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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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시를 읽으려면 조용히 취해 있어야겠다. 그처럼 가난하지 못했고, 그처럼 일찍 죽지 못했고, 그처럼 슬프지 못했으니, 그 간극을 벌충하려면 어쩔 수 없다, 조용히 취하는 수밖에. 

그리고, 참 많이 고맙습니다. 덕분에 수렁에서 조금이나마 헤어나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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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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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

<가수는 입을 다무네> 中
-54쪽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中-68쪽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그집 앞> 中-78쪽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는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81쪽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손을 가리켜 神의 공장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굶주림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무엇엔가 굶주려 있었다.

<집시의 시집> 中-90쪽

나는 즐거운 노동자, 항상 조용히 취해 있네
술집에서 나를 만나려거든 신성하 저녁에 오게
가장 더러운 옷을 입은 사내를 찾아주오

<집시의 시집> 中-91쪽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봄날은 간다> 中-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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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 - 하루키가 말하는 '내가 사랑한 음악'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9월
구판절판


그의 연주회에 가본 사람은 입을 모아 제르킨의 연주는 레코드로 듣는 것보다 현장에서 직접 듣는 쪽이 훨씬 감동적이라고 말한다. 그가 만년에 일본에 왔을 때 연주를 들으러 간 어느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아무튼 연주하다 실수하는 경우가 많아.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았지. 하지만 진짜 마음에 와 닿더라고, 그 연주가 말이야." <제르킨과 루빈스타인>-166쪽

음악으로서 순수하게 우수하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건 물론 정론이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소설가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을 수 있겠으나- 음악을 매개로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나 감정을 좀 더 밀접하게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 뭔가 득을 본 듯한 유쾌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음악을 듣는 방법이 있어도 괜찮을 듯하다. <제르킨과 루빈스타인>-184쪽

이상한 예를 들어 송구스럽지만 괜스레 전희만 능숙한 남자 같아 신용하기에는 좀 미심쩍은 면이 있다. (개인적 감상) <윈턴 마살리스>-211쪽

그것이 재즈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할 만큼 녹아웃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 <윈턴 마살리스>-219쪽

그러한 그 사람에게서만 맛볼 수 있는 기분 좋은 정취에 일단 익숙해지면 좀처럼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어진다. 비속한 표현을 빌리자면 마약을 파는 이가 손님에게 주사를 한 대 놓고 나서 "어때? 젊은이, 기분 좋지? 약기운이 돌지? 다음에 또 돈 가지고 와" 같은 얘기가 되고 만다.
여담이긴 하지만 음악뿐만이 아니라 글의 세계에서도 이러한 두드러지는 비틂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만일 글의 구석구석에 그 작가가 가지고 있는 마약적인 기호 같은 것을 자유롭게 단편적으로, 혹은 집적 부여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문체'를 구사해 낼 수 있다면 그 작가는 적어도 10년 정도는 그것으로 밥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스가시카오>-232쪽

어쩌다 텔레비전 연속극 같은 걸 보게 되면 경박한 느낌을 주는 등장인물의 대사에 견디다 못해 곧바로 전원을 꺼버리는 일이 있는데, 상황은 그것과 어느 정도 닮아 있다. 나는 온갖 J-POP의 가사라든지 텔레비전 연속극의 대사라든지 아사히, 요미우리를 비롯한 신문의 기사 문체 같은 것은 일종의 '제도 언어'라고 늘 인식하고 있다. <스가시카오>-234쪽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 :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인 무대 기법의 하나. 기중기와 같은 것을 이용해 갑자기 신이 공중에서 나타나 위급하고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수법이다.-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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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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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에 대한 새로운 발견. 김남일의 소설은 왠지 어려울 것 같아 손을 내밀지 않았는데 이제 한 번 도전해 봐야겠다. 산문이라는 특성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문체가 참 마음에 든다. 군더더기가 없는 듯하면서도 감정에 호소할 때는 어찌 그리 마음을 싸악싸악 문지르는 비유를 해낼 수 있는지.

평소에도 '책'에 관한 책을 매우 좋아하는 편인데, 이 책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더 많은 책들이 읽고 싶어진다.

-. 서점에서 새 책을 '소유'하고 난 뒤엔 전찻길이 멀수록 복되다는, 식민지 시대 최고의 문장가 상허 이태준의 <무서록>.

-. '책'보다는 '冊'이 더 아름답고 冊답다는 소설가 이태준의 <복덕방>.

-. 식민지 경찰로 근무했다는 낯선 이력의 소유자 조지 오웰의 <식민지의 사계>.

-. 출판사에서 돈을 받아내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다는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

-. 자만심에 가득찬 의고체의 매력이 돋보이는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

-. 담 너머의 미래를 전혀 설계할 수 없어 대신 발 밑 세계에 탐닉했던 정치범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

-. 60년대 초반 사이공의 평범한 여학생 홍이 광기의 역사에 휘말리는 과정을 추적한 응웬 반 봉의 <사이공의 흰 옷>.

-. 고약한 작가 제임스 핀 가너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베드타임 스토리>.

-. 미술평론가이자 화가인 근원 김용준의 <근원수필>.

-. 77년부터 82년까지 서울 한복판 산동네에 살던 한 소년의 성장기를 그린,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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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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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고향이란, 특히 글쟁이들에게 고향이란, 아침 겨우 때우고 나면 막바로 점심 걱정을 하는 징글징글한 굶주림과 자고 나면 꿈처럼 늘어나는 빚, 그리고 점심시간 물배를 채운 뒤 퀭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유난스레 새파란 하늘 같은 것이었고, 온갖 종류의 풀과 꽃과 나무 이름이었으며, 인공 시절 뒤란 대숲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렸다는 삼촌의 빛바랜 흑백사진 속 잘생긴 얼굴과, 그런 삼촌을 가슴에 묻고 평생 수절한 숙모의 너무도 어여쁜 볼연지 같은 것이었으며, 때로는 장터 마당에 코주부 안경을 끼고 나타나 쿵짝쿵짝 북을 치던 약장수라든지 이마로 못을 박고 안광으로 벽돌을 깨고 입으로 불을 토해내던 천하괴력의 차력사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지금은 기억마저 희미해져 더욱 아련하기만 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것, 그게 바로 고향이었다.-13쪽

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압고 더 '冊'답다. <소설가 이태준>-22쪽

경제력보다 더 중요한 게 혁명적 정열의 보전이었다.-37쪽

더도 덜도 없이 이 나이는 꼭 그렇게 오는 것만 같다. 이제 눈부시게 따가운 햇살을 피해 슬슬 '그늘의 미학'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 문득 허무해지는데, 엎지른 죽그릇 같은 마음 한구석에서 쑥스럽게도 꿈이 새록 솟는다. 면 단위 마을의 공공도서관 관장, 그보다 더 작은 마을의 별정우체국 국장, 하루에 두 차례망 기차가 서는 간이역의 역장, 김치박물관이나 우표박물관 같은 특수 목적 박물관의 학예관, 시키는 사람은 없어도 할 일은 많은 향토사학자, 발품으로 먹고 사는 여행전문기고가...... 세상에서 가장 한가하면서도 가장 보람 있을 것만 같은 직업들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다.-45쪽

지난해 장미 이후론 한 번도 물맛을 보지 못한 커튼-46쪽

속도에 대한 부담감을 털어버리면 안 보이던 것도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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