전날처럼 부르지 않을 때는 잘도 찾아와서, 잠에서 깨어나면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으면 죽어도 오지 않아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하게 한다.-29쪽

"웃지 마. 소풍 도시락이라고 하면 당연히 비엔나 꼬치잖아."-48쪽

일상생활은 의외로 세세한 스케줄로 구분되어 있어 잡념이 끼어들지 않도록 되어 있다. 벨이 울리고 이동한다. 버스를 타고 내린다. 이를 닦는다. 식사를 한다. 어느 거이나 익숙해져 버리면 깊이 생각할 것 없이 반사적으로 할 수 있다.
오히려 장시간 연속하여 사고를 계속할 기회를 의식적으로 배제하도록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생활에 의문을 느끼게 되며, 일단 의문을 느끼면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촘촘히 구분하여 다양한 의식을 채워 넣는 것이다. 그러면 의식은 언제나 자주 바뀌어가며 쓸데없는 사고가 들어갈 여지가 없어진다.-60쪽

"다카코는 겉보기는 무심해 보이지만, 알맹이는 의외로 순정파라니까."
"무심해 보인다기보다 반응이 늦은 거지. 신경전달이 둔해서 얼굴에 감정이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
"아하하."
"이거 정말이야. 그러니까 무슨 말을 들어도 한참 시간이 지나서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하는 거야. 자주 그래. '그러고 보니, 그때 좀 심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빌어먹을, 그렇게 심한 말을 하다니.' 하는 식으로."-67쪽

지구는 둥글어서 그것을 누군가가 꼬옥 껴안고 있다.
수평선을 보면 언제나 그런 느낌이 든다.-83쪽

"오래된 마을로 그다지 크지 않고 산보할 수 있는 자연이 있는 곳이래."
불쑥 리카가 끼어들었다. 다카코와 치아키는 당황한다.
"뭐가?"
"독창적인 학문이 생겨나는 마을의 조건이."-93쪽

처음 가는 길인 경우 돌아올 때가 짧게 느껴지는 것은 뇌가 이미 익숙해져서 정보처리를 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113쪽

"... 마지막까지 다 읽었을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면, 어쨌든 머리에 떠오른 것은 "아뿔싸' 하는 말이었어."
"아뿔싸?"
"응. "아뿔싸, 타이밍이 늦었다.'야. 어째서 이 책을 좀더 옛날, 초등학교 때 읽지 않았을까 몹시 후회했어. 적어도 중학생 때에라도 읽었더라면. 10대의 첫머리에서 읽어두어야 했아. 그랬더라면 분명 이 책은 정말 소중한 책이 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해 뭔가가 되어주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분해서 견딜 수 없어졌어. 사촌형은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주었던 게 아니었어. 우리 남매의 나이며 흥미 대상을 생각해서, 그때에 어울리는 책을 골라주었던 거야. 사촌형이 책을 주었을 때 바로 읽었더라면, 사촌형이 골라준 차례대로 순순히 읽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만큼 분했던 일은 최근에 없었던 것 같아."-155쪽

뭐, 생각해 보면 매년 이랬던 것 같군. 행사 당일까지는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에 우물쭈물하지만, 막상 시작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 마음에 남는 것은 기억의 웃물뿐. 끝난 후에야 겨우 여러 장면의 단편이 조금씩 기억의 정위치에 자리 잡아가며, 보행제 전체의 인상이 정해지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177쪽

까치발을 하고 자신에게 맞지 않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남자아이도 있지만, 언제나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오는 유이치의 그 이성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었다. 친구들과의 의미 없는 일상적 대화가 우울해졌을 때, 유이치의 생각 깊은 이야기를 듣는 것은 즐거웠다.-220쪽

시간의 감각이라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순간인데, 당시에는 이렇게도 길다. 1미터 걷는 것만으로도 울고 싶어지는데, 그렇게 긴 거리의 이동이 전부 이어져 있어, 같은 일 분 일 초의 연속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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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 한국문학대표작선집 14
채만식 지음 / 문학사상사 / 199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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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한국문학을 알아야 수능에 도움이 된다 해서 어기적어기적 읽었던 책.

이제 종잇장도 누렇게 바스락거릴 정도가 된 후 다시 읽어보니, 강산 변한 10년 세월만큼 내 감성도 변했구나. 어떻게 이리도 문장 하나하나가 입에 짜악짝 붙을 수 있을까. 학교에서 밑줄 그어가며 단어 뜻 외워가며 읽던 그맛과는 100% 다르다.

게다가, 요즘 연애기분에 흠벅 젖어서인지, 읽는 구절구절마다 내 딴엔 러브러브 모드다. 윤직원 영감과 춘심이의 사랑까지 부럽기만 한 걸 보면 내가 단단히 홀려도 홀린 모양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영감과 춘심의 동침 장면까지 가지 않은 채 소설이 끝나는 건 퍽이나 다행이다. 할아버지와 손녀애기의 정사는, 그게 사랑이라 해도 징그러울 텐데, 하물며 반지 하나 사주고 하는 정사라니! 요즘 말로 엔조이 아닌가. 할아버지부터 아들 손주 며느리 할 것 없이 모두모두 후레자식이니 그 정도야 세발에 피라지만, 어쨌거나 만 하루만에 소설이 마무리되는 건 두고두고 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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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 한국문학대표작선집 14
채만식 지음 / 문학사상사 / 199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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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심이는 그런데, 우선 반지 한 개 얻어 가질 일이 좋아, 온갖 정신이 거기만 쏠려서, 제 부모한테 발설을 하지 말라는 신칙도 그저 건성으로 대답을 하다가, 윤직원 영감이 뒤를 내는 눈치니까는, 되레 제가 지천을 해준 것이고, 그런 것을 윤직원 영감은 지천이 되었건 코 묻은 밥이 되었건, 그런 체모는 잃은 지 오래고, 애인의 맹세를 믿고서 적이 안심을 했습니다. 자고로 노소없이 사랑하는 이의 말은 무엇이고 곧이가 들린다구요.-183쪽

연애에는 소위 퍼스트 임프레션이라는 게 제일이라고요. 과연 둘이 다 같이 첫인상이 만점이었습니다.-205쪽

찰거머리처럼 붙어 앉아서는 쫀드윽쫀득 졸라댑니다.-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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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 경제학 - 30대를 위한 생존 경제학 강의
유병률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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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목조목. 조근조근.

뒤엉킨 실타래를 뜨거운 김 후끈 쐬어서 펴주는 기분.

조지 오웰의 말이 이럴 때 딱 들어맞는다. 그의 명작 <1984>에서 했던 말.

"훌륭한 책이란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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